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1화 (221/293)
  • 221.

    백작의 뒤를 따라온 자들도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로브를 쓴 수상한 남자들을 굴복시킨 모양새가 됐다.

    그들의 뒤로 비밀 통로가 반쯤 열렸다. 알렉스와 눈이 마주쳤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냐. 들어가 있어.

    비밀 통로가 조용히 닫혔다.

    “무슨 일이야? 이러지 말고 천천히 이야기해 봐.”

    난 몸을 굽혔다. 오렌지 백작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전하, 제 말은 믿어 주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지. 목소리에 힘이 없군. 굶고 지냈나?”

    내가 딱하다는 듯 말하자 오렌지 백작은 눈시울을 붉혔다. 물론 그의 달덩이 같은 얼굴을 보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돈이면 다 되는 모양이다. 숨어 지냈음에도 별로 고생한 것 같지 않다.

    “경비병들에게 쫓기다 보니…….”

    “고생이 많았군. 그러게 왜 그런 짓을 저질렀나?”

    표정을 굳히자, 백작은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전하. 모함입니다! 에드워드 전하께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은 그게 전부인가? 그대가 나를 극진하게 대했던 걸 기억하고 있어. 그대를 안으로 들인 건 내 마지막 자비야. 사형당하기 전에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지.”

    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턱을 괸 채 내려다보자 백작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가까이 오게 해도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백작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전하, 모르시겠습니까? 이는 에드워드 전하의 음모이옵니다. 전하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뭐?”

    “제 군대가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에드워드 전하가 왜 이런 때 일을 벌였겠습니까? 조프리 전하께서 잠시라도 힘을 갖는 걸 참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선한 의견이었다. 일을 벌인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백작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수염의 결까지 보일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그의 뒤에서 다시 비밀 통로가 열렸다. 알렉스가 검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오렌지 백작은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라도 타인을 설득하려는 끈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육감은 발달하지 않은 듯했다. 저 살기를 못 느낄 정도면.

    아직은 아닐걸. 난 다시 신호를 줬지만, 스스로도 헷갈렸다.

    아닌가? 지금인가?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제 꼴을 보십시오, 전하. 제게 재산, 명예, 그 무엇이 남았습니까?”

    아직 영지도 사병도 목숨도 뺏기지 않은 백작이 말했다.

    남은 거 많지 않나?

    그리고 난 그것들이 탐났다. 반역자들 손에 쥐여 두기엔 위험한 것들이다.

    백작은 눈물로 호소했다.

    “지금 내몰리고 있는 귀족들이 전하의 편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대가 원하는 게 뭔가?”

    설득에 넘어간 척 물었다. 왜 귀족들은 날 조금도 의심 안 할까?

    백작은 술술 불었다.

    “제가 전하를 모시고 수도를 빠져나가게 해 주십시오. 이곳은 전하께 위험합니다.”

    에드워드가 이 장면을 봐야 하는데.

    그를 경계하라는 말을 열 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들으면서도 내가 안 도망치고 있다.

    물론 백작 말의 속뜻은 ‘날 데리고 수도를 빠져나가 줘.’겠지만.

    “그대 뒤의 수행원들은?”

    “힘 잘 쓰는 하인들입니다. 제게 충성하는 놈들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를 극진히 모실 겁니다.”

    “무장했나?”

    “물론입니다, 전하. 검은 궁에 들어오기 전에 맡겼습니다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에게 보낸 신호가 아니었는데.

    로브를 쓴 하인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봤다.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느낀 모양이다.

    소리 없이 열린 비밀 통로로 공기가 통하고 있었다.

    하인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알렉스는 백작의 목을 잡아 바닥에 눕혔다. 바닥이 울렸다. 바움쿠헨의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로브 집단을 덮쳤다.

    비명이 들리자 밖에서부터 서재 문이 열렸다. 복도에서 대기하던 용병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들의 가세는 필요 없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승부가 가려졌다. 오렌지 백작과 바움쿠헨 백작의 하인들 중 승자는 후자였다.

    “이게 무슨……! 전하, 전하?”

    알렉스는 신속하게 로브 후드를 찢더니 백작 입에 구겨 넣었다. 방이 고요해졌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들어야 할 말이 많은데.

    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백작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백작, 동료들과 연락은 되나?”

    * * *

    -한 명 잡았어.

    진행 상황을 보고는 해야겠지. 에드워드에게 연락을 넣었다.

    -여덟 명 남았네.

    친절한 답장이 돌아왔다.

