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4화 (214/293)
  • 214.

    “어떻게 생각해?”

    난 소파에 기대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는 도트에게 배운 대로 차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라는 게 원래 저렇게 찻잎이 찻잔에 떨어지는 거던가?

    “왕비 전하의 시녀들을 수색할까요?”

    “그거 말고.”

    “왕이 되십니까?”

    그가 티 포트를 내려놓고 물었다.

    “제가 전하를 폐하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까?”

    왜인지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고 싶어?”

    “예. 제 꿈이었습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언제부터? 난 저런 얘길 들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왕위에 관심이 없다느니 얘기할 때도 저런 말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보통 꿈에선 자기가 뭐가 되지 않나? 왜 네 꿈인데 내가 왕이 돼?

    하기야 기사라면 누구나 훌륭한 주인을 모시고 싶겠지만.

    “그것도 말고.”

    “셔벗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셨습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귀족군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해 봤는데 답이 없었다. 반란 일으킨 귀족들에게 다시 돌려줄 순 없고, 에드워드가 묶어 두는 게 최선이다.

    그리고 그 병사들이 비스코티에 위협이 되지 않으려면, 역시 셔벗과는 해결을 봐야 한다.

    “셔벗에 가는 게 나한테도 좋아.”

    “정말 그렇습니까?”

    이상한 질문인데.

    “응. 에드워드랑 떨어지잖아.”

    오히려 에드워드와 싸우다 생각 정리가 됐다. 볼모든 뭐든 셔벗은 나를 함부로 할 수 없고, 전쟁이 난대도 마찬가지다. 위험도로 따지자면 두 나라 다 내겐 비슷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편한 쪽이 낫다. 셔벗에 가야겠다. 일단 거길 가면 나 때문에 전쟁 난다는 생각은 안 할 수 있잖아.

    마음을 정하고 나니, 이번엔 다른 게 걱정됐다.

    신문을 보면 온 나라 백성들이 사신단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셔벗 왕을 설득하고 돌아올 거라고.

    기대 충족 못 할 것 같은데.

    미간을 누르고 있으려니 갑자기 알렉스가 일어났다.

    “역시 비밀 통로를 찾아보겠습니다.”

    “응?”

    그가 응접실 벽을 두드렸다. 뭐 하는 거지?

    “예전에 스승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된 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요.”

    그게 왜?

    “바움쿠헨 성에도 있어?”

    “예. 하인들이 바쁜 심부름을 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밀 통로라며?

    “틀림없이 왕궁에도 있을 겁니다.”

    “아니, 있어도 응접실엔 없을걸.”

    “그럼 어디 있습니까?”

    나도 비밀 통로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다. 그래도 응접실에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보통 침실이나 서재에 있지 않나?

    “서재 책장을 옆으로 치워 보면 문이 나온다거나…….”

    알렉스는 곧이곧대로 듣고 서재로 넘어갔다. 책상 옆의 육중한 책장을 밀치자 검은 문이 드러났다.

    “…….”

    아, 진짜로?

    * * *

    에드워드는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일단의 무리를 보냈다. 궁을 지키던 용병들과 궁인들은 경계했으나, 인원 구성을 보고 안심했다. 도트가 내게 보고했다.

    “요리사와 주방에서 일하는 궁인들이에요. 병사들은 없더라고요.”

    에드워드의 궁인이 내게 물었다.

    “요리사들을 주방에서 일하게 해도 되겠습니까, 전하? 폐하의 식탁을 담당하던 최고의 요리사들입니다.”

    난 허락했다. 요리사들은 내 궁 주방에 배치되어 일을 돕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에드워드가 궁으로 찾아왔다. 그가 도착하자 궁은 다시 약간의 경계 태세가 되었다.

    밖을 정찰하고 온 도트가 내게 달려왔다.

    “병사들은 없어요! 시중들 하인들만 데려오신 것 같아요!”

    그는 안심이라는 듯 말했다. 안심할 일인가? 왕의 대리인인 에드워드는 이 성의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 사람이 호위도 없이 다니는데?

    단출한 에드워드와 달리 나는 긴 행렬을 끌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마주 앉자, 에드워드의 표정부터 보였다. 그는 무표정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그의 뒤에 선 하인은 무슨 상자 같은 걸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포장되지 않은 상자가 맞았다.

    포장된 상자가 등장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포장되지 않은 상자도 불길하긴 마찬가지였다.

    “선물이야.”

    에드워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얘가 선물을 그만했으면 했다.

    “뭔데?”

    하인이 식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자 깊지 않은 상자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수갑이 들어 있었다.

    어?

    “나보고 차라고?”

