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204화 (204/293)

204.

“전하께서 저희를 대변하시니,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무시하기 힘드시겠지요.”

그는 내가 완전히 자신들의 편이 되었다고 믿는 듯했다. 솔직하게 모든 일을 털어놓았다.

“아, 그러니까 반역 세력이 수도를 포위하려 하고 있다고…….”

“추호도 무도한 뜻이 없습니다. 저희는 에드워드 전하께서 폭군이 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을 따름입니다.”

파이 공작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반역이 반역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반역 세력의 수장이 되어 에드워드에게 맞서게 되는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소름이 돋는 것 같기는 했다. 누가 일 년 전 내 악몽을 현실로 실현시켜 준 기분이다.

평생 에드워드 적은 안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는데, 돌고 돌아 에드워드에게 대항하는 세력에 선봉으로 서게 됐다고?

이게 뭐야?

* * *

“괜찮으십니까, 전하?”

알렉스가 마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커튼을 닫고 대답했다.

“아니.”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무리를 하신 게…….”

“피가 안 도는 것 같아.”

그러자 알렉스는 내 손을 주물렀다. 손이 으스러뜨려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효과는 있었다. 피가 돌아서 머리도 돌아갔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내게 큰 비밀이 있는데 파이 공작이 그걸 두고 협박했어.”

알렉스가 손을 멈췄다.

“공작을 제거할까요?”

“아니.”

농담인가? 농담이 아닐 것 같았지만, 파이 공작이 사라진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파이 공작은 계획을 설명했다. 그는 정말로 나라를 뒤엎고 왕위를 찬탈하고픈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공작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다른 귀족들도 그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는 에드워드에게 평화적인 방법을 요구하고 싶어 했다.

동시에 그는 내 비밀이 내게 약점이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설명해 줬다. 길게 설명했지만 요약하자면 나보고 셔벗에 가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파이 공작은 내가 셔벗에 갈 수밖에 없도록 세간에 소문을 퍼뜨린 범인이기도 했다. 협박부터 시작해서 모든 정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 가는 데 파이 공작은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에드워드가 어쩌다 저렇게 숨 쉬듯 협박하는 애가 된 건지 궁금했는데 어린 시절 교육 때문이었다. 역시 왕성은 애들 교육 환경에 안 좋았다.

소득은 있었다. 에드워드는 본래 나와 왕비님을 동시에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 듯했다.

왕을 시해한 죄라면 왕비라도 무사할 수 없다. 왕비님은 목숨을 잃고……. 나는 평생 유폐였을까?

나를 끌어안던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왕비님과 자신은 관계없다던 말이.

에드워드는 내게 가는 정보를 차단하고,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놀랍진 않았다. 몸 어딘가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알렉스가 주물러서 피를 돌게 하고 있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난 그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파이 공작이 내게 거짓말을 했는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추밀원의 귀족들을 조사하면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를 협박할 정도로 몰린 귀족들이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준비했을 것 같진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 와중에도 내가 가장 궁금한 건,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닥친 위협을 알고 있는지였다.

마차를 몰래 돌려보내고 궁으로 돌아가자, 궁을 지키던 에드워드의 병사들이 물었다.

“산책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파이 공작은 에드워드가 그들을 통해 내게 접근하는 귀족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별로 놀라운 정보는 아니었다. 공작이 복잡한 방법으로 나를 불러냈던 이유는 이해했다. 귀족의 하인이 접근하는 것도 다르진 않을 테니까.

내 궁은 왕성 내에서도 섬이었다. 그 섬의 관리인은 내가 아닌 에드워드였다.

“응. 무슨 일 있어?”

“크래커 소공작이 방문했습니다.”

안 올 것 같더니.

“그리고 로웰 몽블랑 씨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던데요. 손님까지 데려왔습니다.”

“손님?”

* * *

그레이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어났다. 피곤한 안색이었고, 탁자에 놓인 차도 비우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레이도 에드워드와 대화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뭐 그게 아니라도 아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내게 말해 주느냐는 별개였지만.

파이 공작의 말에서 인상 깊은 게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반역을 꾀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를 협박했고 에드워드도 협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역시 협박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협박이 협박이 아니게 되지는 않았지만.

