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8화 (218/293)
  • 218.

    -그레이 좀 빌려도 돼?

    어쨌든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측근이었다. 허락은 맡아 둘까.

    쪽지를 쓰고 둘둘 말아서 도트에게 맡겼다. 도트는 훌륭한 솜씨로 리본 매듭을 지었다.

    그대로 보내려니까 에드워드의 마지막 편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야.

    덧붙여 쓰고 궁인에게 건넸다.

    “에드워드 궁으로 보내.”

    궁인이 쪽지를 가지고 나갔다. 괜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답장은 내가 차 한 잔을 비우기도 전에 돌아왔다.

    -마음대로 해. 나한테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어.

    아, 그래.

    쪽지는 한 장 더 있었다.

    -그리고 네 대답에 대한 대답은, ‘흠’이야.

    “…….”

    그게 뭔데?

    감탄사 같긴 했다.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야?

    찜찜함을 떨쳐 내지 못하고 물어보자, 에드워드에게 답이 돌아왔다.

    -내 생각이 중요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속이 살짝 불끈했다. 화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중요하지도 않은 걸 왜 물어보겠어?

    다시 쪽지를 써서 궁인에게 들려 줬다. 궁인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사실 나도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의 답장은 몇 시간 뒤에 돌아왔다. 궁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쪽지를 받고 읽더니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고 했다.

    “답을 하시려는 것 같지 않아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에드워드 전하께서 붙잡으셨어요. 전하께서는 차를 다섯 잔쯤 마시고, 약도 드시고, 계속 이마를 문지르시더니 몇 시간 뒤에 이걸 써서 주셨어요.”

    궁인이 답장을 내밀었다.

    내용은 이랬다.

    -너 때문에 머리 아파.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 * *

    난 치료받은 기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들은 조프리 궁의 손님용 침실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궁인들이 충분히 녹여 놓았는지, 그들은 내가 들어가자 벌떡 일어나서 맞이하려고 했다.

    물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냐, 누워 있어도 돼.”

    “저희가 어찌 감히…….”

    “죄송합니다,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됐다니까?”

    기자들은 꿈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난 그들을 눕히고 알렉스가 끌어다 준 의자에 앉았다.

    “그대들을 추궁하려고 온 게 아니야. 편히 들어 줘. 그대들은 다른 기자들과 교류가 있지?”

    기자들은 공식적으로 쫓기는 처지다. 경비대에서 굳이 체포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대답을 망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자들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예, 아무래도 저희끼리는…….”

    “정보 교환이 중요한 일이니까요. 경비대를 피해 다니는 것도 비법이 필요하고요.”

    “그런 얘기까진 왜 해?”

    그레이가 대체 얼마나 괴롭힌 거지? 기자들은 몹시 호의적으로 나왔다.

    “다들 불러 줄 수 있어? 도움이 필요해.”

    “혹시 열애설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시려는 건가요?”

    “특종이라면 저희가…….”

    기자들이 눈을 빛냈다. 이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기사는 아닌데. 아무튼 흥미진진하긴 할 것이다.

    “얼마 전 습격을 당했어.”

    “예?”

    “누가요?”

    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나.”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다들 호출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기자들은 그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와 다른 신문사들의 위치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쉽게? 기자들 체포하려는 수작이면 어쩌려고?

    아무튼 난 궁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기자들은 여전히 분개했다.

    “아니, 어떤 놈이 감히…….”

    “전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응.”

    나보단 기자들이 더 다친 것 같은데. 나야 누가 봐도 멀쩡했다.

    하지만 기자들의 걱정도 진심인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자기들이 왜 붕대 감고 있는지 잊어버린 건가?

    * * *

    로웰은 플랑베 부인을 설득해 신문사를 나왔다. 부인은 로웰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저곳은 믿을 만한 곳이 아니었군요.”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믿을 만한, 제대로 된 기사를 써 줄 사람들요.”

    “어디라도 그런 기사를 내주진 않을 텐데요…….”

    로웰이 무심코 말했으나, 그녀는 못 들은 척했다.

    로웰에겐 어색한 대접도 아니었다. 그는 딸 가진 부모들에게 백안시당하는 일에 익숙했다. 보수적인 귀부인들은 자신의 딸이 로웰 같은 부류와 어울리길 바라지 않았다.

    “계속 기사를 써 줄 사람을 찾아다니실 건가요?”

    “그래요. 한번 거절당했다고 포기할 순 없으니까요. 그보다, 전하께선 괜찮으신가요?”

    로웰은 부인이 왕자의 기사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한 소문이라면 아카데미 시절에 더 심각하지 않았나?

