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9화 (209/293)
  • 209.

    내 문제를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한 마디 들었다고 준비한 일을 그만둘 순 없다.

    말로 해서 협박처럼 안 보이는 걸까?

    분위기 조성용으로 몽블랑 상단에서 고용한 용병들을 불러 두긴 했다. 원래 상단을 지키고 화물 운송을 호위하던 용병들이라는데 싸움 실력은 모른다. 인상은 위협적이다.

    제대로 왕성으로 오고 있나?

    “파이 공작인가?”

    에드워드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공작이군.”

    그가 확신했다. 되는 일이 없다.

    “거기까지도 감시했어?”

    “아니. 이건 짐작이고.”

    “감시도 하고 있잖아.”

    “네게 붙인 병사? 그건 걱정이고…….”

    난 어이가 없어서 그를 쳐다봤다. 걱정해서 병사를 붙였다고? 두 번 걱정했다간 걸음마다 보고받겠다.

    그 비슷한 짓을 했던 분이 떠올랐는데, 변명도 비슷했다. 왕비님도 조프리를 걱정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조프리를 위해 모든 일을 했다고.

    난 잘 모르겠다.

    “그래. 원래 다른 사람을 걱정하면 속이고 감시하기도 하는 거지. 정말 걱정하는 사람 같네. 내가 파이 공작에게 뭘 들었는지 안 궁금해?”

    “생각해 봤어. 설령 공작이 왕비의 재판을 털어놓았대도, 네가 귀족들을 편들 리 없어.”

    에드워드가 단정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얼마 전까지 네가 뭘 경계했는지 잊은 것 같은데…….”

    그가 말을 끊었다.

    “내가 귀족들을 두고 출전한다면, 그자들은 왕성에 남아 있는 널 제멋대로 다루려 했겠지. 하지만 넌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거야. 마음은 물러 터졌어도 남에게 휘둘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욕하는 건가?

    “그때 반란이 일어난다면? 나도 누구도 없이, 너 혼자 그자들을 막아야 한다면?”

    에드워드는 대전을 둘러봤다. 마치 단 아래 귀족들이 가득 서 있는 것처럼.

    “네 생각이 맞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데? 묻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귀족들이 겁먹고 행동하게 내가 부추겼어.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 조프리.”

    “…….”

    “그들이 일을 저지른 뒤 내가 사후 대처한다면? 왕성은 포위되고 병사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가고, 백성들은 공포에 질린 뒤에 그 반역자들의 목을 성벽에 내걸면. 네가 만족했을까?”

    “…….”

    “화내지 마. 난 더 큰 희생을 막으려는 거야.”

    “왜 나한테 먼저 말 안 했는데?”

    화내지 말라는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화가 안 나던 사람도 듣는 순간 화가 난다는 게 그거다.

    “넌 방해할 테니까.”

    에드워드는 내 화를 돋우기로 작정한 것 같다.

    “내가 셔벗에 가겠다고 할까 봐?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위험하잖아.”

    그는 당연한 듯 말했다.

    “누가? 내가? 외국의 왕족에게 함부로 손대는 법은 없어.”

    “전쟁이 나면?”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셔벗에 있는 내가 가장 안전하겠지. 셔벗에서 비스코티를 침공한다면, 그 명분은 내게 정당한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서가 될 테니까!”

    “왕관이 탐나?”

    “그렇다면.”

    “그럼 외국까지 갈 것도 없지. 귀족들을 어디로 대피시켰어?”

    “말했잖아!”

    “헛소리 말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왕위를 탐내니 마니 하며 날 물어뜯었던 게 엊그제 아닌가? 어쩌다 이런 굳건한 신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알렉스와 병사들이 다투는 건가 싶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이곳에서 대기해라! 이런 소속도 모를 자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조프리 전하의 증표다. 문을 열어!”

    “바움쿠헨 경! 이자들은 뭡니까?”

    에드워드의 병사들은 당황한 듯했다.

    상단의 용병이 도착했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난 고개를 까딱였다.

    “귀족들이 잘해 주고 있는 모양인데.”

    귀족들은 성 밖으로 빠져나갔고, 반란군을 끌고 여기까지 쳐들어왔다……. 이쯤이면 겁먹을 때가 되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에드워드는 더는 비밀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야. 왕비님을 네가 해쳤어?”

    “처음부터 믿지 않았군.”

    “…….”

    “내가 널 불안하게 해?”

    불안한 사람은 에드워드 같았다.

    “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럼 그 자리는 네 게 될 거야.”

