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8화 (188/293)
  • 188.

    “기대도 안 합니다. 어제 일어나셨다면서요?”

    “응.”

    “우리나라 의술이 언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답니까? 환자를 깨어난 다음 날부터 일 시키고.”

    바움쿠헨 백작이 또 투덜거렸다. 어른치고 엄청 애 같은 사람이긴 했다.

    “일하러 간 건 아니고. 거기 귀족들은 왜 모여 있었던 거야? 비스코티의 웬만한 귀족은 다 모인 것 같던데. 재판 때문이야?”

    “모르십니까?”

    바움쿠헨 백작은 대답하려다 말고 갑자기 나를 봤다. 옷 밖으로 드러난 붕대는 발목밖에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무릎부터 바지 밑 발목으로 이어지게 붕대를 두껍게 감아 놓으니, 옷으로 가려진 다른 곳도 온통 붕대로 감겨 있는 것 같은 착시 효과가 생겼다.

    백작도 효과에 당한 듯했다.

    “음……. 예. 뭐 그렇습니다.”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아니잖아? 귀족들을 불러 모은 거지?”

    “보셨잖습니까? 약식 재판 치르는 걸요. 이런 중요한 재판에 빠지고 싶은 귀족이 있겠습니까?”

    백작은 뻔뻔하게 나왔다.

    “아무튼 전하께서 무사하신 모습을 뵈었으니 됐습니다. 죄인들은 처벌받고 전하께선 안전해지실 겁니다. 부상 회복에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제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무슨 기회?”

    “전하를 보호할 기회.”

    백작은 예를 표하듯 주먹을 가슴에 댔다. 그는 왕의 기사다. 왕성에서 하기엔 위험한 발언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곳은 내 응접실이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이 나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 알렉스를 돌아봤다.

    “너도 오늘 밤에는 저택으로 돌아와라.”

    “저는 전하의 호위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백작이 나갔다. 알렉스는 묵묵히 의미를 생각하는 태도였다.

    백작의 말은 이상했다. 날 보호할 기회를 달라는 말은, 아직 내가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귀족들은 대전에 왜 모인 걸까?

    재판을 위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재판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뭘까?

    ‘전하, 제발 전쟁을 막아 주세요.’

    셔벗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 *

    도트를 불렀다.

    왕성이 얼어붙은 동안, 내 궁의 궁인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였다고 했다. 삼엄한 감시가 뒤따라서, 하인들은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시종들은 사정이 나았으나 역시 감시받는 처지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왕성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다. 그 외의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전하께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신 다음에는 모두 정신이 없었어요. 한참 뒤에야 수배령이 풀렸다는 걸 알았어요. 저희가 궁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도요…….”

    시종은 면목 없다는 듯 말했다.

    나는 궁인들을 달랬다.

    “괜찮아. 하지만 너희는 이 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잖아. 조금이라도 아는 걸 말하면 돼. 귀족들은 언제 입궁했어?”

    “조금 됐어요. 전하께서 저희 곁으로 돌아오시고 얼마 뒤? 그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봤어요. 새로운 마차들이 들어오는 걸.”

    궁인들이 진술했다. 역시 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걸까?

    나라가 흉흉할 때 영지를 떠나고자 하는 귀족은 없다. 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그들은 움직였을 것이다.

    자의는 아니었겠지. 왕, 혹은 왕자가 불렀기 때문에.

    귀족들을 모은 사람은 왕 아니면 에드워드다.

    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다.

    난 한숨을 쉬었다. 확인하고 싶은 건 하나 더 있었다.

    “왕비님은?”

    궁인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다는 건 알아. 왕비님은 어디에 계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다. 가슴이 둔한 돌 같은 게 되어 버리는 기분이다. 주먹으로 때려도 단순한 울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내가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궁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하나둘씩 울기 시작했다.

    난 당황해서 도트를 돌아봤다. 그도 눈이 붉었다.

    “왜. 어떻게 되셨는데? 궁에 안 계셔? 혹시…….”

    최악의 상황이 상상됐다. 이가 아팠다. 너무 강하게 악물고 있었다.

    “아니에요, 전하! 왕비님은 궁에 계세요. 왕비님의 자리에.”

    “아.”

    난 안도했다. 궁인들은 여전히 훌쩍이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죄송해요…….”

    “뭐가?”

    왕비님은 내 궁을 종종 찾았지만 궁인들과는 접점이 없었다.

    로제 부인의 일이 있고 난 뒤, 난 궁인들을 대부분 해고했다. 남은 궁인들과 새로 들어온 궁인들은 왕비님과 접점이 없었다.

    왕비님은 새로 들어온 궁인들을 왕비궁으로 불러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돈주머니를 주고 내 행적을 듣지도 않았고, 내게 왜 기존의 궁인들을 해고했냐고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울 정도로 왕비님께 애정이 있을 리 없는데.

