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7화 (217/293)
  • 217.

    그레이는 로웰 몽블랑을 보고 한발 늦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왕자의 측근이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왕자는 이미 사태를 알고 있었고, 수습할 방편도 마련한 듯했다. 어쩌면 왕자가 직접 소문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왕자에겐 늘 계획이 있으니까…….

    그레이는 자신이 직접 해결해서 조프리 왕자에게 인사를 받을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않았다.

    ‘곤란한 일이 될 뻔했는데, 덕분에 해결했네. 고마워, 그레이.’

    왕자가 그렇게 말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로웰 몽블랑, 기자들을 처벌하러 왔나?”

    그렇게 물은 그레이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몽블랑 주변에는 플랑베 부인과 아카데미 남자 기숙사장밖에 없었다.

    저들이 왜 이곳에 있지? 조합부터 이상했지만, 무력을 담당할 인원이 없다는 점이 가장 이상했다. 저들로는 기자들을 제압할 수 없다.

    기자들을 상대하러 온 게 아니다. 조프리 왕자에 대한 기사를 알고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레이는 신문을 쥔 기숙사장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저들이 왜 왔지?

    “이곳이 맞아요.”

    이델라가 책상 위에서 오늘 자 신문을 집어 들더니 말했다.

    그레이는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건 몽블랑의 목적이 아니다.

    그가 명령했다.

    “당장 발행한 신문을 수거해. 어디에 신문을 납품하고 있지?”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기자들이 겁에 질려 물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왜 이러셨어요? 국법의 지엄함을 모르고, 조프리 전하의 이름에 먹칠을 할 기사를 내다니.”

    이델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고개 숙인 기자 중 한 명이 그녀를 알아봤다.

    “이델라 에클레어 양?”

    “조프리 전하의 연인?”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이델라의 목소리가 얼음장 같았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이자들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는 없겠죠. 몸이 고통을 느끼면 이 어리석은 자들도 글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겁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저희는 기사를 썼을 뿐입니다! 증인도 있고, 다 증거가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레이는 이델라가 분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장본인이 이곳에 있는데요. 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델라는 실망한 듯 말했다. 그녀는 기자들을 정말로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이젠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저도 모르겠네요…….”

    그녀는 연극을 하고 있었다. 기자들을 협박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폭력이 더 효율적이지 않은가?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 휘하들은 주인을 닮아 물러 터졌다고 생각했다.

    “붙잡아.”

    그레이가 머랭 경에게 명령했다. 그것만으로 기자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서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토해 냈다.

    그들이 신문을 판매하는 거점은 어디와 어디고, 또 기자들이 정보공유를 위해 모이는 곳은 어디이며, 이미 이 흥미진진한 기사를 모든 신문사에서 받아쓰고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레이는 진작 신문사와 기자들을 뿌리 뽑아야 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전부 회수해도 안 될 거라고요?”

    이델라가 물었다.

    “예. 원래 사람이란 게, 누가 숨기려고 하면 더 알고 싶고 그렇지 않습니까?”

    “일전에 조프리 전하께서 도피하셨을 때도 그랬듯이…….”

    기자들이 열심히 설명했다. 이델라는 이마를 짚고 벽에 기댔다. 어지러운 듯했다.

    그레이가 물었다.

    “기사 정정은?”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맞습니다. 세기의 연인이 ‘사실은 아니었다’ 같은 건 재미도 없고 흥미 끌기도 어렵고…….”

    “그래서, 수습할 수 없다고?”

    그레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런 큰 기사는 다른 사건으로 덮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리.”

    “예,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답니다. 왜, 에드워드 전하에 대한 불만 기사도, 조프리 전하가 깨어나셨다는 기사에 묻혔듯이요!”

    “기사를 열심히 쓴 건 저희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주시면 얼마나 좋을지…….”

    그레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변명을 더는 듣지 않았다.

    더 큰 사건?

    마침 좋은 게 있지 않은가. 귀족들을 갈아엎어 버리면 이따위 기사는 조용히 묻힐 것이다…….

    “체포해.”

    그레이가 턱짓하자, 머랭 경은 지체 없이 기자들을 무릎 꿇렸다.

    기자들이 아우성쳤다.

    “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여기 사람 잡는다!”

