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10화 (210/293)
  • 210.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뭐라는 거야?

    “아니. 네 방식은 잘못됐다는 거야!”

    “네 자리를 만들어 주려고 했어.”

    “다 만들어 줄 테니 가만있으라고?”

    내 자리인데?

    남이 만들어 준 자리는 이제 됐다. 조프리가 가진 자리는 왕비님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왕비님의 보호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고 그 자리는 허물어졌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과분한 기회를 받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피하고 망쳐서는 안 된다.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게 뭐가 나빠? 네가 뭘 할 수 있어? 귀족들에게 휘둘리다 셔벗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네가 뭘 어쩔 수 있어서?”

    에드워드가 일어났다. 한순간에 위치가 역전돼서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상관없었다. 겁나지도 않았다. 에드워드는 화난 게 아니다. 내가 엄청나게 약해서, 미친 방법으로 지켜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다!

    “내가 못 이겨 낼 것 같아? 그렇게 약해 보여?”

    “그래.”

    “…….”

    이 자식이…….

    “지금도 봐. 네가 뭘 할 수 있어? 귀족들이 어떻다느니 헛소리는 말고. 그자들을 막을 수 있어? 어떻게 다룰 수라도 있어? 내 도움 없이 어떻게 수습하게? 말해 봐.”

    그가 빈정거리며 내 턱을 들어 올렸다. 서로의 멱살과 얼굴을 잡고 노려보고 있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터질 것 같았다. 가장 열 받는 건 저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귀족들과 협상하는 건 에드워드가 되어야 한다. 그가 군권을 쥐고 있고 그가 왕의 대리인이다. 셔벗의 사신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에드워드는 왕이 아니지만, 궁인들은 쓰러졌다는 왕보다 에드워드의 말에 더 벌벌 떨고 있다.

    “봐.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넌 내가 필요해. 이제 나쁜 말 그만해. 마음이 아파.”

    그의 손이 내 입을 막았다. 꾹 막은 것도 아니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내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쁜 말은, 네가 하는 게 나쁜 말이고…….

    하는 짓도 못된 짓만 골라서 하면서…….

    “귀족들은 어디 있어?”

    그가 몇 번인지 모를 질문을 반복했다.

    난 그가 날 지키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내 의사를 무시한 채 강압적인 보호자나 혹은 소유권자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리해 줄게.”

    하지만 그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볼을 만지는 손이 떨렸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밖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우리는 말을 멈추고 중앙문을 쳐다봤다.

    “비켜라.”

    익숙한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낮고 침착해서 교단에서 들으면 좋을 듯한, 그러나 지금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였다.

    “조프리 전하께서 안에 계시나? 늦게나마 파이 공작이 죄를 청한다고 고해라.”

    * * *

    파이 공작은 신호를 받고 안가에 숨었다. 그는 이미 조프리 왕자의 전령을 만났다. 전령은 왕자의 전갈을 전했다.

    -에드워드는 이미 계획을 알고 있으며, 대비하고 있음.

    파이 공작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왕성을 포위하는 계획은 취소다. 그들은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갈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증거 없이 에드워드 왕자가 귀족들을 핍박할 순 없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에드워드 왕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는 재상을 끌어내린 사람이었다.

    에드워드가 어떻게 계획을 알았을 것인가? 배신자가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보복할 것이다…….

    파이 공작은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 어름이 뻐근했다. 극심한 공포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나이 들었고,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프리 왕자의 전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부름에 응하지 말 것. 소집당하면, 몸을 피할 것. 공작의 문제의식에 공감함. 에드워드와는 대신 내가 대화해 보겠음.

    공작은 짧은 전갈을 뒤집어서 봤다. 뒷면은 백지였다.

    방금 읽은 내용이 전부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다시 보면 말투도 이상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조프리 왕자는 어린 시절 그의 수업을 들을 때부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써 내는 버릇이 있었다.

    ‘전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가?’

    공작은 전령에게 물었다. 큰 기대 없는 질문이었다.

    ‘전하께선 내전으로 이 나라의 백성들이 다시 공포에 떨지 않길 바라십니다.’

    전령으로 온 로웰 몽블랑이 말했다.

    공작은 가슴에 돌이 떨어진 듯했다.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는 정해진 참상을 두고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왕자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공작도 알고 있었다.