    맞을 만한 얘기를 하러 온다더니, 내 손 묶어 놓고 하려고?

    얜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어이가 없어서 묻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보기 좋을 것 같긴 한데, 너 말고. 나한테 사용하고 싶어지면 말해.”

    나 남을 묶어 놓는 취미 없는데…….

    하인이 상자를 내게 가져왔다. 난 가까운 의자에 놓고 뚜껑은 다시 덮었다.

    에드워드는 내가 사용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용병들이 식당의 모든 통로를 점거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기세여서, 난 일단 요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트레이를 끌고 온 도트가 음식을 내려놓았다. 고기를 통째로 삶은 듯한 요리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는데, 시종들이 뼈와 살점을 해체하기 전에 에드워드가 일어나서 작업을 시작했다. 꽤 잘했다…….

    그러더니 살코기를 가져가서 자기 먼저 한 입 먹었다.

    “…….”

    뭐지?

    그는 음료도 따더니 자기 잔에 따랐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

    왜 너만 먹어?

    그가 자기 접시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하인이 내 빈 접시와 에드워드의 접시를 바꿔치기했다.

    에드워드가 마시던 잔도 내 것과 바꿔 갔다.

    뭔데?

    “독은 없어. 안심하고 먹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왜 네가 기미를 하는데? 독이 들어 있을 거라고 의심한 적도 없었다.

    일단 난 한 입 먹었다. 겉을 훈제한 고기는 물론 맛있었다. 에드워드는 턱을 괴고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셔벗에 가고 싶어?”

    그가 물었다.

    왜 자꾸 저런 걸 묻는 걸까? 누가 들으면 내 평생소원이 외국 생활인 줄 알겠다.

    “나 떠나면 영영 못 돌아와? 왜 그렇게 보면서 물어…….”

    불안해지게. 그러라고 저러는 걸까?

    “글쎄. 못 돌아올 텐데.”

    “…….”

    경고야?

    나 떠나면 국경 폐쇄하게?

    에드워드는 식사엔 입도 대지 않고 말했다.

    “셔벗 왕이 후계자를 찾고 있어. 네가 그곳에 가면 후계자 분쟁에 휘말릴 거야.”

    “뭐?”

    “그래도 가고 싶어?”

    * * *

    그레이와 머랭 경은 원하던 정보를 얻고 밖으로 나갔다. 에클레어 남작은 공포로 인해 실신했다. 그레이는 남작을 방에 가둔 채 떠나려고 했으나, 이델라는 남작을 묶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간을 주면 문제를 만드는 분이거든요.”

    머랭 경은 남작을 이불로 말고 끈으로 묶었다. 방문을 잠그고 여관 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자, 주인은 또 오시라며 따스하게 인사했다.

    그레이는 이델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그녀를 봤을 때부터 그랬는데, 비단 조프리 왕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프리 왕자가 그녀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었고, 이후로도 그녀와 왕자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싫어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레이는 그녀가 엄청난 미인도 아니고 특출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가 곁에 둔 두 사람은 이해 가는 면이 있었다. 영웅의 후계자인 뛰어난 기사와 거대 상단의 능력 있는 아들. 그러나 이델라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론 조프리가 어떤 사람을 곁에 두든 그레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델라를 돌아봤다. 그녀는 굳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인상 자체가 선해서 왕자를 위해 아버지를 희생시킨 비정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왕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인 듯했다.

    “사실은 뭡니까? 기사가 완전히 소설을 쓴 건 아닐 텐데요.”

    “소공작 같은 분이 그런 소릴 할 정도니, 이 헛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겠네요.”

    이델라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축했다.

    그레이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전하께서 당신을 특별 취급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

    “전하께서 당신에게 잘해 주신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물론 전하께서는 제게 잘해 주세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델라는 그레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제가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소공작께 대답할 의무는 없을 텐데요. 그건 전하의 생각이세요. 제가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잖아요.”

    “…….”

    그레이는 이델라를 새삼스레 쳐다봤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에클레어 남작이 털어놓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신문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집 같았다.

    이곳이 맞나?

    그레이와 이델라는 동시에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는 망설임 없이 지시했다.

    “부숴.”

    머랭 경은 달리는 힘으로 문에 부딪쳤다. 몇 번 반복하자 나무 문이 흔들리다가 떨어졌다.

    “꺅!”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레이는 먼지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되었든 그에겐 공평하게 모두 잡아들여야 할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로웰 몽블랑?”

    그레이는 인상을 썼다.

    로웰 몽블랑은 누군가를 보호하듯 가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웬 귀부인이 나타났다. 그레이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플랑베 백작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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