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9화 (199/293)

199.

“예. 그리고 노역을 부과한다면, 장례식을 준비하는 데 부족한 예산과 인력을 충당함과 동시에 준비 기한을 단축할 수 있을 겁니다.”

예무부 관리가 말했다.

농담이겠지? 그러나 예무부 관리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난 일단 물었다.

“예산이 그렇게 부족한가?”

“통상 절차대로 진행하려면 배정된 예산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게 말인가?

“정해진 절차대로 진행하는데 왜 예산이 부족하지? 항상 쓰던 규모에 맞춰 예산이 배정되어 있지 않나?”

“외람되오나, 장례식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무부 관리는 난처한 듯했다. 그러나 난처한 건 내 쪽이었다.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까 제대로 된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다고? 그럼 매번 장례식은 어떻게 치렀는데?”

“물론 세금을 걷었습니다, 전하.”

“그것참 좋은 방법이군!”

이 나라는 어떻게 안 망했지?

예무부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서둘러야하니만큼 징수원을 다수 배정할 계획입니다, 전하. 물론 백성들이 전하를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을 의심치 않지만…….”

“그만둬. 갑자기 세금을 걷겠다는 게 말이 돼?”

이 나라 백성들은 인내심이 뛰어난 게 틀림없다. 아직까지 반란이 안 일어났다니.

“예? 안 됩니까? 늘 이렇게 해 왔는데…….”

예무부 관리는 어리둥절한 듯했다. 아니, 내 가족 장례를 왜 남의 돈 뜯어서 치러……. 문제를 느끼는 게 나뿐인가?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가시는 길까지 원망을 사게 만들어야겠어?”

예무부 관리가 소스라쳤다.

“무슨…….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원망이라니요. 전하의 슬픔은 백성들의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무도한 마음을 먹는 백성이 있다면 당장 처벌하겠습니다.”

“됐고. 멀쩡한 백성도 무도하게 만들지 말고 세금을 금지해. 그런 이유로 백성에게 징세하는 관리가 있다면 내가 처벌하겠어. 도트.”

“예, 왕자님.”

도트가 고개를 숙였다.

“로웰에게 내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재산이 얼마인지 알려 달라고 해.”

투자가 자꾸 성공할 때는 어쩌려고 이러나 싶었지만, 돈은 있고 볼 일이었다.

그 다음 문제가 되는 건 장례 규모였다.

예무부 관리는 단호하게 주장했다.

“최대 규모로 치러야 합니다!”

혹시 이 사람은 탐관오리일까?

아니면 은밀하게 나를 싫어하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능적으로 엿 먹이는 것 같은데.

“왜?”

“왕실의 위엄을 대대적으로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엿 먹이는 거 맞는 것 같다.

예무부 관리는 내 표정을 보더니 당황했다.

“어? 싫어하실 줄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 제가 사치를 즐기는 성격이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에 그런 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참담한 일이오나, 왕비님께는 여러 의혹이 뒤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논란을 종결하기 위해 이번 장례는 누구나 압도될 만한 규모로 치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저희의 생각도 같습니다, 전하.”

관리들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은 일리 있게 들렸다.

무엇보다, 왕비님은 화려한 걸 좋아했다. 규모 있게 잘 갖춰진 것들을.

“장례 준비는 빨라야 하잖아.”

한숨이 나왔다. 큰 규모를 단기간에 준비하는 게 가능한 일 같지 않은데.

“예. 역시 백성들을 동원해…….”

“아니, 됐고.”

예무부 관리는 입을 다물었다.

“규모는 맡길게. 예산이 얼마든 들어도 좋으니까 크게 준비해 줘. 누구나 조프리 왕자가 자신의 어머니를 얼마나 애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이 필요하다면 제대로 값을 주고 일을 시켜. 물건도 마찬가지고.”

관리들의 눈이 커졌다. 재무부 관리가 숨을 들이켜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왕비궁 관리가 물었다. 그렇게 물어보면 불안하잖아. 혹시 나 돈 없나?

“그럴…… 걸? 로웰?”

로웰을 돌아보자 그는 아까부터 넘기던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날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해 보겠습니다.”

조프리 부자 아니었어?

장례 규모를 정하는 데만 하루가 다 갔다. 밤이 되자 시종들은 내 잠자리를 준비하고 약을 가져와 먹였다.

시종들이 주는 눈치를 못 이기고 관리들이 일어났다.

“내일도 오겠습니다, 전하.”

“몽블랑은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랑 좀 더 논의를…….”

“예. 갈게요. 전하, 쉬세요.”

로웰은 내게 인사하고 관리들을 따라 나갔다. 관리들도 몸을 낮추고 나갔다. 난 한숨을 쉬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방에 남은 관리가 한 명 보였다.

“왜? 할 말이 남았어?”

왕비궁 담당 관리였다. 그는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했는데 감히 왕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 전하. 의문이 있어 그러는데요…….”

“말해 봐.”

“예산이나 인력 문제는 에드워드 전하께 말씀드리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왕비궁을 담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별로 출세할 만한 관리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랬다.

에드워드와 왕비님 관계를 모르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나라 사람 아닌가?

“관리가 된 지 얼마나 됐어?”

“올해로 이 년 차입니다.”

“음, 그래……. 다들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관리는 혼란스러워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기에 난 말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조프리 전하를 몹시 아끼시잖습니까.”

그는 진심인 듯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더니 도트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왕자님, 씻을 물이 준비되었어요. 앗, 아직 일이 안 끝나셨어요?”

