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이델라는 상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 망쳐 버렸다.
왕자는 그녀에게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려는 걸 억지를 써서 자원하지 않았던가.
왕자는 고민하는 듯했으나, 약간의 망설임 끝에 그녀에게 일을 맡겼다. 그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녀가 망쳤다.
이델라의 가문은 수도 귀족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지만, 파이 공작이 왕의 형제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공작이 왕자에 대해 소문을 내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에드워드가 일러 준 대로 왕자를 내몰기 위해서일 것이다. 공작은 은밀하게 수작을 부렸고, 이델라는 그만큼 은밀하지 못했다.
왕자 전하께 얼마나 폐를 끼친 걸까? 공작씩이나 되는 적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잡혀 버린 게 아닐까.
이델라는 짐을 쌌다. 왕자가 차라리 그녀에게 화를 내길 바랐다. 그러나 왕자는 몹시 바빠서 그녀를 쫓아낼 시간도 없는 듯했고, 그녀는 알아서 자신을 처리하기로 했다.
사라지자.
이델라 자신은 몰랐으나, 그녀는 사고가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행선지는 알려야겠지. 왕자 전하와 다른 분들이 걱정하실 테니까.
이델라는 짐을 놓고 책상에 앉았다. 저택 밖에서 소란이 이는 듯했으나, 그녀는 마음의 소란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바깥의 소란이 더 커진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바움쿠헨 저택은 활기찬 곳이지만 시끄러운 장소는 아니었는데?
복도를 종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이델라 양, 이델라 양.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제게요?”
“네. 좀 이상하긴 한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녀를 찾아온 좀 이상한 손님?
“이델라 양 아버님이시라고…….”
“누구요?”
그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델라는 서둘러 응접실로 향했다. 그녀의 태도가 마치 전쟁을 앞둔 기사 같아서, 복도에 있던 사용인들은 모두 기가 눌린 채 길을 비켰다.
딸이 아카데미로 떠났을 때도 움직이지 않던 사람이 찾아올 일이라면, 역시 약혼자 때문이겠지. 약혼자가 아버지를 협박한 모양이었다.
응접실 안은 시끄러웠다. 안에 있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닌 듯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집사가 물었다.
“아가씨. 기자들이 함께 온 듯합니다. 아버님만 모시고 나머지는 돌려보낼까요?”
기자?
이델라는 분노한 동시에 의아해졌다. 왜 기자들이 아버지와 함께 왔지? 그러나 저택에서 기자들을 함부로 쫓아내면 바움쿠헨 백작의 평판이 나빠질 것이다.
“괜찮아요. 열어 주세요.”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이델라는 뒤로 물러났다.
“이델라! 내 딸아!”
에클레어 남작이 두 팔 벌려 딸을 맞았다. 그는 딸을 포옹하려 했으나 이델라가 피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벽에 붙어 서 있던 기자들이 이델라를 보더니 수첩과 펜을 들고 일제히 무언가를 휘갈겼다.
이델라는 기가 질렸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냐니! 무슨 일은 네게 있었겠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역시 내 딸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겸손하기도 하지. 네가 왕자님을 모시고 함께 왕국을 횡단했다는 말을 다 듣고 왔는데!”
이델라는 연신 포옹하려는 남작을 피해 몸을 틀었다. 이 기자들을 아버지가 끌고 왔단 말인가? 그것도 왕자 전하와의 관계를 들먹이며. 그녀는 머리가 차가워졌다.
“가족 관계가 맞으십니까? 에클레어 양이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포옹도 피하고 있고…….”
“사칭범입니까, 이델라 양?”
기자들이 한 마디씩 하자 남작은 눈치를 보며 웃었다.
“무슨 소리를! 우리 애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렇지. 안 그러니, 이델라?”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이델라는 불쾌해했다. 남작은 얼굴이 붉어져서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기자들이 항의했다.
그들은 남작이 아니라 이델라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조프리 왕자의 행보를 짚어 나가는 중에 특별한 증언을 얻었던 것이다. 이델라 에클레어라는 아카데미 학생이 왕자의 탈출을 도왔다고.
이델라 에클레어는 바움쿠헨 백작령에 머물다가 백작과 함께 수도로 올라왔다. 이 행보까지 보면, 증언의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대귀족의 저택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직 신문은 주의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아픈 왕을 대리하면서 공공연한 단속은 사라졌다. 기자를 잡아들이는 일도 사라졌으나, 그렇다 해도 귀족을 취재하겠다고 저택에 방문할 수는 없었다.
기자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움쿠헨 백작의 비호를 뚫고 이델라 에클레어에게 접근할 기회를.
조프리 왕자에 대한 기사는 팔린다. 특종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지방 신문 기자들도 수도에 파견돼 특종을 노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프리 왕자와 함께 움직인 학생, 이델라 에클레어는 최고의 목표였다. 게다가 그녀는 여학생이었다!
