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3화 (193/293)
  • 193.

    뒤늦게 알렉스가 방에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땀 냄새가 훅 풍겼다. 그는 훈련용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이 다 젖어서 몸에 달라붙었다. 다른 일을 하다 급하게 달려온 듯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하.”

    “운동했어?”

    “예. 아침 수련을 하느라……. 죄송합니다.”

    해가 중천을 넘은 지 오래였다. 이미 아침이 아닌데? 설마 아침부터 했다는 뜻인가.

    알렉스야 아카데미에서도 수련을 거의 빼놓지 않고 했다. 그가 쉴 때는 내가 붙잡아 놓을 때밖에 없었다.

    더 강해지겠다더니 진심인 모양이다. 그는 굳은 표정이었다.

    ‘더 수련하고 있어도 돼.’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난 대신 부탁했다.

    “외출할 건데, 호위해 줄래?”

    “영광입니다, 전하.”

    알렉스의 딱딱한 표정이 펴졌다. 그는 미소 지으려다가 갑자기 상의를 끌어 올렸다. 냄새를 맡는 것 같다. 배꼽 보이는데.

    그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죄송합니다! 씻지도 않고 전하의 곁에……. 당장 씻고 오겠습니다.”

    “괜찮은데.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그래?”

    새벽 운동을 하다 보면 땀도 흘리고 그 꼴로 붙어 있기도 했다. 내가 땀 흘리는 모습도 자주 봤잖아?

    “죄송합니다…….”

    옷을 내리더니, 알렉스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나랑 눈도 못 마주치고 있다. 정말 왜 저러는 거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갈 곳이 왕비님의 궁전이니까.

    왕비님에겐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다.

    난 씻고 오라고 허락했다.

    애초에 바로 방문할 생각도 아니었다. 도트와 시종들이 방으로 식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도트는 신문 한 부를 내 옆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앗, 왕자님. 요즘 세간에서 대유행인 신문이에요. 전에 나온 거긴 한데요, 내용이 아주 훌륭해요.”

    ‘그’ 신문인가? 그 신문이라면 훌륭할 리가 없는데. 창간호 첫 기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여기서 훌륭한 기사를 읽게 될 것 같진 않았다.

    펼쳐 보니 과연 익숙한 모양새였다. 기숙사장과 그 일당은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를 마시며 첫 면 기사를 읽었다.

    [단독] 조프리 전하를 수도로 호송한 병사의 눈물 어린 토로

    차를 뱉을 뻔했다.

    이게 메인 기사야?

    반 접힌 신문을 제대로 펼치고, 내용을 읽어 나갔다.

    -전하께서는 의연한 태도로 우리를 대했다. 그분은 두려움이나 후회를 보이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감히 전하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가슴을 움켜잡고 그분을 모셔야 했다. 그러면 안 됐지만, 우리는 전하께서 차라리 도중에 도피하시길 바랐다. 그래서 마차를 세워 두고 경계도 서지 않은 채 휴식 시간을 가질 때도 있었으나, 전하께서는…….

    “이게 뭐야?”

    나를 호송한 병사 얼굴이 기억날 리 없어서, 도대체 누가 이런 소리를 해 놨는지 짐작도 안 갔다!

    진짜 인터뷰는 한 거 맞아? 그냥 소설을 써도 이런 낯 뜨거운 내용은 안 될 것 같다!

    “앗. 그 기사 읽으셨군요. 솔직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든지 왕자님을 호송한 병사니까요. 전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속내를 들어 보니 동정심이 안 드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다른 시종들도 읽고 눈물바다가 되었어요.”

    아무래도 좋았다!

    “단독은 또 뭔데? 민간 신문이라 봤자 이게 유일하잖아?”

    “앗, 왕자님. 그렇지 않아요. 요즘 신문이 얼마나 유행인데요.”

    “신문이 ‘유행’이라고?”

    “최근 창간한 신문만 열 개는 넘을걸요! 물론 인기리에 팔리는 신문은 이게 제일이지만요. 다른 신문은 귀족들에게 아부하는 꼴사나운 신문이에요.”

    “맞아요, 맞아.”

    시종들이 도트의 말에 맞장구쳤다.

    너희도 귀족이잖아…….

    “왕국에 출판법이 있던가?”

    “예? 그게 뭔가요?”

    “아니야. 알아서 하겠지.”

    세금은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보다, 이 뒷면 기사들 무엄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안 잡히고 있는 거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알렉스가 돌아온 줄 알았다. 낯선 시종이 편지를 내밀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편지에 장미 한 송이가 붙어 있다…….

    도트와 내 궁의 시종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도트가 다가와서 방긋방긋 웃었다.

    “왕자님. 식사하시는 데 방해될 텐데, 제가 읽어 드릴까요?”

    시종들은 주인이 아무것도 눈치 못 채는 줄 아는 경향이 있다.

    “아니. 더 할 일 없으면 다들 쉬고 있어. 식사 시중은 괜찮아.”

    시종들을 전부 내보내고, 문밖에 누가 없다는 것도 확인했다.

    누가 있어도 편지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딱히 이상한 편지도 아니고……. 아니겠지?

    난 편지를 펼쳤다. 종이에서 좋은 향이 피어올랐다. 향수도 뿌렸다…….