    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말하겠다고 했잖아. 감히 너를 제물 취급하는 귀족들을 죽이고, 네 자리를 안전하게 만들면. 네게 주려고 했어. 넌 내가 주는 선물은 좋아하지 않지만…….”

    네가 이상한 것만 갖다 바치잖아…….

    “왕관은 다르겠지. 왕위에 올라, 나를 조사해. 왕비의 죽음에 내 책임이 있는지. 그렇게 하면 되잖아. 네가 안심할 수 있게.”

    * * *

    그레이는 차를 마시며 신문을 받았다.

    “긴급회의?”

    “예. 국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합니다. 지금 바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집사가 말했다.

    “아프다고 해.”

    “예?”

    “건강 문제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어. 와병 중인 아버지께 아들 된 도리로 어떻게 무리하라 말씀드릴 수 있지?”

    집사는 당황했으나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예.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레이는 나가는 집사를 바라보지 않았다. 신문에 시선을 고정했으나 활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성의 일이 잘 될까?

    그는 재상을 설득해 귀족을 등지게 했다. 재상은 에드워드 왕자를 믿지 않았으나, 그레이가 에드워드의 행동을 짚어 주자 괴로워하며 납득했다.

    ‘전하께서는 아버지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질책하셨지만, 그로 인해 우리 가문이 피해를 본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이런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재상의 자리를 내려놓아도?’

    ‘예. 그리해도요. 그러나 귀족들의 손을 잡으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재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설득이 되었다고 말해야 할까. 그레이는 충실한 아들이었다. 공작 부부는 늦게 가진 외아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부었고 그레이는 기대에 부응했다.

    아버지가 원한 건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부흥시킬 아들이었고, 그레이는 그런 사람으로 자랐다.

    재상이 귀족들을 선택하려 한다면 그레이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했다. 가문의 역사를 이번 대에서 끝낼 순 없으니까.

    그레이는 귀족들의 제안을 수락하는 척했고, 그들 사이에서 에드워드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부채질했으며, 지금은 이곳에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에드워드를 믿고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레이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신문을 펼쳐 들었다. 머리기사가 보였다.

    -조프리 전하의 진정한 연인! 목숨을 건 사랑을 고백하다!

    그레이는 차를 뱉었다.

    * * *

    왕위?

    “너 무슨 소리를…….”

    “반란 세력을 처형하면, 그 가문의 적은 내가 되겠지. 때마침 왕은 후계자로 너를 지목하고 죽을 거야. 온화한 조프리 왕자가 새 왕으로 즉위했는데,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난 네 편을 들어 날 공격할 것 같은데.”

    에드워드는 그러면서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 가늠하듯 바닥을 만지고, 등을 세워 나를 올려다봤다.

    처분을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나는 왕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자리에서, 무릎 꿇은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을 셔벗에 보낼 순 없지. 외국에 나가야 하는 쪽은 내가 될 거야. 귀족들의 적도 내가 되겠지.”

    “…….”

    “이번엔 달라. 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네게 침묵한 게 아니야. 널 위해 그런 거야.”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비스코티에 남길 원해?”

    “너도 원하잖아.”

    “내가 귀족 세력을 배후에 두고, 왕성에 앉아서…… 널 셔벗으로 보내길 원해?”

    “네가 원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부정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어?

    하지만 난 에드워드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네가 원하는 거야.”

    에드워드가 입을 열었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왕비님과 내게 어떻게 복수하려 했는지 말하는 거야. 왕비님의 죽음과 네가 전혀 관계 없다고 해명하는 거야. 셔벗과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내게 말하고, 너는 내가 셔벗에 가지 않길 바란다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은 어떤지 듣는 거야.”

    “넌 가겠다고 했을 거잖아!”

    “그럼 보내 줬어야지!”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난 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아니면 설득했어야지! 내 눈과 귀를 막고 사람을 붙여 감시할 게 아니라!”

    “널 지키려고…….”

    “널 지키기 위해서지! 네가 그러고 싶은 거잖아! 기억나? 가발까지 쓰고 몰래 로제 부인을 만나러 나갔을 때, 부인께 네가 누군지 말할 수 있었지. 왜 그러지 않았어? 부인을 지키고 싶어서? 부인은 네 소식을 듣고 싶어 했잖아!”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조프리가 해서는 안 되는 뻔뻔한 말이니까.

    하지만 에드워드가…….

    이 자식이 날 로제 부인 취급하고 있잖아!

    “내가 뭘 원하는지 네가 알아? 난 널 믿고 싶어. 정말로 내가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믿고 싶단 말이야!”

    정신 차려 보니 에드워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옷깃만 딸려 올라오고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얜 왜 이렇게 튼튼하지!

    에드워드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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