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8화 (198/293)
  • 198.

    한밤의 회동은 날이 밝기 전에 끝났다.

    에드워드가 믿을 만하지 않다는 데 모든 사람이 일 초 만에 동의했기 때문에, 더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에드워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겠다. 그가 준 정보부터 의심해 보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난 로웰에게 부탁해 소문의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귀족의 소행은 맞는지, 그렇다면 그 귀족은 누구인지.

    어떤 일이든 사람을 쓰면 증거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몽블랑은 사람을 동원하는 데 탁월했다.

    “그리고 바움쿠헨 백작을 만나 봐야겠는데. 대전에서 에드워드와 귀족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아야겠어. 알렉은 뭐 들은 거 없어? 백작 만나고 왔잖아.”

    알렉스는 잠깐 생각했다.

    “없습니다. 스승님을 부르실 겁니까?”

    “응. 백작이 많이 바쁜가?”

    “전하의 부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겁니다.”

    바쁘면 알아서 안 오겠지. 별로 안 바빠 보였지만. 난 도트에게 서신을 건넸다.

    “도트. 부탁해.”

    “예, 왕자님.”

    “저, 전하.”

    알렉스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

    “응?”

    “스승님께서 오시면 이상한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무시해 주십시오.”

    “둘이 다퉜어?”

    “아닙니다.”

    다툰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바움쿠헨 백작 잘못일 테니 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오면 도트는 내가 만날 수 있는 귀족들 명단을 정리해 줘. 왕비님과 친했던 귀족들 명단도 부탁해.”

    “예, 왕자님.”

    알현 신청을 한 귀족이 있을까 모르겠다. 예전에 조프리는 인기 있는 왕자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상황을 정리하고, 난 마지막으로 이델라를 쳐다봤다. 내겐 그녀를 아카데미로 안전히 되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녀에게 왕자를 구한 공으로 훈장을 주는 게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 내 상황은 어쩐지 미심쩍게 돌아가고 있고, 당장 몇 달 뒤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셔벗 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프리는 팔자가 꼬였다. 좋게 풀리는 일이 없다. 왕자치곤 좀 박복하지 않나?

    “이델라.”

    “네. 말씀하세요.”

    “상황이 좋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요. 일손이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응?

    “저 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라면 쉬지 않고 해서요, 몸 쓰는 일엔 자신 있어요.”

    “그렇구나.”

    “도트 씨 대신 제가 백작님께 편지를 전해 드릴 수도 있고요. 로웰 씨도 혼자 조사하기 힘드실 텐데, 제가 같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 한곳에서 오래 서 있는 것도 잘해요. 제가 도움이 안 될까요?”

    “큰 도움이 되겠는데.”

    “그렇죠?”

    그러더니 이델라는 방긋 웃었다.

    어? 결정된 건가?

    “학교로 안 돌아가게?”

    이델라의 엔딩은 어떻게 됐는지 의문이었다. 이미 다 꼬였고, 이젠 엔딩이라는 단어를 써도 안 되겠지만.

    게임이 아니라 이델라의 인생이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학업은 꽤 중요하지 않나…….

    “도와 달라고 하신 말씀은 제게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일회성이었군요…….”

    “그게 아니라, 학생은 본분은 학업이고…….”

    “전쟁을 앞두고 아카데미의 학생이자 왕국의 일원이 되어서 책만 읽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왕자 권한으로 복학 정도는 쉬울 것 같지만.

    전쟁이니 뭐니 분위기가 어수선할 때, 아카데미 도시보다 오히려 왕성이 나을지도 모른다. 왕족이 있는 곳은 원래 최후의 보루니까.

    “맞는 말이네. 책 읽는 것보다 보람찬 일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럼 좀 도와줄래?”

    “제가 전하를 위해 일해도 되는 건가요?”

    이델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무슨 말이 그래? 내가 고마워할 일이잖아.”

    “전하께서는 제가 아카데미에 다닐 자격이 있는 학생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말을 했던가?

    “제가 좋은 신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델라의 눈이 반짝였다.

    어쩐지 방 분위기가 따듯하면서 불손했다. 뒤에서 흐뭇하게 이델라를 바라보는 도트 때문인지 감회에 젖은 알렉스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델라가 나한테 충성 서약이라도 하고 있다는 표정 짓지 않으면 좋겠는데. 남의 창창한 앞길 가로막을 일 있나.

    난 눈으로 경고하고 이델라에게 대답했다.

    “물론이야.”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게요.”

    이델라는 눈을 반짝이며 각오를 밝혔다.

    음. 그래…….

    * * *

    각자 할 일을 하러 떠나고, 내 곁에는 알렉스밖에 남지 않았다.

