소설리스트

0과 1-223화 (223/293)
  • 223.

    “못된 놈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조프리 전하를…….”

    “저 불쌍한 분을.”

    궁인이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궁인들은 고개를 젓고 혀를 차고 있었다.

    난 더 민망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왕자를 안쓰러워하는 게 말이 되나? 태어나서부터 비단옷 두르고 잘사는 앤데. ‘타고난 복이 많구나’ 하고 질시하는 게 보통 아닌가?

    놀랍게도 궁인들에게조차 난 여러 비극을 겪은 비운의 왕자인 모양이었다. 궁인들이라면 왕족 사는 꼴을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인데도 그랬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허공을 봤다. 밤바람이 얼굴을 식혀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탑에 누군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그곳에 등불은 없었다. 검은 형체였을 뿐인데도 난 그가 에드워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인파 속에서 떨어져서 그는 혼자 조용했다.

    보러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또 괜한 짓을 저지른 거 아닌가?

    귀족들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린 적이 있나?

    어깨가 굳고 생각은 같은 구간을 돌았다. 그랬던 모양이다.

    나를 내리누르던 부담감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아드레날린이 채웠다.

    “전하?”

    “잠깐만!”

    난 행렬에서 이탈해 탑으로 달려갔다. 날은 완전히 저물어서, 탑 그림자 아래는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내 발이 딛는 곳조차 보이지 않았다. 계단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위로, 더 위로 향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일 줄 알았다. 그의 뒤로 새까만 하늘이 보였다. 땅에 모인 등불 때문에, 에드워드가 있는 곳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에드워드, 내일 올 거지?”

    관리들에게 맡겨 놓고 뒷짐 질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내 책임이었다. 내가 물었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에드워드는 두 손을 내밀고 있었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는 듯한 모양새라, 난 무심결에 그 팔을 붙잡았다.

    그가 내 손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지경이었다.

    에드워드는 침묵했다.

    “난 증명했어. 너도 알지?”

    뭘 설득하려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드워드가 알아주길 바랐다.

    난 나를 책임질 수 있다.

    내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다.

    솔직히 90퍼센트는 운이 아닌가 싶지만.

    전부 잡았다!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귀족들도 도망치지 못했고, 여론은 왕실 편이다.

    저 귀족들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남아 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하지만.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길 바라?”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래.”

    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쉽게 대답했다.

    “갈게.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에드워드는 조용히 말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 *

    왕족의 장례는 생전에 머물던 침실에서부터 시작됐다.

    침실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며 주인이 매일 잠드는 장소였다. 죽음을 끝이 아니라 삶의 연장으로 보기 때문에, 단지 잠드는 곳이 바뀔 뿐이라는 의미로 장례의 시작이 침실이 되는 것이다.

    왕비님의 침실은 생소했다. 이곳에 들어와 본 기억이 없다. 내밀한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난 왕비궁을 자의로 찾은 적이 별로 없었다.

    조프리는 이곳을 찾은 적이 있을까? 난 모르겠지만. 이렇게 약품 냄새가 나는 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강한 약내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관 속의 왕비님은 마치 잠들어 있는 듯했다.

    왕비님이 두려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몹시 작았다.

    왕도 왕비님도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프리의 미래가 고정되어서 바뀔 수 없으며, 그 이유가 두 사람 때문이라고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건 과거였다.

    왕과 왕비님이 강하게 느껴졌던 건 두 사람의 그림자 때문이다.

    조프리도 에드워드도 그 그림자 안에 있었다. 내가 어떻게 발버둥 쳐도, 두 사람과 로제 부인까지 얽힌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플랑베 부인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가해자는 왕과 로제 부인이었다.

    홀로 타국에 넘어온 왕비님은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 했으나, 두 사람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결국 왕은 왕비님을 해쳤다. 그 끔찍한 광경을 궁인은 숨어서 지켜봤다.

    플랑베 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비님은 조프리 전하를 지키고자 하셨어요. 오직 그것만을 바라셨어요.’

    그러나 난 그녀가 죽은 로제 부인을 언급할 때마다 왕이 내게 퍼붓던 저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로제 부인의 복수를 하고자 했던 왕을.

    바꿀 수 없는 과거가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친다니 불합리한 일이다.

    플랑베 부인은 내게 셔벗으로 가 살아남으라고 말했다. 진짜 조프리였다면 부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리고 셔벗에서 힘을 키워서, 에드워드에게라도 복수하려고 했을까?

    가정해 봤자 의미는 없었다.

    난 과거부터 이어진 이야기의 끝을 들은 것 같았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퇴장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마차를 습격한 기사들은 왕의 측근들이 공개 처형을 당할 때 함께 목이 달아났다.

    훌륭한 봉지를 갖거나 전장에 나아가 명성을 쌓은 기사들이 아니었다.