    “이들은 제가 처리할게요. 당신은 들어가 있어요.”

    그레이가 이델라에게 말했다. 그녀는 지친 듯했다.

    “하지만 기사는…….”

    “덮을 수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분간 눈에 띄는 일은 하지 마세요.”

    이델라는 바닥을 보더니,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기자들을 끌고 나갔다. 문을 통과하기 전, 그는 방을 돌아봤다. 로웰 몽블랑은 플랑베 부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그레이와 몽블랑의 눈이 마주쳤다.

    무능하긴.

    그레이는 혀를 찼다. 몽블랑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걸 보자, 내면의 불쾌감이 한결 나아졌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그레이는 귀족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 * *

    내가 찾을 필요도 없이, 기자들은 제 발로 찾아왔다.

    이걸 자기 발로 찾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누군가에게 업혀 오진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맞은 듯 엉망이었고, 몸은 건드리지 않아도 덜덜 떨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이마를 바닥에 대고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뭐지? 누가 보면 내가 때린 줄 알겠다.

    그들을 데려온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레이? 이 사람들 왜 이래?”

    “전하에 대한 거짓 기자를 실은 기자들이에요. 반항이 심해 약간의 제재가 필요했어요. 처벌은 전하의 판단에 따르려고요. ……기사는 이미 읽으셨죠?”

    그레이가 말했다.

    에드워드가 던져 준 신문이 시작이었다. 다음 날이 되자 모든 신문에서 같은 소식을 특종으로 다뤘다.

    왕자가 연애하는 게 재미있나? 아카데미에서도 느꼈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남의 연애를 정말 궁금해한다.

    연애 소식이야 며칠 시끄럽다가 잠잠해지겠지만, 이델라가 얽혀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델라의 평판에도, 앞으로 할 연애에도, 혼사에도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것도 문제인데…….

    에드워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신경 쓰여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얘 신경 쓰다가 귀족들을 못 잡으면 곤란한 거 아닌가?

    “일단 치료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난 도트에게 부탁해 의사를 불렀다. 그레이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못마땅한 것 같다.

    “왜?”

    “제 말씀 들으셨어요?”

    “응. 기사 읽었어. 여기 있는 기자들이 썼다는 거잖아.”

    “그런데 치료해 주신다고요?”

    난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이 기자들 네가 때렸어?”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그레이 팔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명령한 것 같긴 하지만.

    “무슨 일을 저질렀든, 사람을 저렇게 만들면 어떡해? 너무하잖아.”

    아무 말이나 하자 그레이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기자들은 겁을 먹어 움츠리고 있다가,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친 듯 눈이 붉어졌다.

    의사가 기자들을 데리고 옆방으로 갔다. 기자들은 내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난 의사에게 그들을 잘 대해 주라고 당부한 뒤 문을 닫았다.

    기자들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다. 내가 폭력의 배후가 되어서야 곤란했다.

    문을 잠그고, 밖이 조용해졌다는 걸 확인한 뒤, 난 그레이에게 물었다.

    “근데 진짜 왜 때렸어?”

    “아시잖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넌 아는 것도 물어봐?

    그레이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했다.

    그런데 그는 항상 그랬다.

    “전하는 왜 그러셨어요?”

    “뭘?”

    “귀족들을 봐주라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언제? 다 잡아서 협박할 거야.”

    “…….”

    “마침 잘됐다. 너도 협조해.”

    “…….”

    에드워드는 원한다면 경비병들에게 마음껏 명령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바란다면 전권이라도 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레이를 빼 가는 정도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이 공작 하나로는 그림이 안 살았다. 여러 명의 귀족이 내 옆에서 아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낫지 않을까.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그레이가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거부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죄책감이 남았나?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레이도 본성은 착했다.

    “기자들 취재에 응할 건데, 내 옆에서 간신배처럼 연기 좀 해 줘.”

    “예?”

    “아부도 하고, 전형적인 거 있잖아.”

    “예?”

    그레이가 최적의 인선일진 모르겠다. 왕자 앞에서도 표정 연기를 못하는데, 기자 앞에선 가능할까?

    하지만 상징적이긴 할 것이다. 재상의 아들이니까. 그런 의미에선 훌륭한 인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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