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20화 (220/293)

220.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있다. 내가 셔벗에 가야 하는 이유.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처음부터 생각한 이유가.

나는 조프리에게 몸을 받았다. 몸, 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시 떠올리기 전까지는 내가 ‘조프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니까.

내가 머무는 방과 나를 위하는 궁인들까지 모두 내 책임이 아니다. 그들이 내게 무슨 감정을 품든 나와는 관계없다.

그렇게 생각할 땐 편했다. 누가 뭘 원하는지 알 필요도 없다. 그게 내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책임지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조프리가 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내가 대단한 성자도 아니고 나를 희생해 전쟁을 막겠다는 생각을 할 리 없다. 애초에 내가 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드워드 말로는 셔벗 왕이 후계자를 원한다는데, 셔벗 왕이 날 보고 ‘이 녀석을 후계로 올릴 바에는 그냥 다른 공작에게 권력을 넘기는 게 낫겠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에드워드의 추측이 틀릴 수도 있고…….

어쨌든 조프리 몸으로 누린 게 있는데 갚아야 하지 않나?

백성들이 위급 상황에 왕자보고 도망가라고 먹이고 재워 주진 않았을걸.

여기까지도 표면적인 이유였다.

“전하, 불을 켤까요?”

“응.”

알렉스가 커다란 몸을 굽혀 초에 불을 붙였다. 주황빛이 그의 얼굴을 따듯하게 물들였다.

그를 구하고 싶다는 건 내 마음이었고, 그를 구한 건 조프리의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를 고아원에 가둔 건 왕비님이다.

알렉스는 셔벗까지 당연히 날 따라오겠지.

“알렉, 무섭지 않아?”

“어둠이 두려우십니까?”

내가 어린아이로 보이나?

“아니. 셔벗에 가는 거.”

“두려우십니까?”

“필리프 왕은 왕비님의 가족이잖아.”

내가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족 형제가 사이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에드워드와 조프리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부고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사실 그래서 셔벗에 가려는 거야.”

웃으며 알렉스를 돌아봤다.

“이상하지?”

“그렇군요.”

이상하다고?

알렉스가 두 번째 초에 불을 붙였다. 방이 좀 더 밝아졌다.

“저도 잘 모르지만, 장례식은 가족들이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마음의 슬픔을 더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난처한 듯 더듬거렸다.

장례는 비스코티에서 치르는데, 이곳엔 왕비님의 가족이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친척이 찾아왔어도 텅 빈 느낌이었다. 그렇다 해도, 아무도 없는 건 외롭다.

터무니없이 감상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그럴 만하다고 대답했다.

그런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알렉, 셔벗에 같이 가 줄래?”

“예. 어디든.”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내 기사.

알렉스는 조프리의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다.

사람을 두고 가졌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 * *

오렌지 백작은 자신이 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훌륭한 귀족이었다. 영지는 관리인에게 맡기고 수도에서 여러 귀족과 어울리며 인맥을 다지고 사업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번 돈보다 잃은 돈이 많지만, 대신 그는 사람을 얻었다. 선대 오렌지 백작 역시 부유했으나, 수도에서 이름이 높지는 않았다.

현 백작은 수도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게다가 그는 조프리 왕자와도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왕자가 정원 꾸미기 열풍을 주도할 때, 가장 먼저 동참한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왕자는 백작의 정원을 보고 감탄했고,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며 백작의 정원을 구경하러 방문했다.

백작은 훌륭한 귀족이었다. 앞으로의 인생도 탄탄대로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파이 공작, 이자가……!”

오렌지 백작은 신문을 구겼다. 동태를 살피러 나간 하인이 신문을 가져왔다. 백작은 기사를 읽고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계획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파이 공작이었다. 그가 명망 높은 왕족이며 또 학자였기 때문에 귀족들은 뜻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재상을 대신해 크래커 소공작이 찬성의 뜻을 밝히니, 그들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일을 주도한 공작과 후에 참석 의사를 밝힌 크래커 소공작이 발을 뺀 것이다.

