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이후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실 난 여유롭게 누굴 잡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만나야 할 귀족이 많았다. 그들이 보낸 사람들과 물품도 확인해야 했다.
오렌지 백작이 내 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왕성을 드나드는 귀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가까운 도시와 영지에선 대부분의 귀족들이 찾아온 듯했다.
더 먼 곳에서는 발 빠른 기사를 보내 조의를 표시했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관리들은 매일 밤을 새우는 듯했고, 로웰도 그 사이에서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만 놀고 있을 수 없었다.
“왕자님, 마몽의 기사가 찾아왔는데요…….”
“전하, 올가 자작이…….”
귀족들은 소식이 빨랐다. 나를 피하던 자들도, 왕비님의 장례식이 전에 없던 규모로 치러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왕궁 문을 두드렸다.
즐거운 만남은 아니었지만, 난 그들을 피하지 않았다.
왕비님이 보셨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왕비님은 조프리가 인맥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했다.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애초에 지금 찾아오는 사람들은 조프리의 믿을 만한 친구가 될 수도 없었겠지만.
올가 자작의 가슴 절절한 위로사를 듣고 그를 보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관리들과 장례 절차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도트가 신문을 가져왔다.
신문 첫 면에는 ‘조프리 전하의 눈물’ 따위가 실려 있었다.
울 자신은 없었지만. 난 신문에서라도 조프리가 울게 놔뒀다.
관리들은 배치도를 가져왔다. 장례식에서, 에드워드의 정해진 자리는 내 옆이었다.
“에드워드가 참석한대?”
“예? 무슨 당연한 말씀을.”
“물론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혹시 에드워드 전하께 들은 말씀 있으십니까? 설마 불참하신다는 말씀이라도…….”
관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난 에드워드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다고 알려 줬다. 그래도 관리들은 안심하지 못했다.
“에드워드에게 물어보든가.”
“그래도 될까요?”
예무 관리가 물었다. 왕비궁을 맡고 있는 관리가 옆에서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께선 친절하신 분이에요. 걱정 마세요.”
“넌 헛소리하지 말고…….”
관리들은 저들끼리 싸우다가 나갔다.
에드워드가 친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친절하게 카운트다운을 하긴 했다.
반역자들을 못 잡아들이면 또 그 싸움이 시작되는 걸까? 넌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느니, 네가 뭘 할 수 있냐느니.
잘 뜯어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용과 별개로 말 자체가 개떡 같긴 했다.
날이 저물었다. 장례식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기한은 못 맞추겠다.
애초에 촉박한 시간이었다. 내 입으로 시간제한에 동의한 적 없다고 우기면 통할까?
그때 도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허락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이라 난 좀 놀랐다.
“도트?”
“와, 왕자님! 나가 보셔야 해요. 밖에, 중앙 광장에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말에 훌쩍 올라 박차를 가했다. 말갈기가 휘날려 내 얼굴을 때렸다. 중앙 광장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날이 지는 어두운 하늘 아래 평탄한 장식돌이 깔린 광장이 보였다.
그곳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광장은 전통적으로 공개 처형이나 축제가 일어나는 장소였는데, 둘 다 사람들을 흥분시킨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말 축제라도 열린 듯했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그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공개 처형을 구경하는 것처럼 빙 둘러서 있었다.
말을 타고는 인파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난 고삐를 도트에게 넘기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알렉스가 앞장서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구경꾼들은 버텨 내지 못했다.
“아, 뭐야?”
“누가 이렇게 밀쳐?”
불평하던 구경꾼들은 알렉스를 보고 조용해졌다. 알렉스는 누가 봐도 기사였다.
난 편하게 광장 안으로 진입했다. 광장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내가 애타게 찾던 귀족들이었다.
“너, 네놈들이 이러고도 살 것 같으냐?”
피넛 남작이 궁지에 몰린 악당처럼 말했다. 그러나 저런 말이 위협적이려면 적어도 말을 더듬지 말아야 했다.
그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 웅크리고 있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악!”
갑자기 남작이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지?
남작은 자기 얼굴을 손으로 닦더니,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찌할 겁니까? 처벌해 보시죠.”
누가 봐도 평민인 남자가 벌벌 떨며 말했다. 그는 맨발이었고 한 손에 신발 한 짝을 무기처럼 들고 있었다.
다른 한 짝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남작을 친 건 그가 던진 신발이었다!
