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91화 (191/293)

191.

‘신하들이 왕을 능멸해 왕자를 죽이려 했다.’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의 명분이 되었다. 그는 귀족들의 생각을 원하는 대로 조종했다.

뱀 같은 성정.

재상은 그가 어떤 왕자를 옹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비스코티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와 그의 가문은?

“에드워드 왕자는 신하의 숨통을 풀어 주는 주인이 아니다. 대전의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왕자는 셔벗과 전쟁이라도 하려는 것 같더구나.”

셔벗의 사신은 셔벗 왕의 말을 전했다.

‘비스코티인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를 보낸다면 이야기는 들어 보겠다.’

그 말을 듣고 재상은 크게 안도했다.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속국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항전도 없이 나라를 내어줄 셈인가? 왕자 다음에 저들이 무엇을 원할 것 같아!’

에드워드는 분노했고, 대전에 모인 무리들은 입을 모아 재상을 비난했다. 재상이 무능하거나 왕을 우롱한 자들 중 하나일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상은 나라를 위하는 귀족일 뿐이었다.

셔벗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할 때도. 이후 왕비의 편을 들거나 그녀를 견제할 때도. 그는 비스코티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비스코티에 명분은 없고, 외부의 도움도 받기 힘들다.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었다. 다른 왕국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비스코티가 함락이라도 되어야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고 나설 것이다. 그때라면 늦다!

필리프 왕은 군대를 국경으로 보내고 있었다. 끊임없이, 병력을 쌓아서 보란 듯이 과시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 상비군이라니. 전부 왕의 군대라니. 재상은 셔벗의 국력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비스코티 전역을 털어 병력을 모아도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기껏 셔벗 왕이 기회를 주지 않았는가?

왕자를 내어주고, 그보다 더한 것을 주게 되더라도. 일단 전쟁을 막는 게 먼저 아닌가?

“에드워드 왕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

재상이 중얼거렸다.

그의 기억은 대전으로 돌아갔다. 에드워드 왕자에게 불편한 얼굴로 안겨 있던 조프리 왕자에게로.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의 성격을 모를 것인가?

에드워드의 뱀 같은 성정을 안다면, 지금 몹시 불안할 터였다. 백성들이 아무리 환호해도, 왕성에서 그의 위치는 아슬아슬하지 않은가?

셔벗에 가는 건 조프리 왕자에게도 좋은 일이다. 재상은 스스로를 설득했다.

조프리 왕자가 정말 셔벗 왕을 설득한다면. 전쟁을 막는다면 그는 큰 공을 세우는 셈이었다. 그리고 왕비가 죽은 이곳보다 셔벗이 왕자에게 더 안전할 수도 있지 않나…….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레이가 물었다.

재상의 눈이 반짝였다.

“조프리 왕자와 독대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조프리 왕자는 현재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았다. 궁인들만 왕자궁을 드나들 뿐이었다.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재상은 그의 충실한 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레이는 멍한 머리로 재상의 지시를 생각했다.

조프리 왕자를 이용하려는 거군.

재상은 궁지에 몰려 있었고, 에드워드 왕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프리 왕자를 에드워드 왕자의 대항마로 이용하거나, 혹은…….

자세한 내용이야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건 아버지가 누구에게 손을 뻗느냐였다. 조프리 왕자는 그들이 죽일 뻔한 상대였다. 그런 사람을 다시 이용하겠다고?

따를 수 없다.

아버지는 크래커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레이는 그런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이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리라 예상했으나, 오히려 가슴의 통증은 사라졌다.

머리가 명료해졌다.

날이 밝으면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재상을 만나지 말라고 청할 터였다.

때마침 심부름꾼이 도착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그레이를 부르고 있었다.

날이 늦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모르고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레이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저질러 버린 일을 후회하는 사람.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가 누운 침상을 떠나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지금도 그레이와 같은 가책에 시달리고 있겠지.

조프리 왕자에게 감히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에게 깊은 친밀감을 느끼진 못했다. 에드워드는 그러기엔 너무 괴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에드워드를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깊은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끼며, 그레이는 왕성으로 향했다.

* * *

“그런데 조프리, 뺨에 입 맞춰도 돼?”

“뭐?”

“굿 나잇 키스 대신으로.”

난 귀를 의심했다.

“너 뭐 하는 거야?”

에드워드가 마구 다가오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다들 이런 식인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의 표정이 뚱해졌다.

“이렇게 하는 거 아냐?”

“뭐가?”

우리 대화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네 감정이나, 내 생각에 대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잖아. 아니야?