기사는 삽화까지 곁들여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악한 귀족들은 뜻을 모아…… (중략) ……크래커 소공작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나라에 벌레들이 있다.”

귀족들은 마치 마귀처럼 그려져 있었다. 어깨가 굽었고 덩치가 컸으며, 얼굴엔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반면 습격받은 조프리 왕자는 의연하게 검을 빼 들고 맞서는 모습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백작은 생각을 되짚어 갔다. 조프리 왕자가 합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백작은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들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었으나, 수가 대단히 많았고 선동되기 쉬웠다. 조프리 왕자를 몹시 사랑하기까지 해서, 그들을 이용하기란 식은 수프 먹기처럼 보였다.

밖에선 군대가 호응하고 안에서는 백성들이 아우성치면 에드워드가 버텨 내겠는가?

오렌지 백작은 부유한 귀족일 뿐이었으나 이번 ‘항의’에 성공하면, 어쩌면 대귀족의 반열에 오를지도 몰랐다…….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가문의 격을 그의 대에서 높이는 것이다! 백작은 흥분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지?

애초에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귀족들을 한꺼번에 끌어들여 소탕하려는 음모. 그게 아니라면 이 사태가 말이 안 됐다.

그리고 이런 짓을 꾸밀 사람이라면 한 명밖에 없지 않은가?

에드워드 왕자.

백작은 화가 나고 두려워져서 방을 빙글빙글 돌았다. 예민해진 귀로 밖에서 하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이 조프리 전하를 해하려 하셨다는 게 정말일까?”

“아니면 왜 안가로 숨었겠어?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나?”

“저분이 사람이야? 돈만 된다면 나라도 팔아먹을…….”

“……밖에서는 거리의 거지들도 범인을 찾고 있다더군. 차라리…….”

저놈들이!

백작은 나가서 대번에 하인들을 족치려 했으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려웠다. 저놈들이 합심해서 그를 끌어내면 어쩌나?

평소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인 놈들이 어떻게 감히 그에게 해코지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조프리 왕자가 엮여 있었다. 이미 어리석은 놈들이 들고일어나는 꼴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얼마나 불온한 광경이었던가…….

그는 신문을 다시 움켜쥐었다. 안가에는 건량이 충분히 있었다. 숨으려면 얼마든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대로 버텼다간 저놈들이 어찌 나올지 모른다.

백작은 배신의 공포에 떨면서 한 줄을 읽었다.

-조프리 전하께서는 “원치 않았는데도 나쁜 선택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며 악인들에게도 관대함을…….

기자는 관대함으로 왕자의 성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물러 터진 생각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이 마음 약한 왕자라면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 * *

“왕자님. 손님들이 왔다는데요.”

도트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궁인에게 금화가 든 주머니를 찔러 줬대요.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일이며, 조프리 전하께서도 우리를 찾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대요.”

정말 신기하죠, 라는 어조였다.

신기하긴 했다. 그렇게 수상해 보이기도 쉽지 않을 텐데.

수상한 손님이 내게 전하라고 한 쪽지를 읽었다. 내가 기다린 손님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고생이 많았을 텐데 궁인들에게 친절히 모시라고도 알려 주고.”

“예, 왕자님.”

도트가 나갔다. 나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손님들은 서재로 들어와서도 로브를 벗지 않았다. 그들이 주위를 둘러보기에 뭘 하나 구경했다.

“전하. 다른 자들을 내보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구경하던 게 용병들이었나 보다.

난 손님의 요청을 수락했다.

생각보다 수가 많았다. 귀족들이 각자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협력이 잘 되는 반역 집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명만 고급 로브를 입고 있었고 나머지는 비교적 행색이 남루했다.

다들 귀족이 맞나?

설마 여기까지 혼자 못 와서 하인들을 수행원으로 끌고 온 건 아니겠지. 귀족들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앞장서 있던 남자가 고급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난 그의 얼굴을 알아봤다. 오렌지 백작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말 그대로 사치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에게 크게 감탄하고 내 사치 내공이 얼마나 부족한지 통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가 바닥에 무릎 꿇었다.

“전하, 살려 주십시오! 이는 전부 에드워드 전하의 음모입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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