    나도 알아. 에드워드도 내게 사실을 알려 주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경고일까?

    왕비님 장례식은 이틀 뒤였다. 그때까지 다 못 잡아내면 에드워드는 어쩌려는 걸까.

    날 셔벗에 보내지 않을까?

    그게 벌이 되긴 할까?

    오렌지 백작은 다른 귀족들을 잡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 첫 생각이 옳았다. 귀족들은 협력이 안 되는 집단이었다. 서로가 어디로 도피했는지 모르는 건 물론이었고 연락을 취할 수단도 마련해 두지 않았다.

    오히려 백작보다는 그의 하인들이 도움이 됐다.

    “저흰 끝까지 주인님이 전하를 배신할 줄은 몰랐습니다!”

    “설사 주인이 명령했더라도 저희가 전하께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전하, 믿어 주십시오.”

    하인들은 울며 주장했다. 너무 울어서 말이 끊길 지경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죄를 경감하려고 저러는 걸까? 저 정도의 연기력이라면 속아 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초에 고용주의 죄를 사용인에게 물 생각은 없었다.

    “응. 믿어.”

    “예? 그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악당의 수하를 이렇게 쉽게 믿으시면…….”

    “큰일 나십니다, 전하.”

    어쩌라는 걸까? 아무튼 하인들은 자신들이 내 편이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주인의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어른이 전하를 찾아온 건 아마 밀고를 두려워해서일 겁니다.”

    “맞아요. 비열한 데다 겁쟁이이기까지 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이지요!”

    백작, 고리대금업까지 했나?

    이 상황과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긴 했지만. 이 나라 귀족들이 부유한 이유가 있었다.

    고용인들은 백작에게 빚을 지고 예속된 처지였다. 노예 문서만 없을 뿐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고용인들이 모두 바움쿠헨의 하인들처럼 충성스럽고 강직하지는 않았다. 궁인들만 해도 요령껏 뇌물을 받았다.

    더없이 충성스러운 도트조차 왕비님과 친밀한 관계였다.

    백작의 하인들은 처벌받을까 봐 밀고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왕족 시해 미수라면 못해도 평생 유폐다.

    다른 귀족의 하인들은 어떨까?

    난 기자들을 불렀다.

    “귀족들의 위치를 밀고하는 자에겐 그가 전에 저지른 죄를 묻지 않을 거라고 일러. 내가 약속했다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죄를 사해 주신다고요?”

    어리둥절해하는 기자들 틈에서 변장한 기숙사장이 말했다.

    “거리의 범죄자들을 이용하시려는 거군요. 하지만 그래서야 국법의 지엄함을 보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응. 그럼 안 되지.”

    “그 말씀은…….”

    “법을 어길 일은 없어. 그대들을 곤란하게 할 일도 없을 거야.”

    기자들은 아주 곤란하다는 얼굴로 나갔다.

    기숙사장은 마지막까지 남아 가짜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할 말이 남았나?

    “기숙사장.”

    “알고 계셨군요.”

    기숙사장은 수염을 완전히 뜯어 버렸다. 모를 거라고 믿었다니 그게 더 놀랍다.

    “전하께서 거짓을 말했다고 느끼면 고발자들의 배신감이 대단할 겁니다.”

    “상관없어.”

    “하, 하지만 전하께선……. 백성들의 생각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기숙사장이 깜짝 놀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왜 저러는 걸까?

    “내가 기다리는 건 수행원들의 배신이야. 주인의 어리석음이 따르는 사람의 죄가 되어선 안 되겠지.”

    그래서야 주인을 고발할 수 있을 리 없다. 난 배신과 밀고를 적극 장려할 생각이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전하. 전하를 의심하다니.”

    기숙사장은 기뻐하며 나갔다. 저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다.

    정신없는 사람들이 나가자 방이 조용해졌다. 난 소파에 누워 에드워드의 쪽지를 들어 올렸다. 햇빛에 비친 종이가 반투명해져서, 글씨가 두 겹으로 비쳐 보였다.

    뒷면에 뭐가 더 있었나?

    쪽지를 뒤집었다.

    -내 도움이 필요해?

    발견하기 어려운 뒷면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손이 미끄러져, 얇은 종이가 콧등을 치고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내가 성공하길 바라는 걸까, 실패하길 바라는 걸까?

    사람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귀족들이 나보다 뛰어난 이해력의 소유자가 아니길 바랐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그들은 꼼짝없이 잡혀 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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