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저렇게 잘라 말할 정도라고?
그가 착각했나? 왕자의 짝사랑인가? 아니면 실연당했나?
실연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거라면 또 로웰은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왕자 전하는…….
로웰이 생각하는 조프리 왕자는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 어떤 권리를 줬던가? 그는 이제 왕자의 방에 원하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다.
상대가 ‘조프리 왕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판단해 보자.
그 사람은 연달아 큰일을 겪었다. 큰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몸도 마음도 약해진 상태.
그리고 로웰은 방을 허락받았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에 최적의 상태가 아닌가?
로웰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얼을 빼놓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물론, 왕자가 로웰의 든든한 모습에 두근두근하는 반응을 보이는 모습은 역시 상상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지 않을까?
로웰은 주먹을 쥐었다. 들뜬 마음이 혈관을 타고 돌아서 아찔했다.
무엇보다 로웰은 왕자의 힘이 되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이.
이델라와 로웰은 몽블랑 상단 건물 앞에서 헤어졌다. 이델라는 시장을 돌며 정보를 모으고, 로웰은 상단 사람들을 만나 볼 것이다.
각자 소문을 수집한 뒤 모일 계획이었다.
이델라는 수도가 처음이었다. 길을 잘 알지 못했으나, 로웰이 시장에서 꽤 유명 인사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몽블랑의 도련님!”
가판을 정리하던 상인이 웃으며 말했다. 로웰이 인사하자, 다른 상인들도 그에게 알은척을 했다.
몽블랑 상단까지 가는 길에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이델라는 물건을 사는 척 몇몇 상인들에게 접근했다. 떠도는 소문이라면 얻어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인들은 어수선한 시기에 외지인과 소문을 나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이델라는 로웰에게 인사했던 과일 가게로 찾아갔다. 상인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몽블랑 도련님의 새 애인이시군요!”
“와, 아니지만요!”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이델라는 웃으며 말했다. 호감 가는 미소에 상인도 웃는 얼굴을 돌려주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몽블랑 도련님을 잘 알지는 못하는데, 그래도 뭐 몇 년을 봐 왔으니까.”
“조프리 전하에 대해서인데요.”
“전하?”
상인은 방어적인 태도로 물러섰다.
“저 같은 사람이 전하에 대해 뭘 안다고…….”
“저, 조프리 전하를 정말 존경해서요. 그런데 여러 가지 일이 있었잖아요. 그동안 전 수도에 없어서 상황을 잘 몰랐거든요.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래요? 전하께서는 이제 괜찮으신 건가요?”
이델라는 일부러 해맑게 물었다. 물정 모르는 여자애를 경계하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었다.
상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야 당연하죠. 경비병들이 나서서 전하께서 무고하다는 사실을 알렸으니까요. 누구였더라, 왕성까지 찾아갔다가 전하를 직접 만난 녀석도 있을 텐데. 많이 마르셨는데 그래도 건강은 괜찮으신 것 같다고 그랬어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경비병들이 직접요? 원래 경비병들이 그런 말도 전하고 그러나요?”
“전하에 대한 소문이야 워낙 많으니까……. 요새는 뭐 이상한 소문도 돌잖아요?”
“이상한 소문?”
이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웰 몽블랑은 몇 년 전부터 시장에 출몰해서 상인들의 인사를 받아 주던 도련님이었다. 시장 상인들은 귀족이지만 친절한 도련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도련님과 친구라는 이 귀족 아가씨도 아주 친절했다.
상인은 뭐든 답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평소라면 귀족 아가씨에게 하지 않을 만한 얘기까지 술술 내뱉었다.
“무슨, 셔벗과의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건 조프리 전하뿐이라나 뭐라나…….”
로웰은 상단의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하인에게 접근했다.
“아버지 계셔?”
“뭐라고요? 누구신데 여기서 아버님을…… 도련님!”
하인은 따분하게 서 있다가 뒤늦게 로웰의 얼굴을 알아봤다.
“계실 리가요! 아니, 도련님은 왜 여기 계세요?”
“아버지가 나 오면 쫓아내래?”
로웰은 미심쩍어졌다. 하인은 로웰의 등장을 상상도 못 했다는 반응이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접촉이 좋게 끝나진 않았지만…… 설마?
“무슨 말씀을! 도련님 보이면 꼭 잡아 두라고 하셨죠!”
하인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로웰을 꽉 잡았다.
“비상! 비상! 막내 도련님 오셨다! 빨리 붙잡아!”
“뭐? 어디?”
“도련님 잡아!”
창구 직원들까지 벌떡 일어났다. 로웰은 하인들 사이에 끼었다. 건물 밖에서 들어오던 하인들까지 영문을 모르고 로웰을 붙잡고 있었다.