    왕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냥터 몰이나 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관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난 그 뒤를 따라가다가, 갑자기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걸음을 멈췄다. 침실 밖에서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관을 호위하듯 움직이다가 멈춰 섰다.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조프리.”

    그때 에드워드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왔다.

    그가 나타날 순서는 지금이 아니었지만, 그는 마치 원래 정해진 절차인 것처럼 내게 다가왔다.

    주어진 대형에 따라 서 있던 귀족들이 한 자리씩 밀려났다.

    약간의 소란이 일었으나 에드워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내 옆에 섰다.

    정말로 에드워드가 왔다.

    난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은 우리가 우애 좋은 형제라는 듯 보고 있었다.

    어느새 토기가 가라앉았다.

    긴 행렬은 예배당에서 멈췄다. 낮에 출발했으나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높은 천장 가득 초가 휘황한 빛을 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천을 쓴 귀족들과 안으로 들어갔다. 대신관은 낮은 자세로 우리를 맞이했다.

    관의 내부는 봉오리가 크고 생생한 생화로 장식되었다. 수백 개의 진주알이 투명한 줄에 꿰인 채 꽃을 에두르고 있었다. 그 위를 덮은 천은 셔벗의 비단이었다. 내게 미적 감각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왕비님의 마음에도 들길 바랐다.

    대신관이 기도문을 읊었다.

    귀족들은 꽃과 함께 애도의 말을 바쳤다.

    나라 안의 귀족이 전부 찾아온 듯했다.

    그렇진 않겠지만, 거의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를 개인적으로 알현할 힘이 없는 귀족들도 내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붙였다.

    인기 좋은 왕자 같았다.

    한동안 궁이 텅 비었던 걸 기억하고 있는데. 언제나 생각하지만 참 발 빠른 사람들이었다.

    왕비님이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것이다.

    난 웃으며 귀족들을 상대했다. 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로의 말이 질릴 즈음이 되자 도트가 귀족들을 가로막았다.

    로웰은 관리들과 함께 있었고, 알렉스는 내 그림자 같았다.

    마지막은 내 순서였다. 난 흰 꽃을 들고 나아가 관 위에 올렸다.

    “죄송해요.”

    준비된 말이 있었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뭐에 대한 사과인지는 나도 몰랐다.

    조프리가 된 것?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앞으로 조프리로 살아갈 것도, 역시 왕비님에게 사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드워드는 꽃을 바치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채 그레이와 주어진 자리에 서 있었고, 가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만 보고 있었다.

    * * *

    장례식이 끝난 당일 관리들에겐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냐면, 로웰이 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언제 관리가 됐어?”

    “제가 참 유능해서 사랑을 받나 봅니다.”

    로웰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트가 비웃었다.

    “와,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에요!”

    그는 로웰이 가져온 ‘마법의 음료’를 따랐다. 둥근 테이블을 빙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 잔은 다 채웠는데 내 잔만 비워 두었다.

    “도트?”

    “전하께는 차를 드릴까요? 따듯한 초콜릿은 어떠세요?”

    어린애야?

    도트가 실컷 어린애 취급을 하는 걸 로웰이 말렸다.

    “도수가 낮은 술이라 괜찮을 거예요. 여성분들도 쉽게 마시는 과실주니까요.”

    “그렇구나, 작업용이군요! 로웰 님이 이런 걸 참 잘 아시죠.”

    “전하. 머그잔을 가져오겠습니다.”

    알렉스가 내 앞의 술잔을 치웠다. 로웰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 옆에서 웃다가 알렉스의 잔으로 술도 두어 모금 얻어 마셨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맞물려서 기분도 붕 뜨고 미소가 나왔다.

    일정이 고됐을 텐데 다들 잘만 마시고 있었다.

    눈이 감겼다.

    새벽에 깼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알렉스가 옮긴 모양이었다.

    흰 커튼이 안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며, 흐릿한 상이 명료해졌다. 바람이 들어와 여름밤의 온화한 공기를 식혔다. 꿈같았다.

    난 커튼을 걷었다.

    테라스는 비어 있었다.

    도트는 테라스 유리창을 잘 열어 두지 않는다. 내가 밤공기를 잠깐이라도 쐬면 감기에 걸려 앓아누울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최근에 더 강해진 듯했다.

    테라스에 사람은 없었지만, 아예 비어 있는 건 아니었다.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목에 리본이 감겨 있었다.

    장식이야 아무래도 좋지만.

    뭘까?

    마법의 음료?

    다음 날 로웰에게 물어보자, 그는 병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봤다. 그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술은 아닌데요. 약인 것 같은데. 성분을 조사해 볼까요?”

    “부탁해.”

    로웰은 몇 시간 만에 돌아왔다.

    “강력한 수면제예요, 전하. 이런 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배합도 특수하던데.”

    몰라. 누가 줬어.

    저건 또 뭘까?

    아무튼…….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열흘 뒤 셔벗의 사신이 찾아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