    “크래커 소공작이 해결할 것 같던데요.”

    “소공작이라면 믿을 수 있겠네요.”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난 못 믿겠다는 소린가? 로웰은 생각했지만,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진 않았다.

    “기자를 찾는 거라면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요. 부인께서 찾는 방식으로는 아무도 만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해요.”

    “내가 어떤 방법을 사용할 줄 알고요?”

    “하인을 풀어서 찾으시겠죠. 혹은 경비대에 돈을 주고 부탁하실 건가요? 그렇게 해서 찾아지겠어요?”

    부인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로웰을 쳐다봤다. 잘생긴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영특한 청년이 아닌가?

    “좋은 방법이 있나요?”

    “아는 기자가 있어요. 분명히 기사를 써 줄 겁니다.”

    “내게 소개해 줘요. 사례는 할게요.”

    로웰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서 미소가 사라지자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 전에 저를 설득하신다면요. 왜 그런 기사가 필요하죠? 전하께 누가 될 일엔 협력할 수 없어요.”

    플랑베 부인은 주먹을 쥐어 가슴을 눌렀다. 로웰 몽블랑을 믿어도 될까?

    로웰이 조프리 왕자를 모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로웰 개인을 믿지 않았다. 왕자는 왜 이런 자를 곁에 두는 걸까…….

    왕자를 모시고 왕국을 횡단했다는 말도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잠깐 자리를 비켜 줘요.”

    플랑베 부인은 기숙사장에게 말했다. 기숙사장은 당황한 듯 로웰을 돌아봤다.

    기숙사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로웰이 말하는 기자가 자신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로웰이 말한 기자는 그가 맞았다.

    그러나 로웰은 기숙사장을 돌아보지도 않았고, 기숙사장은 부인의 부탁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자 마차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사람들은 이번 일이 폐하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알고 있어요. 간신들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신 거라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폐하께선 처음부터 조프리 전하를 미워하셨어요. 그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왕비 전하를 모시는 우리는 알고 있었어요.”

    부인은 조용히 말했다.

    “조프리 전하께선 이곳에 계시면 안 돼요. 기사가 나오면, 난 전하를 알현할 거예요. 그리고 설득할 거예요. 셔벗에 가서 다신 돌아오시지 말라고. 폐하께선 언제고 전하를 해치고야 말 테니까.”

    로웰은 당황했다. 이게 전부인가?

    부인은 굉장한 결심을 하고 일을 벌이는 듯했으나 근거가 빈약했다.

    애초에 로웰은 왕이 죽었다고 반쯤 판단하고 있었다. 왕이 살아 있대도 누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죽은 사람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부인이 왕성에 머물지 않아 모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한 로웰은 부인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인의 결의 어린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왕과 왕비의 불화 정도로, 왕이 왕자를 죽일 거라고 믿긴 힘들 것이다.

    “무언가 알고 계시는 거죠? 그날에 대해.”

    부인의 눈이 커졌다.

    “왕자 전하께 그걸 전하러 수도로 오신 거예요. 그렇죠?”

    * * *

    파이 공작은 소화가 안 되는 사람처럼 불편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그레이는 그 옆에 서 있었는데 얼굴이 흙빛이었다. 누가 더 상태가 나쁜지 모르겠다.

    저 꼴로 ‘항복하면 좋다’고 주장한들 누가 믿을까?

    “얼굴 좀 펴.”

    “……네.”

    “잘해야 돼.”

    “강조하시지 않아도 알아요.”

    그레이가 말했다. 모르는 것 같은데.

    난 그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정말이야. 실수하면 안 돼. 우린 한 사람의 피도 보지 않으려고 이러는 거잖아.”

    그레이는 놀란 듯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스승님도요.”

    “예, 전하.”

    난 넓은 소파에 앉았다. 병자처럼 가운을 입고 힘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들을 들여보낼까요?”

    도트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준비가 된 것 같다. 잠시 뒤 복도에서 소음이 들렸다.

    꽤 많은 기자들이 왔다고 들었다. 얼마나 왔을까?

    기자들을 찾는 데 주어진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문이 열리고, 손에 펜과 수첩을 든 기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응접실 벽으로 붙었다. 꽤 많이 모였다. 난 그들 사이에서 얼마 전 궁에서 치료받은 기자들도 발견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말로 동료들의 행방을 넘겼던 모양이다.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들은 붕대를 목까지 감은 채로도 활짝 웃었다. 그 표정은 그레이의 시선이 향하는 순간 사라지긴 했다.

    그런데 들어오는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끝없이 들어가는 주머니 마술 같은 것처럼 한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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