“안 도망간다니까!”
“무슨 일이야? 도련님? 세상에, 우리가 퍼뜨린 소문 진짜였어?”
“도련님, 정말 조프리 전하를 보호하며 왕국을 종횡하셨어요?”
하인들이 떠들어 댔다.
“무슨 소문?”
로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목소리를 낮추세요, 도련님! 비밀이라고요!”
“맞아요, 우리가 퍼뜨리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안 되잖아요!”
“무슨 짓을 하는데?”
하인들은 조용히 해 달라고 아우성을 치더니, 로웰에게 은밀하게 사정을 전했다. 조프리 왕자가 복귀하고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상단 수뇌부에서 밀명이 왔다는 것이다.
조프리 왕자의 도피를 도운 건 몽블랑 상단이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라고.
로웰은 입이 벌어졌다.
“그래서 했어?”
“그럼요. 요즘 상단 평판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인들이 뿌듯해했다.
로웰은 기가 막혔다.
이게 누구 생각이지? 첫째 형?
더 기가 막힌 건, 소문이 사실 아주 거짓말도 아니라는 거였다.
“조프리 전하께서 아시면 화내실까요?”
“에이, 그분이 헛소문 가지고 벌하실 분이야?”
“혹시 모르지. 요즘 우리 말고도 전하께 숟가락 얹으려는 애들이 많아서…….”
“그건 또 무슨 얘기야?”
로웰은 어이가 없어서 팔짱도 풀었다.
“목소리 좀 낮춰 주세요, 도련님!”
“맞아요, 들키면 어떡해요?”
“너네가 더 시끄러워…….”
하인들이 다시 수군수군했다.
“아무튼, 우리처럼 소문내러 다니는 무리가 또 있던데요? 뭐랬더라?”
“조프리 전하께서 전쟁을 막아 주실 거라고?”
“그 얘기 더 자세히 해 봐.”
로웰은 목소리를 낮췄다. 자세도 숙였다. 그가 비밀 얘기를 할 태도가 되자, 하인들은 역시 도련님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자신이 아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 * *
왕성에 다녀온 뒤로 그레이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고 느꼈다.
머릿속에 벌레가 들어서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계속 똑같은 생각으로 돌아갔다. 답도 없는 문제가 그를 뒤로 잡아끌고 있었다.
답이 없는 문제?
아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조프리 왕자는 그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감시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레이를 믿지 않으면서 곁에 뒀고, 그를 친구로 받아 주었다.
왕자가 어떤 마음으로 왕성에 돌아갔을지를 생각하면 그레이는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왕자를 따르는 사람들을 두고 그는 혼자 돌아갔다. 외롭고 두려웠을 것이다. 줄곧 그랬을 것이다.
그레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이 뜨겁고 지끈거렸다. 목이 꽉 막힌 느낌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재상이 돌아왔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집사가 그의 겉옷을 받아 가져갔다.
그레이는 재상의 뒤를 따랐다.
“에드워드 전하는 무서운 분이더구나.”
재상이 말했다.
“회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폐하의 측근들이 잡혔어. 내일이면 마차에 묶여 광장을 돌겠더구나.”
“수도 분위기가 괜찮아지겠군요.”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가 아니야.”
재상은 속이 타는 듯 물을 마셨다.
그레이는 멍한 정신을 다잡으려고 했다. 쉽지 않았으나, 일에 집중하는 게 가슴의 통증을 잊기엔 좋았다.
“왕의 측근들 다음은 누구겠느냐? 나를 죄인들과 같이 두더군. 대전의 분위기는…… 에드워드 왕자는 우리 가문을 적으로 돌려도 개의치 않을 거다.”
“그럴 리가요.”
“우리가 그분을 잘못 봤다. 에드워드 왕자는 변덕스럽고 이기적이야. 어려울 때 우리가 베푼 도움 따위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
재상이 탁자를 내리쳤다.
에드워드 왕자가 전장에서 명성을 얻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재상의 조력 덕분이었다. 그를 위해 재상은 조프리 왕자를 내칠 계획에도 가담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에드워드는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것이다.
귀족들 앞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떠올랐다. 형제를 내치려던 손으로 그 형제를 끌어안고 더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누가 보아도 둘은 죽고 못 살 형제였다. 재상은 기가 막히고 두려웠다.
그는 다루기 쉬운 왕에게 익숙했다. 현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고, 약간 변덕스러웠으나 정말 중요한 결정은 대신들을 따랐다.
셔벗의 공주와 결혼하라 했을 때 왕은 회의를 일주일이나 불참할 정도로 지독히 반항했다. 그러나 결국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에드워드 왕자는 달랐다.
그는 왕과 똑같이 변덕스럽고 이기적이었으나 왕보다 교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