그는 떨면서도 킬킬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구경꾼들에게 전염됐다.
숨죽인 웃음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소리가 열기를 띠더니,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우리를 처벌한다고? 무슨 수로?”
“더러운 반역자! 네놈들에겐 신발도 아까워!”
구경꾼 무리에 속한 내게도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귀족들은 숨도 쉬지 못했다.
내가 시민 혁명 같은 걸 보고 있나? 목덜미까지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숨어 있는 귀족들을 끌어냈을까. 어떻게 사람들이 모였지?
“이, 이이…….”
남작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혀가 마비된 듯했다. 그는 입을 닫고 망연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에게 누군가 돌을 던졌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다. 돌은 남작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에 남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야!”
그게 신호가 됐다.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리는 광경 같았다.
다음 순간 달걀이 남작의 머리에 적중했다. 무언가가 날아들었고, 고함이 들렸다. 웃음과 비명이 섞여서 끔찍한 열기를 만들어 냈다.
귀족들은 얼어붙었다.
남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선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고 느꼈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불쌍하진 않았다. 사병이 수도를 공격했다면 가장 먼저 희생당할 건 내성 밖에 사는 백성들이었다.
순간 남작의 고개가 내게 고정됐다.
“조프리 왕자!”
그가 비명처럼 외쳤다.
“당신이! 당신이 여기에! 이, 이런, 이런 함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처음부터…….”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께서 오셨다고?”
남작이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주변이 웅성거리더니, 나를 두고 양옆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조프리 전하께서!”
“아아, 헌앙하신 것 좀 봐…….”
“무사하셔. 건강한 모습이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 옆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와 귀족들 사이로 길이 생겼다. 가야 하는 분위기다.
난 알렉스를 대동하고 귀족들에게 걸어갔다. 남작은 막상 내가 다가가자 공포에 질린 듯했다.
난 그를 잠시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반역을 꾀한 것치고 대범하진 않군.”
“저, 전하…….”
무슨 말을 할까? 들어나 보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 설득하려 할까? 협박할 게 남았나?
허락을 얻은 남작이 말했다.
“살려 주십시오…….”
* * *
떠들썩한 밤이었다. 에드워드에겐 내가 연락을 넣었다. 알렉스는 끝까지 내 곁에서 주변을 경계하다가, 귀족들이 전부 연행되고서야 한시름 놓았다.
경비대 병사들이 포박한 귀족을 끌고 갔다. 경비대장은 실적을 올리지 못해 우울한 듯했으나, 내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걸로 부족한 실적을 메울 수 있다는 계산이 선 모양이었다.
“전하의 명민한 계략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수도에 사람이 늘어난 것을 틈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무슨 짓이라 해 봤자 도망이나 치려고 했겠지만.
귀족들이 오늘 잡힌 건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다음 날이 장례식이었기 때문이다. 피넛 남작은 사람들이 정숙 기간에 들어가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피넛 남작이 잡혔다. 남작은 동태를 살피라며 그의 사용인을 내보냈지만, 사용인은 자유의 몸이 된 김에 경비대로 달려갔다.
남작은 안가에서 끌려 나왔고, 그 소란에 주택가가 시끄러워졌다.
반역자들의 사용인은 안 그래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고…….
거대한 소란이 된 것이다.
“그대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군.”
“하하, 설마요. 전하의 옥안은 제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빛이 나는 것을요.”
난 그에게 귀족들이나 잘 끌고 가 달라고 말했다. 한시름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자,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권력욕 투철한 경비대장을 보아 넘길 기분이 생기질 않았다.
그런데 그를 앞으로 보내자 더 큰 문제가 내게 닥쳐왔다.
“전하, 이쪽을 한 번만 봐주십시오.”
“세상에, 얼굴이 반쪽이 되신 것 좀 봐.”
백성들 사이를 지나가느라 얼굴이 타오르는 듯했다. 경비대장이 옆에 있을 땐 그가 하는 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덜 들리기라도 했다.
이래서 거짓말을 하고 못 산다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
피습당하고도 의연한 왕자 취급을 받으려니 온몸이 배배 꼬이고 귀가 뜨거워졌다.
난 경비대장을 좀 더 재촉해 빠르게 왕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성안에서도 구경 나온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놀라고 기뻐해서 마치 개선 행렬이라도 이끄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