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5화 (215/293)
  • 215.

    플랑베 백작 부인은 왕비의 죽음을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병사들이 감히 그녀의 저택을 침범해 조프리 왕자의 행방을 물을 정도였다.

    왕비의 죽음을 인정한 뒤에도 그녀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째서 그렇게 되었지?

    그녀는 본래 사교계에서 힘 있는 부인이 아니었다. 왕비를 모시면서 힘을 얻게 되었을 뿐이다.

    왕비가 막 비스코티에 도착했을 때, 사교계에서는 왕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왕과 로제 부인의 사랑은 사교계를 휩쓴 소문 중 하나였다. 몹시 유명하고 신빙성 있는 소문이었으며, 왕이 로제 부인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왕비로 세울지도 모른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사교계를 넘어 백성들도 아는 이야기였고, 어떤 부인들은 그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귀족 사회에서 계산 없는 사랑은 그만큼 드물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셔벗의 공주가 찾아왔고 왕과 결혼했다. 그때 로제 부인이 임신 중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순간에 귀족 사회와 유리되었고, 그런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기란 힘든 일이었다.

    연회장에서, 왕비는 혼자 있었다.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했으나 그뿐이었다. 무리가 형성되지 않았다.

    외국인 왕비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로제 부인에 대한 동정 때문에 연회장의 기류는 딱딱했다.

    왕비는 왕의 옆자리에 앉은 채 연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왕은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었으나 왕비는 자세조차 흩트리지 않았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플랑베 부인과도 눈이 두어 번 마주쳤다. 플랑베 부인은 그녀에게 감탄했다.

    부인은 늦은 나이에 사교계로 들어온 편이었다. 그녀는 플랑베 백작의 후처가 되었지만 사교계가 두려웠고 잘 적응하지도 못했다. 남편은 모임이라도 만들어 보라고 했으나, 그녀가 초대한다고 부인들이 와 주겠는가?

    플랑베 부인이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기회는 이번뿐이었다. 왕비는 강한 사람이었다. 로제 부인은 다시 사교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사교계의 주인 자리는 당연히 저 어린 왕비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

    ‘지루하신가요, 왕비님?’

    플랑베 부인은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치마를 부여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왕비는 그것을 보았을 텐데도 상냥하게 말했다.

    ‘조금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러 오셨나요?’

    ‘왕비님께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을지 모르겠어요.’

    ‘다정하신 분. 무슨 얘기든 좋아요. 정말로 지루했던 참이거든요.’

    플랑베 부인은 왕비에게 비스코티의 사교계에서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제 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어떤 이야기가 왕비의 흥미를 끌지 알 수 없었으나, 왕비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왕비가 그걸 빨리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나는 악당이군요.’

    모든 이야기를 들은 왕비는 웃음기 없이 말했다.

    ‘이상하네요. 난 이 나라를 도우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왕비의 얼굴이 창백했다. 플랑베 부인은 연회가 있는 저녁마다 그런 얼굴을 거울 속에서 본 적 있었다.

    그때 플랑베 부인이 말하지 않았다면 왕과 왕비의 관계는 달라졌을까?

    플랑베 부인은 알 수 없었다. 왕비를 모시면서, 플랑베 부인은 몇 번 왕이 함께하는 티타임에 참석한 적 있었다.

    어린 부부는 서로를 어색해하면서도 대화할 거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부인은 그녀의 결혼 초기를 떠올렸다. 백작은 한참 어린 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무언가 선물을 안고 왔다.

    왕과 로제 부인의 경우는 유별나긴 했으나, 결혼 전 과거가 없는 귀족이 어디 있겠는가? 플랑베 백작 부인은 왕 부부가 화목한 가정을 이루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화목할 필요도 없었다.

    왕은 왕비를 존중해야만 했고, 왕비도 마찬가지였다.

    귀족의 결혼은 조력자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결혼까지 맺은 이상, 어지간한 일로 동맹은 깨지지 않는다.

    왕의 시종이 들어와 왕에게 무슨 말을 속삭였다.

    왕은 몹시 놀란 듯했다. 그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표정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를 즐기고 있어요. 급한 일이 생겼다는군요. 집무를 보러 가 봐야겠어요.’

    ‘예, 폐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왕비는 다정하게 왕을 보냈다.

    그러나 왕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그녀는 그가 떠난 통로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왕비님?’

    플랑베 부인이 불렀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거야. 나는 알아.’

    왕비가 말했다.

    ‘내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핏기가 사라져서 석고같이 변한 얼굴로 플랑베 부인을 돌아봤다. 설마, 말도 안 된다고 웃으려던 부인은 그 표정을 보고 얼어붙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왕비님.’

    부인은 저도 모르게 왕비의 손을 잡았다.

    ‘왕자님이 태어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예요.’

    ‘왕자가 태어나면?’

    어린 왕비가 겁에 질린 듯 되풀이했다.

