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스승님.”
“예, 전하.”
공작은 자세를 바로 했다. 조프리 왕자가 이번에야말로 언성을 높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다시 물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알 수가 없어요. 스승님께서는 제가 훌륭한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실 텐데요.”
공작은 침묵했다. 그가 왕자들을 가르칠 적에도 조프리는 말이 길어지면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하고자 하는 얘기를 빙빙 돌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작은 조프리 왕자가 솔직하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가 있으나 왕자답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기준에서 왕자다운 쪽은 오히려 에드워드였다. 그는 속내를 숨기는 법을 알았다. 어린아이가 숨죽이고 자신을 위장했다. 공작은 안타까운 한편으로 그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왕이 될 자가 자신의 감정조차 숨기지 못해서야 어떻게 하겠는가. 불행히도 공작이 모시는 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공작은 조프리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왕과 같은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저를 걱정해서 부르셨나요?”
성장한 조프리 왕자가 물었다.
“전하께 저희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공작은 신중하게 답했다.
“제가 셔벗에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제 명으로 일하는 하인을 잡아서 저를 부르셨잖아요.”
왕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행태가 아니라는 뜻이었고, 공작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왕자는 그가 부끄러워하는 지점을 짚었다.
“전하께 은밀히 연락할 방법이 달리 없었습니다.”
“예. 그럼 저는 믿을 수 없고 저를 위협하는 스승님을 도와 에드워드와 대적하면 되는 건가요?”
왕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파이 공작은 부끄러운 마음을 외면하고 말했다.
“저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약점을 잡힌 채 서로를 도울 수 있나요?”
왕자는 순진하게 물었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설사 셔벗과 전쟁을 하더라도 한번 쥔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십니다. 그분을 억제하는 건 이 왕국에도, 그리고 전하께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저희에게 힘을 실어 주신다면, 저는 영원히 비밀을 지킬 것입니다. 저는 전하를 협박하기 위해 비밀을 입에 올린 것이 아닙니다.”
“…….”
“전하께 대화를 청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대화는 동등한 입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니, 제게 패가 있다는 것을 전하께 밝히려는 의도였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제 말에 귀를 기울이시도록……. 제게 실망하셨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전쟁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님을 또한 압니다…….”
에드워드는 반대 의견을 내는 대신들을 쉽게 다뤘다.
‘그대는 마치 셔벗의 신하 같군.’
반역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재산과 사병을 바쳤다.
이는 정상적인 행태가 아니었다. 귀족들은 겉으로 복종했으나 내심 분노했고, 무엇보다 재상이 당한 수모 탓에 공포에 질려 있었다. 크래커 공작과 같은 귀족도 저런 취급을 받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파이 공작은 비스코티가 안에서부터 갈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건 공작의 오판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왕비의 간섭 없이, 더 강한 나라를 만들 기회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았어야 했다.
왕이 어떤 사람인지, 에드워드는 또 어떤 사람인지 알았어야 했다.
두 사람의 성정을 보아 이 일은 어떻게든 틀어지고야 말 계획이었음을 알았어야 했다.
파이 공작은 그에게 합당하지 않은 자리를 욕망하지 않았다. 그는 명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지켰다.
그러나 왕의 어리석은 결정을 볼 때마다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라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텐데.
에드워드가 부탁했을 때 파이 공작의 고민이 길지 않았던 건 오래도록 품고 있던 그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공작이 어리석었다. 그는 비스코티를 더 끔찍한 방향으로 밀어 넣었는지도 모른다.
공작은 그의 과오를 되돌리고 싶었다.
이는 공작의 진심이었다. 조프리 왕자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모른다. 그는 교육받은 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조프리 왕자가 자세를 바꿨다.
“처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스승님과의 대화라면 언제든 기쁘게 찾아뵈었을 거라고.”
“…….”
“제가 회의에 참석하면 될까요? 에드워드 앞에서 셔벗에 가겠다고 말하면.”
공작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선택지가 둘밖에 없는데 하나는 전쟁이라면서요.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다른 방법은 없겠죠.”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왕자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생각에 잠긴 아이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눈앞의 왕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엇이 왕자를 설득했는가? 결국 공작의 마지막 말이었다.
왕자는 공작에게 솔직함을 요구했고, 공작은 대답했다. 공작은 나라 안팎의 전쟁을 막고자 했다.
실은 그게 전부였다.
공작은 조프리 왕자를 설득할 수십 가지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프리 왕자의 비밀을 또 누가 아는지는 알지 못했다. 왕은 예측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비밀을 알는지도 모른다.
공작은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일러 주려 했다.
왕족의 혈통 문제를 제기하는 건 극도로 어려운 일이며, 증명하기도 어렵다. 의혹은 의혹으로만 끝나기 쉬웠다. 왕자의 자리가 굳건하다면 더욱 그랬다.
조프리 왕자가 셔벗행을 거부하고 전쟁을 선택한다면, 여론은 나빠질 것이다. 백성들은 등을 돌릴 것이고, 나쁜 소문에 귀를 열 것이다.
조프리 왕자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굳건했으나 공작은 사람의 이기적인 성질을 알았다.
그러나 왕자가 셔벗으로 향한다면, 국내에서 조프리 왕자에게 감히 혈통 의혹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에드워드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파이 공작은 그런 말로 왕자를 설득하리라 준비했으나, 쓸모없었다. 왕자는 마음을 정했다.
그는 비스코티의 왕자가 아니며, 왕자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자리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왕자는 이미 비스코티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또다시 자신을 희생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공작은 그를 무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프리 왕자였다. 공작은 습관적으로 그를 왕자라고 호칭했으나, 이미 그를 다른 호칭으로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파이 공작은 나를 협박하려고 부른 게 맞았다. 난 공작의 화법에 적응을 할까말까 싶었을 즈음 수업을 그만뒀기 때문에, 다시 해석하려니 적응이 느렸다.
해석 안 해도 협박 같기는 했다.
점잖지 않은 행동은 안 할 것 같은 분이었는데, 사람은 가끔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조프리가 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파이 공작은 믿을 만한 증인이다. 명망도 있고 귀족 사회에서 신뢰받고 있다.
내 목이 광장 한가운데서 하늘 높이 매달린 장면이 떠올랐다. 광장에선 또 축제가 벌어지나?
속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벌벌 떤다고 파이 공작이 동정할 리도 없어서 난 태연한 척 물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또 있나요?”
조프리는 어느 선택지로 가도 목숨이 위험한 애가 아닐까?
거대한 떡밥이 인생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박혀 있는데 그 크기가 태산 같아서 안 밟기가 어려웠다.
왕비님은 둘만의 비밀처럼 말씀하셨는데 대체 몇 명이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공공연한 비밀 같은 거였나?
“에드워드 전하는 아실지도 모릅니다.”
“네, 그래요.”
“…….”
에드워드야 더한 것도 알고 있다.
아무튼 파이 공작은 아까부터 순순한 태도로 다 말해 주고 있었다. 난 그레이에게 캐내려던 것도 물어봤다.
“회의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요?”
“셔벗에 대응하기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결정하시고 대신들이 침묵하니 반대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셔벗에는 조프리 전하를 보낼 것처럼 속이고 병력을 집결하고 있습니다.”
“사병을 통솔하느라 휴회하는 거네요.”
“예. 병력이 모일 때까지 회의를 쉽니다. 그리고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핑계를 대 왕성을 빠져나갈 겁니다. 왕성이 포위당하면,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저희의 말에 귀 기울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
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에드워드를 어쩌겠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