    얇은 편지지에는 에드워드의 길쭉한 필체로 몇 문장이 쓰여 있었다.

    -보낸 선물이 마음에 들길 바랍니다. 무리하지 말고, 움직이기 전에 식사해 주세요. 건강 먼저 생각할 것.

    왜 존댓말이야?

    * * *

    그레이는 심부름꾼을 따라 왕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에드워드는 피로한 얼굴이었다.

    “앉아 있어.”

    “예, 전하.”

    에드워드는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두꺼운 서류가 보였다.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

    그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좋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재상처럼 에드워드를 비난할 순 없었다. 그들은 공범이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를 오래 보아 왔기 때문에, 그의 초췌한 얼굴을 보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그레이는 어린 에드워드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으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좀 주무셨어요?”

    “아니.”

    “전하께도 시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카데미에서 전하를 따르던 자들 중에서 몇 사람을 곁에 두시는 게 어떠세요?”

    “됐어.”

    “사람을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전하의 위치가 누굴 가릴 자리가 아니시잖아요. 전하께도 가장 가까운 자리를 지켜 줄 세력이 필요할 테고요. 나라를 통치하려면, 전하께는 사람이 필요해요.”

    조프리 전하와 대화는 해 보셨어요?

    사실 그레이가 묻고 싶은 질문은 그거였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지.

    국내의 급한 불은 껐으나 셔벗의 위협이 남아 있다. 그레이는 자신의 무능함에 속이 상했다. 그가 책상 가까이 다가가도 에드워드는 저지하지 않았다. 그레이에게 자신이 이미 읽은 서류를 넘겨주기까지 했다.

    그레이는 받아서 읽었다. 익숙지 않은 이름과 외국의 지명이 등장했다. 셔벗의 동향이다.

    별생각 없이 읽던 그레이는, 이 보고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가 조사한 건가요?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시간이 맞지 않다. 사태가 급박해진 뒤 셔벗에 첩자를 보냈다면 이런 보고서가 나올 수 없다.

    “북방에서의 분쟁을 끝내고, 내 병사들을 얻었을 때. 사람을 나눠 파견 보냈어.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셔벗부터 경계해야 했으니까.”

    “그때부터…….”

    “보냈던 조사관들이 돌아왔어. 읽어 봐. 네게도 흥미로운 내용일 테니.”

    그레이는 보고서를 넘겼다. 장이 넘어갈수록 그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무엇이 흥미롭다는 말인가? 셔벗은 철과 군사용품, 식량을 사 모으고 있었다.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비스코티를 노리고 있었나? 심장이 서늘했다. 이렇게 오래된 계획이었다면…….

    “셔벗 왕은 기사가 아니야. 집권 초기에 소규모 반란을 진압한 일을 제외하면 군사 행동을 일으킨 적이 없어. 안정적이고 방어적인 성향이지.”

    에드워드가 말했다.

    그레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셔벗의 명예가 실추됐죠. 비스코티에서 먼저 그들의 공주를 해치고 공주가 낳은 왕자를 반역자로 몰았어요. 셔벗의 필리프 왕이 이를 공격으로 받아들였다면요?”

    “외국에서 일어난 일이 나라 안의 역적들보다 두렵진 않겠지.”

    “나라 안의 역적?”

    “셔벗에서 부강한 건 왕만이 아니야. 다른 영주들도 마찬가지지. 후계자가 없는 왕은 자리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 텐데.”

    “설마.”

    그레이는 보고서를 다시 확인했다. 무기와 식량을 모으고 있는 건 셔벗의 왕이 아니다. 귀족들이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하지만 국경에 군사를 모으고 있는 건요?”

    “명분이 좋잖아. 셔벗을 모욕한 비스코티를 벌하겠다며 군사를 모으는데, 귀족들이 뭐라고 할까? 왕이 지원하라는 명령만 내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겠지.”

    “국경에 다른 귀족의 병력이 없다고요?”

    그레이는 소리 지를 뻔했다.

    “왕의 군대와 용병이 전부야.”

    “정말로…… 이게…….”

    그레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소름이 끼쳤다. 추측이 전부 사실이라면 에드워드는 천재다.

    “그렇다면 셔벗 왕은 왜 조프리 전하를 보내라고 했을까요?”

    그레이는 답을 묻는 학생처럼 질문했다. 자신이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글쎄.”

    에드워드는 보고서를 내려놓더니 무표정하게 말했다.

    “시간이라도 끌고 싶나 보지.”

    에드워드의 태도는 기만적이었다.

    그레이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무섭게 에드워드는 그레이의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그레이도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문밖에 없었다.

    뭐지?

    의아해하는 순간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러 명이었다. 근위병이 방문객을 알렸다.

    “들여보내.”

    에드워드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들어온 사람들은 익숙한 면면이었다. 알렉스 바움쿠헨과 로웰 몽블랑, 이델라 에클레어. 조프리 왕자의 측근들이다.

    그레이는 당황했으나 에드워드는 놀라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뒤에 따라올 사람은…….

    그레이는 무심코 긴장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들어오지 않았고, 문이 닫혔다.

    “전하를 뵙습니다.”

    로웰 몽블랑이 인사했다. 이델라 에클레어가 치맛자락을 올렸고, 알렉스는 입을 닫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가늠하듯 보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