    왕자의 말대로 에드워드는 공작을 소집했다. 예정된 날보다 이른 소집이었다. 파이 공작은 이게 조프리 왕자가 말한 ‘에드워드의 부름’임을 알았다.

    공작은 안가로 몸을 피했다. 성문의 검문이 강화되고 경비병의 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그를 따라온 하인이 알렸다.

    “각하, 저희는 괜찮겠지요?”

    공작을 오래 모셔 온 하인이 물었다. 하인은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으나, 공작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알았다. 안가로 몸을 피하다니 상상도 못 해 본 일이 아닌가.

    공작은 아늑한 의자에 깊이 몸을 묻은 채 조프리 왕자의 전갈을 다시 읽고 있었다. 내용은 외우고 있으니 사실 읽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와 그의 가문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가슴이 짓눌린 듯 무거웠다. 이유를 모른 채 그는 앉아 있었다.

    일단은 에드워드의 보복을 피해 왕성을 빠져나가 영지로 몸을 피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리고…….

    불안감과 초조함을 뚫고 다른 생각이 머리를 침범했다.

    왕자는 에드워드를 만나고 있을 것인가?

    “각하?”

    하인이 불렀다. 파이 공작은 하인을 쳐다봤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관대한 주인이어서, 하인들은 그에게 감히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하인이 무엇을 물었던가. 그들이 괜찮으냐고?

    괜찮지 않다.

    그는 조프리 왕자에게 폭군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결의에 대의가 있다고 설득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믿었다. 비스코티를 살리기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그 현명한 선택의 결과로 적국에 가야 하는 사람은 조프리 왕자였다.

    왕자는 어떤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인가?

    그럼에도 그는 공작의 말에 옳은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에드워드를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비스코티를 위해.

    공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부끄러웠다. 그 폭군과 조프리 왕자가 독대하게 두고 일을 저지른 자신은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몸서리가 쳐져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출을 준비하게.”

    “나가시렵니까?”

    공작은 대답 없이 외투를 찾았다. 설령 그가 희생하게 되더라도 조프리 왕자에게 갈 생각이었다.

    * * *

    에드워드는 몸 어딘가가 뜨겁다고 느꼈다. 그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조프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프리가 좋아할 만한 계획은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싫어하고 방해하면 곤란하니까 모르게 뒀다.

    그러나 공작은 어떻게든 조프리를 설득해 냈고 에드워드는 곤란해졌다.

    그는 마음을 바꿔 조프리를 설득하기로 했다. 그에겐 명분이 있었다. 조프리를 그를 이해해야 한다.

    조프리가 원한다면 에드워드는 무엇이든 가져다줄 테니까.

    “네가 원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조프리의 냉담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피부는 식고 심장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설득되어야 한다. 에드워드가 잘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귀족들을 몰아붙이고 출전을 자처하는 건 희생적인 행동이다.

    조프리가 알고 감동할 필요는 없어도 그에게 화를 내선 안 된다.

    그를 밀어내선 안 된다.

    자신을 팔아넘긴 귀족들에겐 이용당해 주면서, 에드워드에게 화를 내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아니. 그건 네가 원하는 거야.”

    조프리가 부정했다. 에드워드는 피가 식었다.

    “내가 못 이겨 낼 것 같아? 그렇게 약해 보여?”

    “그래.”

    조프리는 모르고 있다. 그에겐 에드워드가 필요했다. 적어도 지금은 절대로 에드워드를 놓을 수 없다.

    “네가 뭘 할 수 있어? 귀족들이 어떻다느니 헛소리는 말고. 그자들을 막을 수 있어? 어떻게 다룰 수라도 있어? 내 도움 없이 어떻게 수습하게? 말해 봐.”

    조프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에드워드의 도움 없이 조프리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그가 지키고자 하는 그 무엇도, 에드워드가 없으면…….

    에드워드가 스스로를 위해 움직인다고?

    그런 적도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은 아니다.

    에드워드는 더 이상 두려운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입을 막기 위해 아무 말이나 했다. 조프리의 무서운 표정이 조금씩 변하고, 그는 곤란한 듯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방문을 알렸다. 에드워드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방문자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의아해졌다.

    공작이 왜 제 발로 이곳을 찾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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