나 고백 수락한 거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 뭐 그런 거야?

“이렇게 했다던데.”

에드워드는 미심쩍은 듯했다.

“그러니까 누가?”

“부모님?”

에드워드의 부모님이라면, 왕과 로제 부인이다.

왕이 어떻게 부인과 데이트했는지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왕이라도 첫 데이트부터 굿 나잇 키스를 해 달라는 말 같은 건 안 했을 거다!

‘다시 알아보고 와.’라고 말하고 싶지만, 에드워드가 누구에게 그 데이트 사연을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 부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린 에드워드를 끌어안고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를 얘기해 줬을지도 모른다. 그 옆에는 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속이 답답하고 이상했다. 불쾌감도 아니고, 불편함에 가까운 것 같았다.

난 기분을 떨쳐 내려고 했다.

“너 밤에 안 올 거야?”

“대담해, 조프리…….”

뭐라는 거야?

“오늘은 안 돼. 해결할 일이 있어. 좀 바쁠 거야.”

에드워드는 달래듯 말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아쉬워하는 줄 알겠다.

억울해해야 하는 건지 어째야 하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아, 그래.”

“금방 끝내고 돌아갈게.”

에드워드가 손을 잡았다. 덥석 잡는 게 아니라, 내 눈을 보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까랑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목 같은 데가 간지러워지는 것 같다.

“하나 남았어. 그것만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끝나. 넌 안전해질 거야.”

“…….”

“조금만 기다리면 돼.”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맹세하듯 말했다. 내 눈을 보면서.

역시 나랑 관련된 일인가.

“내가 할 일은 없어?”

“있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해 볼 생각이었다.

에드워드가 내 손등을 쓸며 다정하게 말했다.

“붕대를 풀 때까지 침대에서 안 움직이는 건 어때?”

벌주는 건가?

* * *

에드워드는 홀을 나갔다. 그는 자신에게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너는 왜 안 먹어?’

조프리가 물었지만, 음식이 목으로 넘어갈 리 없었다.

에드워드는 정무 회의에서 다른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대하면서 긴장하는 상대는 조프리뿐이었다.

조프리는 불안정하다.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한 걸까?

조프리가 매달리듯 쳐다봐서, 에드워드는 ‘그냥 여기 있을까?’ 묻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 했다.

조프리를 간호하던 시간은 지독했다. 마치 잘못된 생일 선물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프리가 괜찮다고 말하면, 에드워드는 괜찮았다. 조프리에게 말을 걸고,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특유의 표정을 보는 것도 너무 좋아서 견딜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조프리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에드워드는 안도했다. 이제 다른 건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프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속에서 하는 말을 에드워드는 들었다.

엄마. 유연호. 돌아가게 해 줘.

무서워. 못 하겠어.

이젠 싫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고 호의에 둔하고, 스스로를 싫어하는 조프리 비스코티.

에드워드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두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눈꺼풀을 누르고 있었다. 조프리에게 다 괜찮아졌다고 말해 주려고, 그의 측근들을 잡아들였다.

정말이야. 다 괜찮아.

제발.

조프리가 깨어나서 에드워드를 미워해도 된다. 눈을 뜨고 ‘사실 난 다른 세계에서 온 마법사였지. 이제 널 버리고 갈 거야.’라고 말해도 되고, 죽어 버리라고 그에게 쏘아붙여도 된다.

다 거짓말이다.

깨어나서 날 안아 줘.

조프리가 살아났다. 의사는 불가능할 거라고 했는데 의식을 찾았다.

그는 왜 이런 일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을까.

에드워드는 일에 몰두했다. 밤에는 조프리를 간호하고, 날이 밝는 걸 보다가 집무실로 들어갔다.

귀족들의 국무 회의를 지켜보고 하루 종일 몸을 혹사했다.

조프리에 대해 경솔한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반역죄를 물어 즉결 처분 하자 회의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에드워드는 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조프리가 깨어났다.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측근들을 만났다.

에드워드는 집무실에서 그 말을 들었다. 잉크가 서류를 적시는 것도 알지 못했다. 비서가 비명을 지르며 서류를 정리했다. 집무실을 찾은 그레이가 다시 한번 소식을 전했다.

‘만나러 가지 않으실 건가요?’

‘아직 일이 남았어.’

‘조프리 전하는 절 탓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에드워드도 탓하지 않을 거라는 말인가?

둘의 비중이 어떻게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에드워드는 왕비를 미워하는 것 이상으로 조프리를 미워했다. 왕비를 생각하는 시간보다 조프리를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조프리를 더 원망한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문제라면, 에드워드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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