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6화 (216/293)

216.

기자들은 난처했다. 그들은 성 밖으로 취재를 나갈 계획이었다.

사람들은 점점 규모를 갖춰 가는 사신단에 큰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기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아닌가? 귀족들의 사병을 취재하면, 그들의 신문은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문에서 붙잡혔다. 이것저것 짐이 많으며 꽁꽁 싸매고 있는 게 수상하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분노했다. 칼보다 펜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경비병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으나, 이성으로 감정을 삭였다. 내키는 대로 했다가 영원히 어딘가에 갇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외에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있었다.

‘기자들을 왜 내보내지 않는가?’

갑자기 나선 남자는 귀족이었고 눈치가 없었다. 그는 역시 귀족들만 탈 법한 마차에서 내려 기자들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소란이 일자 경비병들은 기자들을 노려봤고, 기자들은 벌벌 떨었다.

이 사람 뭐야! 왜 나서서 우릴 곤란에 빠뜨리는 거야!

다행히 소란은 곧 막을 내렸다. 눈치 없는 귀족이 몽블랑의 도련님과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기자들은 소나기가 내리면 피해 가야 한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육을 좀 받았고 머리도 좀 잘 돌아가지만 그만한 대우를 못 받는’, 하여간 평민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소나기를 피해 간 듯했다.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른 안심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플랑베 부인이 물었다.

왜 그런 기사를 저희가 내야 하나요? 기자들은 되묻고 싶었다. 그들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필요하다면 다른 증인도 부를 수 있네. 그녀라면 틀림없이 뜻에 공감하고 동참해 줄 거야. 몹시 고귀한 가문의 부인이니만큼, 그대들도 더욱 신뢰가 가겠지. 취재 장소는 바꿔야겠지만…….”

플랑베 부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귀부인은 아지트에 발을 들일 때부터 먼지 쌓인 장식장 같은 곳을 소름 끼친다는 듯 힐끗거렸다.

기자들도 이 아지트가 자랑할 만한 장소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저렇게까지 볼 일인가?

물론 플랑베 부인의 시선보다 부인의 말이 더 곤란하긴 했다.

“부인,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말해 보게.”

부인이 품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아무 기사나 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의 말씀이 아무 말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사의 논조가 저희 신문과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논조?”

“예. 모든 신문은 논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인. 저희로 말씀드리자면 애국적인 기사를 내는 훌륭한 신문이라고 할 수 있죠.”

“논조라…….”

부인이 알아듣는 듯하자, 기자는 힘이 났다.

“그러니 다른 신문사를 알아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저희를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좀 바빠서…….”

기자는 몽블랑에게 간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떠나 줄 은인은 몽블랑밖에 없어 보였다.

몽블랑은 아까부터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는데, 기자들의 곤란에 공감하는 모양새였다.

그래. 누가 들어도 곤란한 일이었다.

이 시국에 어떻게 왕과 왕비의 불화설을 기사로 낼 수 있단 말인가? 셔벗에서 알면 큰일 날 일이다!

물론 기사로서는 엄청나게 흥미진진한 사건이었지만. 그래서 끊지도 못하고 경청했지만!

……셔벗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슬그머니 기사로 내 볼까?

기자는 동료를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동료가 그것참 괜찮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눈치 없는 귀족이 기자의 손을 잡았다.

“그대 참 훌륭한 기자로군. ‘애국이 논조’라니 감동적인 이야기야.”

“그러믄요.”

이 사람은 또 뭐야?

기자는 당황했으나 웃으며 응대했다. 이 귀족이 성문 앞에선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들을 돕는 듯했다.

눈치 없는 귀족이 오늘자 신문을 찾아들었다.

“그대들이 낸 신문이라면 틀림없이 훌륭하겠지. 어디, 오늘 자 첫 면이……. 조프리 전하의 숨겨진 애인?”

“…….”

플랑베 부인이 기자를 노려봤다. 몽블랑의 도련님이 이마를 짚은 손을 내렸다.

눈치 없던 귀족의 얼굴에서 미소가 빠져나갔다.

기자들은 변명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등골을 타고 땀이 흘렀다.

이 귀족들은 하는 행동은 어설퍼 보여도, 얼마든지 기자들을 괴롭힐 수 있는 신분이었다.