그런 기자들의 귀에 에클레어 남작이 수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걸린 것이다. 기자들은 남작을 구워삶아서 저택 안으로 함께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에클레어 양, 곤란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분이 에클레어 남작이 아니라면 저희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혹시 가족분들과 사이가 안 좋으신가요? 사연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조프리 전하와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습니까?”
기자들이 앞다투어 물었다.
이델라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게 도움이 됐다.
“우리 애에 대한 질문은 내가 받을 테니까……. 뭐가 어째? 내가 에클레어 남작이야! 너 이름이 뭐야!”
기자들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전하께서 아프실 때 어땠습니까? 곁에서 간병하기 위해 올라오신 건가요?”
“전하께서 사신단으로 가시는데 심정이 어떠십니까?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먼 길을 떠나시다니, 이델라 양의 마음도 많이 아플 것 같은데요.”
이델라는 질문의 방향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예? 마음이 아프지 않으십니까?”
“와아……. 그게 아니라, 제가 마음 아파하는 게 기사가 되나요?”
“역시! 많이 걱정되시는군요!”
기자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이델라는 그들의 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며 친절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영지만 해도 장정 삼백 명이 사신단에 합류했는걸요.”
“사신단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합니다. 오렌지 백작령에서도 오백 명이 차출되었으니까요!”
“어? 저희 영지에서도…….”
“바움쿠헨 백작령에서도 출발하지 않았나?”
기자들이 서로를 돌아봤다. 사신단 규모가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것참, 셔벗에서 깜짝 놀라겠군요! 비스코티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예, 얼마나 모이는 건지…….”
“조프리 전하의 위엄이 셔벗에까지 미칠 겁니다.”
기자들은 사신단 규모에 놀라고 감탄했으나, 왕자의 연애담 취재가 더 시급했다. 기사 제목도 머릿속에서 뽑아 놨다. 목숨을 건 탈출, 그 속에서 피어난 사랑!
그들은 이델라에게 질문을 이어 가려 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자 전하께서 알고 싶어 하는 주변 상황에 이것도 들어갈까?
“이델라! 내 딸아! 얘야?”
아버지가 옆에서 떠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리는 그녀 귀에 들리지 않았다.
* * *
“……이렇게 돼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대신 보고를 부탁받아서요.”
로웰이 내게 말했다.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기자가 있었다. 바움쿠헨 저택을 찾은 기자 중 하나인 듯했다.
“왜 이델라가 직접 오지 않고?”
“기자들 상대하느라 바쁜 것 같던데요. 저야 요즘 왕성에서 사니까요.”
로웰은 기자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전하, 기사에 나오는 병사들은 역시……. 그걸까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셔벗에 대항하기 위해 모은 병력이지 않냐는 뜻이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럼…….”
“아닐 수도 있고.”
에드워드는 자기가 부른 병력이 자기를 향해 창을 들 거라고 예상할까?
아니겠지. 알았다면 부를 리 없으니까.
로웰이 머리를 헝클었다.
“아, 전 정말 이쪽으론 아닌가 봐요. 전혀 모르겠어요. 사실 바움쿠헨 백작이 저택을 비웠대서, 전 백작한테 뭔가 수작을 부렸나 했거든요.”
“그런 생각을 했어?”
“에드워드 전하께선 전적이 있으시니까요. 전하 곁에서 측근들을 다 떼어 놓는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저희한테도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는데. 별일 없는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봐요. 제 걱정이 과했네요.”
로웰이 멋쩍게 웃었다.
어?
이번엔 내가 찜찜해졌다. 바움쿠헨 백작은 왜 병력을 이끌고 올라오고 있지?
파이 공작이 불렀을 리는 없다. 귀족들의 말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니까.
에드워드를 도와 셔벗을 치려고? 나한테 말도 없이?
“전하, 크래커 소공작에게 좀 더 기다리라고 전할까요?”
시종이 물었다.
“아니. 지금 갈 거야.”
어쨌든 파이 공작의 의도대로, 귀족들은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병력을 불러 모았다. 이대로 두면 왕성은 귀족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난 반란 세력의 수괴가 된다. 그렇다고 에드워드에게 귀족들의 속셈을 밝히면, 역시 반역자가 된다. 배반당한 파이 공작이 조프리의 혈통을 숨겨 줄 리 없으니까.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 경우 정말 위험한 쪽이 어디인지는 명백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입을 열 수 있다면…….
난 그레이에게 왕성에 닥친 위험을 알릴 생각이었다. 반란 세력의 수장답게 분위기를 잡으면 그레이라도 겁먹을 것이다.
시나리오는 이랬다.
‘그레이. 에드워드가 준비하는 전쟁이 내전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겠지. 에드워드는 셔벗과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귀족들의 지원군이 창을 거꾸로 들고 왕성으로 향하면 어떨까…….’
‘설마, 전하. 반역을 생각하신다는?’
‘어떻게 할지는 네게 달렸어. 죄송하다고 했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빠짐없이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