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5화 (205/293)
  • 205.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의 측근들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왕자의 주의를 돌리라고 명령했으나, 그들이 에드워드를 믿고 착하게 명령을 수행하리라 믿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말해 두면 고민하겠지.’

    왕자에게 사실을 알려야 하는가? 왕자를 이대로 속이는 게 옳은가.

    고민하는 시간 동안 조프리 왕자의 이목을 막아 주면 충분했다. 왕자는 바빠질 테고, 왕자의 측근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왕성 외부에 신경 쓰기 힘들어지리라. 시간을 버는 것으로 측근들은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너한테만 물어볼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에드워드 일이야.”

    왕자가 표정 없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왜 에드워드 전하께 직접 묻지 않으시고요?”

    그레이는 일단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글쎄, 왜일까? 넌 알 것 같은데.”

    “제가요?”

    “에드워드, 전쟁 준비해?”

    그레이는 잠시 놀랐으나, 이내 진정했다. 그건 조프리 왕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였다.

    에드워드가 왕자의 측근들에게 이미 밝히지 않았는가. 왕자를 셔벗에 보내는 대신 셔벗과 맞서겠다고.

    왕자 뒤에 서 있던 알렉스 바움쿠헨과 그레이의 눈이 마주쳤다. 에드워드는 왕자의 측근들이 조프리 왕자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망설이리라 생각했으나, 측근들은 주인을 보호하는 것보다 주인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주인을 모시는 자라면 응당 갖춰야 할 충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레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자의 측근들은 일전에도 주인을 홀로 사지로 보내지 않았는가. 이처럼 왕자의 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다 그렇게 된 일인지도 몰랐다.

    “알렉스 바움쿠헨에게 들으셨어요?”

    왕자가 알아차린 이상 그레이가 거짓말하는 건 의미 없었다. 왕자가 셔벗에 가겠다고 말해도, 이미 회의에서 결론이 난 사안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모든 대신들과, 왕의 대리인인 에드워드가 결정한 사안이라고. 한 명의 의사로 뒤집어질 일이 아니라고.

    그레이는 긴장하며 대답을 준비했다. 그러나 다음 이어질 왕자의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준비하는 전쟁이 내전이야?”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이건 왕자가 알 수 없는 정보다.

    조프리 왕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그동안 그는 정신없이 바빴다. 왕성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에드워드의 병사들은 조프리 왕자가 만나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 왕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만한 귀족은 없었다.

    왕자는 궁에 틀어박혀서 측근들과 왕성 관리들만을 만났다. 왕자궁을 벗어나 찾은 곳은 왕비궁 정도였는데, 그곳은 현재 관리하는 궁인들을 제외하면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왕자의 측근들은 왕성에 연줄이 없다. 왕자의 시종들은 반역의 여파로 귀족 사회에서 잠시 유리되었고, 이후에는 에드워드의 영향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관리들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다.

    무엇보다 바움쿠헨 백작이 에드워드의 명령을 수락해 왕성을 떠나 있지 않은가.

    그레이는 왕자가 정보를 얻은 경로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들어오라고 해.”

    왕자가 명령했다. 왕자의 시종이 옆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그곳에서 로웰과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평민처럼 보였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레이는 자신이 모르는 자라고 확신했다.

    “내게 보고한 내용을 다시 말해 줘.”

    “예, 전하.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연신 숙이더니 품에서 접힌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오렌지 가문의 사병 출격. 사신단 합류하나……. 유서 깊은 스퀘어 가문. 오백 병사 차출. 수도로 향한다……. 영웅이 이끄는 바움쿠헨의 정예병. ‘왕국의 얼굴’ 되나.”

    그레이는 인상을 쓰고 들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내 그가 기사 제목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들고 있는 종이 뭉치를 빠르게 넘겼다. 그곳에는 신문 기사가 찍혀 있었다. 정확히는 활자로 기사 토막을 찍어낸 것에 가까웠다. 종이 자체는 완성된 신문이 아니었다. 일종의 편집본인 듯했다.

    “잠깐만요, 이런 기사가…….”

    수도에 유통되고 있다면 그레이가 몰랐을 리 없었다. 그는 수도에서 판매되는 신문을 대부분 구해 보고 있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신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여론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그 힘이 쓸모 있으리라 판단했다. 이미 신문을 찍어내는 인쇄소를 몇 군데 찾아냈으나, 적발하지 않은 채 보호하고 있기도 했다.

    “지역 신문도 대단하지.”

    왕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냉담했다.

    “……제가 읽어 봐도 될까요?”