‘전하께 대화를 청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대화는 동등한 입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니, 제게 패가 있다는 것을 전하께 밝히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파이 공작과 귀족들에겐 큰 약점이 있었다. 백성들이 이례적일 정도로 왕실을 지지하는 상황이며, 외부에는 셔벗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약점이었다.

귀족들의 사병이 왕성을 포위한다면 성내에 사는 사람들에겐 위협적이겠지만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수도의 백성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왕을 능멸해 왕자를 시해하려 한 귀족들이 있는 마당에, 백성들은 물론 왕실을 옹호하는 다른 귀족 세력과 아카데미 학자들을 비롯한 식자층들은 반란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귀족들에겐 명분이 없었다.

파이 공작은 신중한 사람이었고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귀족들의 반발이 모험이 되지 않으려면, 조프리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파이 공작은 나를 필요로 했다. 공작을 지지하는 게 내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데 반해.

협상의 균형이 맞지 않다. 파이 공작은 필사적이었다는 듯했다.

‘그 서신이 아니었더라도 전하께서 저를 만나 주셨겠습니까?’

‘예. 물론이죠.’

‘…….’

떠나기 전에 공작은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려고 했는데, 이 긴 변명도 거기서 나왔다.

난 공작이 어떻게 불러내든 나왔겠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만했다.

“잠 못 잤어?”

“아니요.”

그레이는 누가 봐도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대답했다.

난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팔짱을 끼었다.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는데 그레이랑은 뭘 안 해도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자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방을 옮길까?”

“괜찮아요. 편한데요. 전하께서는 괜찮으세요?”

뒤늦게 그레이가 안부를 물었다.

“너보다는. 편하다니 잘됐네. 오래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알렉스는 내 뒤에 서 있었고 도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그레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닫히는 문을 봤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뭐 하시는 거냐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그는 방을 둘러보고 미간을 좁혔다. 벽마다 장미로 장식되어 있어서 방 전체가 꽃밭 같았다.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정말 잠을 못 잔 모양이다.

물론 장미는 내가 원해서 장식한 게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궁인들이 어제저녁 거대한 수레를 끌고 도착했다. 수레에는 싱그러운 장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굴을 익힌 궁인이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당신을 만나러 가지 못해 슬픕니다. 대신 꽃을 보내니, 내가 그리워지면 보아 주세요.

‘…….’

뭐, 아무튼…….

궁인들이 꽃을 어디에 두냐고 물어서 사실을 열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서재나 침실에 두면 정신 사나울 게 뻔했으니까.

아무튼 그레이는 약간 멍해져서 나를 쳐다봤다. 장미가 내 정신만 산란하게 만드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는 에드워드의 측근이고 대부분의 일을 함께했다. 알 만한 건 다 알고 있을 텐데 상대하기 어렵기로는 에드워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너무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돌아오는 마차에서, 내가 에드워드랑 무슨 얘기를 하든 결과가 나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우리가 선 위치가 달라서가 아닌가.

에드워드는 내 목줄을 쥐고 있다. 걔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는데 한결같이 그랬다. 내가 걔한테 을이 아니게 되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에드워드가 내 명줄을 손에 틀어쥐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대화는 동등한 위치에서만 가능하다고.

파이 공작의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협박이라…….

그리고 내 앞에는 에드워드에 비해 훨씬 만만한 그레이가 있었다.

* * *

그레이는 자신이 왜 조프리 왕자의 궁에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왕자에게 편지를 받고 정신을 차려 보니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집사가 다시 답신을 가져오자 읽었다. 책 사이에 끼워 넣고 멍하니 있었다.

날짜가 지나고 날이 저물고, 왕자가 오라는 시간이 되자 또 옷을 차려입고 준비하고 있었다.

마부가 물었다.

“도련님, 외출이십니까? 어디로 모실까요?”

“왕성으로.”

꿈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심장은 귀에서 뛰었다.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금 왕자에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을 깜빡이니 조프리 왕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편하다니 잘됐네. 오래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왕자가 말했다.

왕자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그레이는 무엇이 이상한가 생각하다가 왕자가 꽃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자는 장미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왕자가 그레이를 홀리려고 꽃 장식을 해 둔 건 아닐 것이다.

왕자의 시종이 문을 닫았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왕자의 뒤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섣불리 벗어날 수 없는 분위기다.

설마. 벌써 왕자가 눈치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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