그때 쾅쾅 문이 울리더니 누군가 문을 부수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도망칠 기회일까? 기자들은 희망에 차서 문이 넘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먼지를 헤치고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경멸을 담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

몽블랑의 도련님이 외쳤다. 크래커 소공작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기자들은 뭐가 뭔지는 몰라도 큰일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계획을 세우고 머릿속에서 한번 돌려 봤다. 괜찮은 것 같은데.

귀족들만큼 자기 보신에 능한 사람들도 드물다. 그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누가 피 볼 일도 없고 문제가 생길 일도 없다.

좋아. 이렇게 하자.

하지만 계획대로 진행했을 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용병들한테 비밀 통로를 공개해도 되나?

왕자궁, 그것도 가장 안쪽 서재로 바로 통하는 비밀 통로다.

원래 이런 정보를 남한테 밝히면, 훗날 반란 세력에 이용되는 게 법칙 아닌가?

난 몇 년 뒤 궁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밀 통로에 왕궁 병사들을 들여보내기도 뭐했다.

왕궁 병사들은 내게 충성하지 않는다. 그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왕이다.

물론 돈을 더 주는 사람에게 따로 충성을 다하는 병사들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렇다.

왕비님이 돈을 준 병사들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

문제는 그들이 누군지 내가 모른다는 거였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찾아도 믿기 힘들다는 거고.

‘조프리 왕자가 내게 돈을 줬지만, 벌써 몇 년 전 일이지. 하하. 하지만 지금 반란군에게 정보를 팔면 거금을 벌 수 있잖아?’

가능성 있는 일이다.

이렇게 사람을 믿는 게 힘들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그는 안락의자를 들었다 내려놨다 하며 근력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의자가 위아래로 휙휙 움직일 때마다 이는 바람이 내게 불어왔다.

17대 1…….

난 활짝 열린 비밀 통로와 알렉스를 번갈아 봤다.

아니야, 그래도 알렉스 혼자는 무리겠지.

“…….”

정말 무리일까?

혼자서 귀족 열 명쯤은 반으로 접을 수 있지 않나? 귀족들이 호위를 데려올지도 모르지만. 그래 봤자 서재에 스무 명씩이나 들여보낼 것도 아닌데.

상대할 수 있지 않나?

“알렉, 숨어 있는 거 잘해?”

“숨바꼭질 같은 거 말씀이십니까?”

비슷한가? 그것보다 음침하긴 하지만.

“응.”

“해 본 경험은 없지만,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알렉스가 안락의자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어렸을 때 안 해 봤어?”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부끄러운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알렉스가 어렸을 때 뭐 하느라 바빴는지 나도 알고 있었다.

사실 난 알렉스한테 일을 시킬 게 아니라 좀 쉬게 해 줘야 하지 않나?

“어떻게 하는지 나중에 알려 줄게.”

죄책감을 느끼며 말하자, 알렉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숨바꼭질 좋아하십니까?”

“그건 아닌데.”

“그럼 괜찮습니다.”

아니, 내 마음이 안 괜찮은데…….

“전하, 편히 명해 주십시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일단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고 생각하자.

“비밀 통로에 대기시킬 무장 병력이 필요해.”

“용병이나 병사들은 안 되는 겁니까?”

“응.”

“수는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곤란해.”

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닌데, 알렉스는 잠깐 고민하더니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움쿠헨의 하인들로는 안 되겠습니까?”

“하인들을 무장시키라고?”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그게 됐으면 궁인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예. 각기 병사 한 명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는 전사들입니다.”

아, 진짜?

하인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쨌든 백작의 수도 저택에 사람을 보냈다. 하인들을 빌릴 수 있겠냐고 묻자, 언제든 불러 주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계획의 반은 준비됐다.

이제 기자들만 부르면 된다.

밖에서 시종이 방문자를 알렸다. 에드워드가 심부름꾼을 보냈다는 듯했다.

할 말이 남았나?

의아해하면서 문을 열어 줬는데, 하인은 예상 못 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신문?

“에드워드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저쪽의 신사분이 보내셨습니다.’ 같은 어조로 말해 봤자 내용물이 신문이었다. 신문 위에는 리본으로 묶인 편지도 놓여 있었다.

에드워드의 순순한 태도와, 눈을 마주치지 않던 태도와, 아무튼 찜찜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내가 가만히 있자 하인도 신문을 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난 신문을 펼치고 첫 면 기사를 읽었다.

-왕자의 숨겨진 연인…….

이게 뭐야!

신문을 던져 놓고 편지를 펼치자, 에드워드의 필체로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이것도 네 계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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