    그레이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왕자의 허락을 구했다.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레이는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기자였다.

    그레이는 기사 제목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여러 가문에서 병력을 차출해 수도로 보낸다는 기사만 모여 있었다.

    각 기사의 활자는 조금씩 달랐다. 각기 다른 신문에서 기사를 뽑아 모아 놓은 것이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은 이 병력이 사신단에 포함될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기자의 추측을 제외하면, 그레이가 아는 사실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그레이는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왕자가 지역 신문 기자들을 관리하고 있었나? 그러나 신문이라는 것 자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매체다. 지역 신문은 말할 것도 없다. 왕자는 언제부터…….

    조프리 왕자가 물었다.

    “에드워드가 불러 모은 병력이야?”

    “알렉스 바움쿠헨이 말했다면 전하께서도 이미 아실 텐데요.”

    그레이는 교묘하게 대답했다. 더는 실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기사만 읽어서는 에드워드가 병력을 어디에 사용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레이는 내심 낭패했다. 왕성에서의 연줄이나 귀족들만 경계할 게 아니었다. 조프리 왕자의 세력은 보이는 측근들만이 다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조프리 왕자가 왕성에 끌려왔을 때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신문에선 조프리 왕자를 옹호하고, 백성들은 그 불순한 인쇄물을 숨긴 채 돌려 읽었다.

    그들은 특정 신분이나 세력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레이마저도 그것을 그저 조프리 왕자가 백성들에게 두루 사랑받고 있다고 여겨 넘겼다.

    그러나 그건 다시 말해, 누구나 왕자의 세력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눈앞의 이름 모를 기자처럼. 조프리 왕자는 어디서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왕자가 물었다.

    “제대로 읽었어?”

    “예……. 제가 놓친 게 있나요?”

    “바움쿠헨 백작이 사병을 이끌고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도?”

    “예.”

    그레이는 심장 뛰는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겁났다.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조프리의 태도가 더 가슴에 걸렸다.

    조프리 왕자는 분노하는 듯했다. 어째서?

    사건을 아는 것과 사건 간의 인과 관계를 엮어 결론을 도출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레이는 이런 기사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놀랐으나, 여기서 다른 사정을 읽어 낼 순 없었다.

    왕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바움쿠헨 백작은 명예를 알고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지. 난 그가 왕실이 결정한 대로 망설임 없이 따를 기사라는 걸 알아. 상대가 셔벗이라도 물러나지 않겠지. 그런 기사는 드물고, 바움쿠헨 백작은 그중에서도 명성과 직위가 따를 자 없이 높은 지휘관이지.”

    “예. 그러니 더욱 병사를 이끌고 셔벗에 맞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레이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기사를 왜 사령관으로 삼지 않고?”

    “예?”

    “에드워드는 국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야. 내가 아는 걸 에드워드가 모를 리 없어. 사병을 보낸 귀족들은 모두 수도에 있잖아. 셔벗을 상대하려면 바움쿠헨 백작을 사령관으로 삼고 귀족들과 전략을 논의하는 게 옳겠지. 바움쿠헨 백작은 왜 병사들을 이끌고 있지?”

    그레이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전하께서 병법에 능숙하신 줄은 몰랐는데요. 문제가 되나요? 자신의 병사를 다른 지휘관에게 맡기지 않는 분인지도 모르죠.”

    그레이는 일부러 말했다.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귀족들은 셔벗과의 전쟁을 반대한다며. 에드워드가 말했잖아.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를 만한 지휘관을 왜 수도 밖으로 보내? 수도를 일부러 비운 것 같잖아.”

    조프리 왕자는 실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분노한 이유를 이제는 그레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왕자가 생각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저 기사들. 다른 사람이 주목하지 않을 숨겨진 사실들. 사람들이 병력의 움직임에 집중할 때, 왕자는 병력을 움직이는 자들을 봤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다. 에드워드는 함정을 파고 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의 희생이 따를 것이다.

    왕자의 영특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의 뛰어난 오성은 그를 슬프게만 만드는 것이다. 혹은 다치게 만들거나.

    왕자는 자신을 대신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사람이 아니니까.

    그레이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왕자의 상처를 숨긴 붕대에 닿았다.

    그는 더 이상 왕자에게 벽을 세울 수 없었다. 왕자를 보호하기 위한 일일지라도 그랬다.

    이미 왕자는 내막을 대강 추측해 낸 듯했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왕자 앞에 몸을 낮췄다.

    “슬퍼하지 마세요, 전하.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니에요. 전부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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