    ‘예. 왕자님이 태어나시면요.’

    왕비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마치 매달리는 듯했다.

    ‘내 왕자님이 나를 지켜 줄 거야.’

    그리고 조프리 왕자가 태어났다.

    플랑베 부인은 아주 오랜 시간 왕비의 시녀였다. 그 말은 그녀가 왕비의 편이라는 뜻이었다.

    그녀가 아는 왕비는, 조프리 왕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러듯이.

    그러나 왕비는 죽었다. 플랑베 부인은 왕비가 무엇을 원할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

    부인은 조프리 왕자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틀림없이 왕비도 그녀가 그렇게 해 주길 원할 것이다.

    * * *

    “왜 내가 후계자 분쟁에 말려드는데?”

    “셔벗 왕이 원하니까.”

    에드워드가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셔벗 후계자 분쟁이니까.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왜 원하는데? 갑자기, 나를?

    나 셔벗 왕 한 번도 만난 적 없는데.

    “그래도 가고 싶어? 가면, 살아남을 자신은 있어?”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있을 리 없다.

    스케일이 커지는데. 내가 상상하던 일은 아니었다. 셔벗 왕만 만나고 오면 끝날 줄 알았는데.

    정리해 보자. 에드워드는 이미 내가 셔벗에 가면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날 막았다.

    근데 파이 공작은 후계자니 뭐니 하는 말 안 하던데. 그걸로 날 유혹하면 더 쉽지 않았을까? 사신단으로 셔벗에 가서 아예 거기 왕이 될 수 있다고 꼬시면 되잖아.

    파이 공작은 몰랐나?

    “넌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어? 사신한테 들었어?”

    “생각해 보면 알 만하잖아.”

    에드워드는 조용히 대답했다.

    “귀족들은 모르던데?”

    나도 몰랐지만.

    “다들 아무 생각도 없나 보지.”

    에드워드는 파이 공작을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낮춰 버리더니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대로 될 것 같아? 열흘 안에 마무리되겠어?”

    열흘 뒤엔 장례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에드워드의 말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정치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몰라, 라고 대답할 순 없어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내 말을 납득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게 동조해 주고는 있었다.

    그래도 성공할 일에 협력하고 있다는 느낌은 줘야겠지.

    “그래? 잘 안 될 텐데.”

    에드워드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왜 물어봤냐?

    “계획대로 해 봐. 피를 흘리지 않고, 네가 생각한 대로. 대신, 실패하면 네겐 널 책임질 자격이 없는 거야.”

    난 먹던 것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뭐?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역시 경고였나?

    “……내가 계획대로 해내면?”

    “네게 필요 없는 건 나인 거지.”

    뭐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겠다.

    남의 입맛은 싹 달아나게 해 놓고 에드워드는 자기 접시의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잘 배운 식사 예절로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가 물었다.

    “안 때려도 되겠어?”

    그게 자길 안 때려도 되겠냐는 의미라는 건 그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다.

    * * *

    에드워드 때문에 머리만 복잡해졌다.

    열흘 안에 귀족들을 정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대충 해결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다.

    “도트. 알고 지내는 기자 있어?”

    “죄송해요, 왕자님. 기자들은 왕성에 출입하지 않아서, 따로 만나 본 적이 없어요.”

    도트가 부끄러워했다. 알렉스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가 아는 기자가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아는 기자는 몇 명 있었지만, 그 사람들은 아카데미 도시에 있었다. 지금은 수도 기자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에 만난 기자라면 로웰이 데려왔는데.

    로웰은 어디 있지?

    기자들을 이용해 미끼부터 던져야 했다. 소문이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숨어 다니는 귀족들이라면 소문에 더욱 늦을 것이다.

    항복만 하면 책임 없이 놓아준다니, 듣기만 하면 귀족들이 넘어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열흘의 시간제한이 생기고 말았다. 에드워드를 붙잡고 따지지 않았으니, 나도 동의한 모양새가 됐다.

    계속 찜찜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용병을 풀어 기자들을 데려올까요?”

    알렉스가 물었다.

    “응. 그것도 좋은데…….”

    뭐가 이렇게 찜찜하지. 그걸로 다 잡을 수 있을까?

    피를 보지 않고, 열흘 안에.

    “그러고 보니 왕자님. 비밀 통로 말인데요, 안이 생각보다 긴 것 같아요. 혼자 청소하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도트가 말했다.

    “얼마나?”

    “열심히 청소해서 일주일 안에 반짝이게 만들어 놓을게요! 왕자님이 지나가실 때 먼지 하나 묻지 않게요!”

    비밀 통로를 대리석처럼 만들 필요가 있나?

    그리고 난 청소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은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돼. 통로가 얼마나 긴데?”

    “비상계단까지 이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게 얼만데?

    “제 느낌상으로는, 궁의 반을 횡단하는 느낌이었어요.”

    “오…….”

    쓸 만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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