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7화 (197/293)
  • 197.

    새삼 이곳이 왕비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가 잘 하지도 못하는 위로를 시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라도 누가 나같이 굴고 있으면 신경 쓰일 것이다.

    난 슬퍼하고 있는 것 같다. 왕비님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심지어 좋은 부모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왕비님을 조금은 좋아했나 보다. 아니. 그걸 좋아했다고 말해도 좋을까?

    왕비님이 조프리에게 주던 것처럼 맹목적인 사랑을 받아 보고 싶었다. 아이에게 눈이 먼 부모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건 그 아이에게 전혀 좋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조프리에겐 잘못이 없다. 적어도 왕비님의 세상에선 그럴 것이며, 왕비님은 조프리를 사랑한다. 이 단호한 명제가 난 신기했다.

    그건 절대적인 감정으로 보였다.

    사실 그렇지만도 않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겠지만.

    왕비님이 보여 주는 건 내가 어릴 적부터 줄곧 바라 왔던 그런 애정 같았다. 내 곁에 강한 보호자가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보호해 주고 날 사랑해 주는.

    그런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왕비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로제 부인을 죽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왕비님을 싫어할 수 없었다.

    난 확실히 좋은 사람은 아니다.

    알렉스에게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곳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어지러웠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도 참 대단히 이기적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애정을 야금야금 받아먹을 거면 왕비님께 잘하기라도 하든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제대로 선을 긋든가. 뭐 하나 명확하게 하는 일이 없다.

    사람 하는 일이 다 그랬다. 한숨만 나왔다.

    조프리였다면 울었을까? 난 알 수 없지만.

    난 조프리가 아니다. 저 그림 속의 아이가 조프리인지 아닌지, 왕비님이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달라진 ‘조프리’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프리로 사랑받은 만큼, 나는 왕비님께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내가 에드워드를 믿어도 될까?

    그걸 알기 위해선 왕비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에드워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

    기대 있던 몸이 움찔했다.

    뭐지? 올려다보니 알렉스는 태연한 척하며 눈을 피했다.

    “뭐 아는 거 있어?”

    “아니요.”

    대답이 빨랐다.

    “아닙니다.”

    알렉스가 눈을 마주쳤다.

    “혹시 나한테 거짓말하는 중이야?”

    “아닙니다, 전하.”

    “물론 아니겠지. 내가 목숨을 맡긴 기사가 내게 거짓말할 리 없잖아.”

    난 코를 훌쩍이며 몸을 떼어 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

    더 추궁할 필요도 없었다. 알렉스는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실토했다.

    알렉스에게 들은 사건은 이랬다.

    -알렉스가 외출했을 때의 일이다. 기사들이 다가와서 알렉스를 에드워드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에드워드는 알렉스에게 조프리 전하를 구할 계획에 동참하라고 말했다.

    -조프리 전하는 너무도 선량한 데다 대범하고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했다. 그 위기가 뭐냐 하면 셔벗의 추잡한 수작이었다.

    -셔벗에서는 조프리 전하를 볼모로라도 잡을 속셈이라는 것 같은데, 심지어 이 나라의 귀족들은 명예도 모르고 그 수작에 동참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는 족속들이다.

    -에드워드는 귀족들에 대항해 셔벗의 수작을 막고 있다. 그러나 조프리 전하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셔벗에 가려고 하실 거기 때문에, 알리면 안 된다.

    -물론 조프리 전하는 영민하고 지모가 뛰어난 분이라 약간의 실마리만 들어도 일의 전모를 예측하실 것이다. 그러니 측근들은 전하께서 몸과 마음을 최대한 휴식할 수 있게 돕도록 해라.

    “…….”

    술이 다 깨는 기분이다.

    아닌가? 취하고 있는 건가? 알렉스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영민하고 어쩌고 한 조프리 전하’ 따위의 말을 내뱉어서 이게 꿈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에드워드랑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어?”

    “예? 그런 적 없습니다, 전하.”

    알렉스는 진심으로 싫어했다.

    “아, 그래. 아니, 이게 아니라……. 그래서 술을 먹인 거야?”

    “죄송합니다. 몽블랑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데 최고의 약이라고 속삭여서 그만…….”

    알렉스는 송구스러운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도 나보다 시야가 높았지만.

    “병자에게 술을 먹이면 안 되지.”

    “안 좋습니까?”

    알렉스가 깜짝 놀랐다. 기본 상식 아닌가? 왜 놀라는 거야? 아니, 다른 길로 빠지지 말고……. 로웰?

    “대체 몇 명이나 관여된 거야? 로웰도 끼었어?”

    “죄송합니다…….”

    조프리 궁은 한밤중에 깨어났다. 내가 궁으로 돌입해서 로웰을 잡도리했기 때문은 아니고, 내 부재를 안 도트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세상에! 왕자님이 나가셨는데 어떻게 행방을 아무도 모를 수가!”

    “시, 시종님. 한 명이 따라 나갔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병사 한 명? 왕자님이 외출하시는데, 병사 전원이 따라 나가도 모자랄 판에 병사 한 명! 정말 믿음직하군!”

    정색하고 호위병들을 잡고 있던 도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변했다. 그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왕자님! 어딜 다녀오셨어요? 제게 말도 없이! 전 왕자님을 또 잃어버린 줄 알고…….”

    “도트. 에드워드한테 불려 간 적 있어?”

    도트는 울음을 뚝 그쳤다. 소란 때문에 복도로 나온 듯한 로웰과 이델라도 조용해졌다. 난 그들을 돌아봤다.

    “너희는?”

    순간 이델라가 딸꾹질을 했다. 그러더니 놀라서 자신의 입을 막았다.

    “…….”