난 관리를 지나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응.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길 바라고 있다.

* * *

따듯한 물에 몸을 담갔다. 온몸의 피로가 풀리며 눈이 감겼다. 오늘 에드워드는 시종을 보내지 않았다.

“이델라 양이 오후에 방문했어요.”

도트는 씻고 나온 내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말했다.

“바움쿠헨 경과 함께? 부르지 그랬어.”

“아니요. 바움쿠헨 경은 없었어요. 그게 말인데요, 왕자님. 이델라 양이 보니까 바움쿠헨 경이 저택에 없었다던데요. 집사 말로는 외출했대요.”

“외출? 어디로?”

도트는 머리의 물기를 다 닦아 내더니 향유를 손에 풀고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집사도 모른대요. 며칠 나갔다 올 거라고만 말했다던데요.”

“이상한데.”

중얼거리자, 도트가 맞장구쳤다.

“그리고 집사에게는 저택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말했대요.”

“더 이상하네.”

“예. 정말로요.”

어쩐지 며칠이라는 말이 걸렸다. 이 말 최근에 들은 적 있었는데.

에드워드.

며칠 바빠질 거라고 하지 않았나…….

* * *

로웰은 관리들의 뒤를 따라갔다. 왕궁 관리들은 조프리 왕자 궁을 벗어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입을 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했다. 궁인들의 이목이 사라진 곳에 도달해서야 그들은 말을 꺼냈다.

“전하께선 진심이십니까? 그러니까, 전하께서 말씀하신 게 저희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지…….”

재무부 관리가 질문했다. 로웰은 내심 조프리 왕자의 속내를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나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예. 맞을 겁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비스코티의 안녕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니까요.”

“역시, 최대 규모로 준비하라는 말씀은 그거군요.”

예무부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마음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그 말씀은…….”

“셔벗에서도 알 수 있게 하란 말씀이시겠죠.”

관리들이 동의했다.

그런 거였나? 로웰은 관리들의 말을 경청했다.

조프리 왕자가 크게 장례를 열어 왕비를 애도하고, 온 비스코티인이 그에 동참한다면 셔벗은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다. 비스코티가 셔벗을 무시했다는 명분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조프리 왕자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피해자였으니까.

로웰은 자괴감이 들었다. 관리들처럼 듣자마자 왕자의 목적을 파악할 수 없었다. 왕자를 모시고자 한다면, 그는 정치적 감각을 길러야 했다. 지금까지처럼 시키는 일만 하는 건 심부름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전하께서는 셔벗에 가고자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뒤늦게 합류한 왕비궁 관리가 슬쩍 물었다. 다른 관리들은 일제히 인상을 썼다. 이런 눈치 없는 놈이…….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부분까지 함부로 추측하는 건 위험하겠죠?”

로웰은 웃으며 대답했다.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재무부 관리가 말을 돌렸다.

“문제는 예산이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전하 앞에서 따지고 들 수야 없었지만, 까놓고 물어도 되겠습니까? 전하에 대한 소문을 얼마나 믿어도 됩니까?”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대로일걸요.”

로웰은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는 투자를 로웰에게 맡겨 놓고 있었는데 로웰은 그 재산을 크게 불려 놓았다. 로웰처럼 전적인 신뢰를 받으며 큰돈을 맡아 굴리는 상인도 드물 것이다.

“오오……. 왕국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설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해도 사재를 푸시다니 자애로운 분이 아닌가? 다른 왕족들은 개인적인 일에도…….”

“어허! 입조심하게.”

관리들은 체면도 잊고 웅성거렸다. 예무부 관리가 진정시켰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일단 믿겠습니다. 급한 일부터 논의합시다. 물자 조달이 가능하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몽블랑에서도 힘을 쓰겠지만, 전하의 일이라면 다른 삼 대 상단에서도 발 벗고 나설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백성들의 지지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무부 관리마저 놀랐다. 상인들의 이기심이야 유명하지 않은가? 상단끼리 돕다니, 백성들 사이에서 조프리 왕자의 인기가 높다 해도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예, 뭐…….”

로웰은 굳이 예무부 관리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는 대단한 투자자였다. 동시에 대단한 자산가였으며 상업 발전에 호의적인 권력자였기 때문에, 상단들은 눈에 불을 켜고 왕자에게 선을 대려 했다. 어떤 상단도 왕자에게 접근할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밤이 늦어서도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성문이 잠겨 어차피 왕성 밖으로 퇴근도 불가능했다.

로웰은 어쩌다가 자신이 관리처럼 일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새벽까지 왕성에 붙들려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논의는 날이 밝으면 합시다.”

관리들이 말했다.

로웰은 밝아 오는 창밖을 봤다. 저게 날이 밝는 게 아니면 뭐지?

“예. 새벽부터 전하를 찾아가지 마시고 예산 문제는 제게 말해 주세요.”

로웰은 개념 없는 관리들이 새벽부터 왕자를 괴롭힐까 봐 선수 쳤다.

“물론입니다. 전권 위임자 아닙니까? 전하께서 전적으로 맡긴다고 하신 말을 저희도 들었습니다.”

관리들이 하하 웃었다.

그 틈에서 같이 웃으면서 로웰은 자신이 왕자의 믿음직한 측근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귀족들은 로웰을 파티장에서나 어울리면 좋을 부류로 취급했다. 집안에서야 괜찮은 상인 대접 받은 지 좀 됐지만. 그것도 왕자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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