    “봤어?”

    “예?”

    “침실을 지키는 병사들. 수가 하나 적어.”

    알렉스의 표정이 변했다.

    “새벽에 따라 나온 그 병사입니까?”

    “그런 것 같은데.”

    “잡아 올까요?”

    “아니. 돌아오면 알려 줘.”

    “그냥 둬도 괜찮습니까?”

    “뭐. 흔한 일인데.”

    알렉스는 입을 닫았다.

    “예, 전하.”

    새벽에 나와 알렉스를 따라 나온 병사가 보이지 않았다. 교대 시간도 아닌데, 아침부터 병사 한 명이 사라질 일이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조프리 궁의 궁인이 조용히 사라지는 일은 몇 년 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조프리 궁의 궁인들은 왕비님과 잘 지냈는데, 너무 잘 지내서 문제였다.

    난 그들을 내보내고 빈자리에 새 사람을 채워 넣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누굴 채워도 왕비님의 손길이 닿을 것 같아 그만뒀다.

    늦기 전에 왕비님께 물어봤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조프리에게 왕비님은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왜 왕비님은 조프리를 믿지 않았는지.

    왜 조프리에게 직접 생활을 물어보지 않고 궁에 사람을 심었는지. 왜 내가 궁인들을 물갈이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지만.

    왕비님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마도 조프리마저 믿지 않았지만, 조프리에게 미움받기는 싫어했다.

    아니. ‘싫다’는 이상한 표현이다. 왕비님은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이 성에 왕비님 편은 조프리뿐이었으니까.

    적어도 왕비님은 그렇게 믿었으니까.

    감은 눈꺼풀 안으로 어린 조프리의 초상이 보였다. 그 얼굴은 왕비님으로 바뀌더니 이내 금발의 조각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가볍게 주먹을 쥐어 가슴을 문질렀다.

    에드워드는 사람을 믿지 않고 경계심이 많다. 그런 주제에 내게 미움받기는 싫어한다.

    역시 팔자가 사나운 게 틀림없다.

    * * *

    날이 밝자, 조프리 궁에는 사람들이 밀어닥쳤다.

    하나같이 귀족이었고, 왕실에 복무하는 관리였다. 난 한눈에 그들이 공무원이라는 걸 알아봤다. 관리들은 복장 같은 걸 갖춰 입지 않아도 이상하게 관리처럼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들의 가장 앞에는 왕비궁을 담당한다는, 익숙한 얼굴의 관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도트가 묻자 그들은 공손하게 말했다.

    “장례 준비를 재개하신다 하여 왔습니다. 조프리 전하께서 맡아 하신다고요. 이른 시간에 실례인 줄 아오나, 마음이 급하여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급할 일이 있으신가요?”

    도트도 공손하게 되물었다.

    “예. 외람되오나, 날이 더워지기 전에 장례를 치러야 할 듯합니다.”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관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왕비궁 담당 관리는 그들 사이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여 전하께 말씀을…….”

    내가 묻자, 왕비궁 담당 관리가 사죄했다.

    날씨가 무슨 상관인지 나도 듣고서야 알았다.

    정말로 생각도 못 했다.

    “다들 들어와.”

    관리들의 표정이 펴졌다. 그들은 왕자가 무례에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고 있었던 듯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도트가 물었다.

    “집무실로.”

    조프리 궁의 집무실이란 공부방으로 쓰던 큰 방을 말했다. 창을 등지고 책상과 의자가 있고, 방 한가운데는 커다란 테이블과 소파 두 쌍, 그 상석에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과외 선생님이 앉곤 하던 소파에 관리들이 앉았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직책과 이름을 소개했다.

    기억하기엔 너무 많았고, 가장 앞장 선 사람이 예무부 관리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는 왕실 대소사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이 세계의 관리들은 공무원이라기보다는 왕의 신하였다. 물론 이 땅의 모든 귀족은 왕의 신하지만, 귀족들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세계는 옛날 유럽과 비슷한 봉건 시대였는데, 그 말은 귀족들이 자기 땅에서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누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왕이 녹봉을 주는 관리들은 정말로 왕의 신하였다. 궁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분은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다. 이 점도 궁인들과 비슷했으나, 다른 점이라면 관리들은 대부분 아카데미를 거친 식자층이라는 거였다. 물려받을 영지와 재산은 없으나, 여느 귀족들처럼 왕을 위해 일하는 계층이라고 파이 공작이 말했다.

    아무튼 공무원이라는 거잖아. 왕국의 주인은 왕이고, 왕을 위해 일한다는 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거니까.

    난 그렇게 이해했는데, 관리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특별세를 걷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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