    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잠 다 깼지? 나 너희가 에드워드랑 무슨 얘기 했는지 듣고 싶은데.”

    “와, 왕자님…….”

    “물론 얘기해 주겠지?”

    “…….”

    침실에 술자리 멤버가 다 모였다.

    죄인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 알렉스와 로웰, 도트, 그리고 이델라까지.

    가장 의아한 멤버는 이델라였다. 대체 어쩌다 말려든 거지?

    알렉스에게 들었을 때부터 의아했지만, 아무튼 이델라도 끼어 있었다.

    밤바람을 쐬며 걸었더니 술이 깨는 모양이었다. 두통이 일었다. 이마를 누르고 있으려니 이델라가 코를 막고 찬물을 삼키다 눈치를 봤다.

    난 못 본 척했다.

    이델라의 딸꾹질은 한참 뒤에야 멎었다.

    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도 정적을 깨지 않았다.

    그동안 난 생각을 정리했다. 내막이야 알렉스에게 들었으니 더 추궁할 것도 없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내가 어제 술을 좀 마시긴 했는데 정신이 끊어지진 않았다. 어제 내 기억에 의하면 로웰은 에드워드를 경계하는 것 같았는데.

    “있잖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면 정정해 주면 좋겠는데.”

    네 사람은 서로를 은밀하게 시선으로 찔러 대더니 로웰을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말씀하세요, 전하.”

    “너희 에드워드 싫어하지 않았어?”

    “예? 엄청 싫죠. 콜록, 콜록……. 그럴 리가요. 에드워드 전하를 저희가 왜 싫어하겠어요?”

    “…….”

    싫어하네.

    “그렇게 싫어하는데 에드워드 말은 잘 들었네.”

    “전하, 그런 게 아니에요!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처음부터 전하를 속이려 했던 게 아니라요, 저희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전하를 배신했다거나 그런 건 진짜 아니고…….”

    로웰은 울상이었다.

    “알아. 날 걱정해서였다며.”

    “네! 네? 아신다고요?”

    “알렉스한테 다 들었어.”

    “아, 어디서 들으셨나 했더니…….”

    로웰이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응. 내막은 들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는데.”

    알렉스야 본래 머리 쓰는 일은 자기 분야가 아니다. 도트는 왕족에 대한 충성심이 있고 이델라도 에드워드를 전쟁 영웅으로 숭상하는 왕국의 신민이다.

    하지만 로웰은 상인이었고, 돈에는 국경이 없다. 귀족들이 상인을 경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상인에게 신의가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상인의 충성심은 어떤 백성보다 희박하니까.

    다 떠나서 로웰은 에드워드를 경계하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뭐라고 설득했기에 너까지 넘어간 거야? 에드워드가 나를 셔벗에 안 보내려고 지키고 있다는 것 같은데, 사실 날 볼모로 보내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건 에드워드 세력이잖아. 알렉스는 그렇다 치고, 네가 에드워드 말을 듣고 그냥 ‘그렇구나’ 하진 않았을 텐데.”

    로웰은 반성하는 자세를 그만뒀다. 공손히 모은 두 손을 떼고 등을 편 다음, 머리를 헝클더니 한숨을 쉬었다.

    “네. 전 알렉스 바움쿠헨이 아니죠.”

    저게 무슨 뜻이냐는 듯 알렉스가 나를 쳐다봤다. 나 말실수한 것 같은데.

    “이유가 있는데요, 좀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말해 봐.”

    “전 에드워드 전하가 진심으로 전하를 아끼신다고는 생각해요. 정치적인 이유는 제가 잘 모르니까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 눈으로 봤을 때는요. 전하를 보호하시겠다는 말씀도 진심으로 들렸어요.”

    난 뭐라고 대답하기 힘들었다.

    나야 믿고 싶지만, 너무 달콤한 선택지여서 머릿속에서 미뤄 두려고 한 부분인데.

    “전하께서 셔벗에 가실 거라는 소문이요, 좀 알아봤는데 누군가 일부러 퍼뜨리고 있었어요. 에드워드 전하는 그게 귀족들의 소행이라고 확언하셨고요. 귀족들이 조프리 전하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지금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에드워드 전하밖에 없을 것 같았어요.”

    편한 선택지는 좋다. 나처럼 편한 길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걸.

    “좋아. 그럼 에드워드라는 방패 밑에서, 내가 안전하게 셔벗에 안 가면 어떻게 될까?”

    “에드워드 전하가 알아서 하시겠죠?”

    로웰이 불손한 상인답게 말했다.

    “아니, 내가 안 가면 전쟁이라면서?”

    “아, 역시, 들으면 가려고 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넌 전하를 그렇게 모르냐?”

    “애초에 네가 몸에 좋지도 않은 술로 전하께 수상한 낌새만 안 비쳤어도…….”

    로웰과 알렉스가 다시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난 둘을 놔두고 아직도 반성하는 두 사람 앞에 섰다.

    알렉스의 증언에 따르면 에드워드와 대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둘 중 이델라다.

    “이델라, 뭔가 들은 거 있어?”

    “아니요, 전하. 제가 뭘 알겠어요.”

    이델라가 겸손하게 말했다. 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이델라. 도와줄 거지?”

    “전하, 반칙이에요…….”

    결국 이델라는 내막을 털어놓았다. 에드워드는 출전할 생각이라는 것 같았다. 아, 나를 보호하려고 전쟁을 일으킨다고. 경국지색이라도 된 기분이다.

    이게 진짜 믿기나?

    “혹시 에드워드 믿음직한 사람이야?”

    하는 말마다 다 신뢰가 가고 그래?

    “예?”

    이델라가 정색했다. 사이좋게 놀던 두 사람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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