    “전하께서 슬퍼하시잖아요.”

    누군가 말했다.

    그건 좋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해석이다.

    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멍하고 죄책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조프리’가 내게 바란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 대신 어마마마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줄 거야?’

    ‘그렇다면, 내 몸을 사용해도 좋아.’

    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조프리’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왕비궁의 경계는 어때? 내가 들어갈 수 있어?”

    궁인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에드워드 전하께 다녀올까요?”

    도트가 물었다.

    “아니야. 내가 물어볼게.”

    대면해야 하는 문제들.

    아직 문제들이 남아 있다.

    * * *

    난 에드워드가 밤이 되어서야 올 거라고 생각했다. 에드워드 본인보다 먼저 편지가 도착했다.

    -같이 저녁 먹을래?

    단정한 글씨로 저녁 초대가 적혀 있었다. 내가 에드워드의 필기를 본 적 있던가? 길쭉하고 찍어 낸 것 같은 필체였다.

    난 ‘좋아.’라고 대답해서 심부름꾼에게 들려 보냈다.

    에드워드가 식사하자고 한 곳은 내 궁의 홀이었다. 보통 초대는 자기가 있는 곳으로 하지 않나? 오래 걸을 필요가 없다는 건 좋았다. 에드워드는 일부러 요리사까지 보내 만찬을 준비하게 했다.

    시종이 부르는 대로 시간 맞춰 왔는데,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난 큰 초가 켜진 식탁에 앉았다. 회의가 늦어지는 걸까?

    홀에서 식사한 적은 거의 없었다. 열한 살의 조프리로 깨어났을 때 도트가 버릇을 잘못 들인 탓이다.

    침대에 앉아서 다른 사람이 가져온 식사를 한 달쯤 받아먹으면, 굳이 식당까지 가서 식사할 마음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긴 테이블 앞에 앉아 있으려니 예전 일이 떠올랐다.

    왕은 가끔 본성의 홀로 우리를 불러 식사하곤 했다. 나나 왕비님이 보고 싶었던 건 아닐 테니, 아마 에드워드를 보기 위해서였겠지.

    그 자리엔 항상 왕비님도 함께였다.

    초대해 놓고 지각이라니,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에드워드가 들어왔다. 난 눈을 의심했다. 그는 거대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이었다. 화사한 게 에드워드랑 잘 어울리긴 했다. 그렇긴 한데…….

    뭐 하는 짓일까?

    에드워드가 꽃다발을 살짝 내렸다. 그가 입은 옷이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잘 차려입었다.

    다시 보니 머리를 올려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게 잘생기긴 했다. 내 옷을 내려다봤다. 잠옷은 아니지만 활동복이었다.

    “우리 어디 나가?”

    “아니. 나가고 싶어?”

    에드워드가 내 발을 쳐다봤다. 흰 붕대는 어두운 곳에서 더 눈에 띄었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만 아니라면 가 볼까. 마차 준비하라고 해?”

    에드워드가 관대하게 물었다.

    문틈으로 요리사가 야심차게 준비한 음식 냄새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코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같이 냄새를 맡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요리사 울걸. ……너 어디 다녀왔어?”

    예를 들어 무도회장 같은 데.

    대낮에 열리는 무도회가 있을 리 없지만, 상상 가는 장소가 그런 곳밖에 없었다.

    “정원에 들르긴 했어.”

    “왜?”

    에드워드가 장미 다발을 내밀며 웃었다.

    “받아. 선물이야.”

    마침 요리사와 궁인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카트를 끌고 오던 궁인이 멈칫해서, 줄줄이 추돌 사고가 날 뻔했다. 요리사가 꾸중하려다가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카트가 덜컥거렸다.

    누가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난 일단 꽃다발을 받아서 도트에게 줬다. 내가 받아들자 에드워드는 활짝 웃었다가, 꽃다발이 도트에게 가자 무표정해졌다. 낙담한 듯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방에 장식해 둬.”

    에드워드의 얼굴에 다시 표정이 생겼다.

    도트가 그를 힐끔 보며 나갔다.

    알렉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수도의 바움쿠헨 저택으로 백작을 만나러 갔다.

    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나와 에드워드뿐이었다.

    난 그가 꽃다발을 주고 자기 자리로 갈 줄 알았다. 여기가 내 궁이긴 하지만, 식사 예절에 따르면 주최 측을 상석에 앉힌다.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요리사와 그를 도울 궁인들을 보낸 건 에드워드였다. 상석은 에드워드에게 줘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에드워드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카트를 끌고 테이블을 돌던 궁인들이 안 보는 척 우리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음식이 한데 놓이고 궁인들이 일제히 빠져나갔다. 요리사가 고개를 숙이고 마지막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에드워드가 물었다.

    “조프리, 먹여 줘도 돼?”

    “뭐?”

    왜?

    ……나 손은 안 다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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