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7화 (187/293)
  • 187.

    분위기가 찜찜했다.

    에드워드는 내 주변인에게 악의 축 취급을 받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가 적대적인 입장이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편들 말도 없었다.

    대신 난 이델라에게 물었다.

    “나한테 화나진 않았어?”

    다들 나를 보면 울거나 화내거나 했기 때문에 물어본 건데,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델라?”

    어색해져서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난 당황해서 다가갔다.

    “제가 전하께 화낼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어리광을 부리진 않아요.”

    차라리 화냈으면 좋겠다. 이델라는 살짝 웃기까지 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전하께서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계시는지 뻔히 알면서, 도움도 안 되는 저를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는걸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전하께서도 저를 동행시키는 걸 고려하셨겠죠.”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랬겠죠’가 아니라 ‘그러실 거죠?’라고 묻는 듯해서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음에 큰일이 닥쳤을 때, 전하께 제가 도움이 된다면. 전하는 저를 부르실 거예요.”

    “응.”

    “그렇죠? 그럼 괜찮아요.”

    이델라가 활짝 웃었다. 저렇게 착해서 어떡할까? 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제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옆에서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이델라를 달래긴 충분한 대답이었는데 알렉스는 달리 받아들인 듯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의사가 찾아왔다고 병사가 알렸다. 어제 한번 상태를 확인했는데 또?

    의사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께선 환자신데요.”

    “잠깐 얘기하고 있었어.”

    “중요한 일인가요?”

    “응.”

    로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전하. 이델라 양이 수도에 있다는 걸 알고 인사드리러 온 것뿐이니까요. 이델라 양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전하께선 쉬고 계세요.”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아니에요, 전하. 저 정말로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전하께서 쉬세요!”

    이델라가 다짐하듯 말했다.

    이델라는 더 열심히 할 필요 없는데, 내가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었나?

    두 사람이 나가고 의사가 둥근 의자에 앉았다. 그는 왕의 주치의였다. 이름이 라임 남작인가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내 열을 재더니 중얼거렸다.

    “이럴 게 아닐 텐데. 금방 떨어질 미열이었는데. 열이 올랐습니다, 전하. 어제오늘 무리하셨습니까?”

    “아니.”

    거의 침실에만 있었다. 그런데 도트가 헉 소리를 냈다.

    “왕자님께서 신경 쓰실 걸 알았어야 했는데. 궁인들이며 백성들이 왕자님을 걱정하는 소리가 어디서든 들려오니까요. 왕자님이 무리하셔서 다 만나 주셨거든요.”

    “저런. 의식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요. 침대에서 일어나셨습니까?”

    “네, 그랬어요!”

    “저런.”

    “오늘도 대전 회의에 참석하셨지 뭐예요.”

    “어이구야.”

    의사가 안타까워했다. 둘은 쿵짝이 잘 맞았다. 몸이 좀 무겁고 답답할 뿐이었는데 난 순식간에 엄청난 환자가 돼서 침대에 눕혀졌다.

    도트는 물수건을 가지러 나갔다. 의사는 도구를 정리하고 나가려고 했다.

    “하나 물어도 돼?”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폐하의 건강은 어떠셔? 그대가 주치의잖아.”

    의사는 가방을 잠그려다 헛손질했다.

    “폐하를 진찰하는 건 다른 의사입니다.”

    “누구?”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누가 알까?”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의사는 겁먹은 듯했다. 그러나 알렉스가 문을 가려서 도망치지도 못했다.

    난 알렉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아무것도 모른다. 보내 줘도 될 것이다.

    의사가 재빨리 나가는 것과 동시에 도트가 들어왔다. 그는 그릇과 수건을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마실 물을 가져올게요, 왕자님.” 그러더니 그가 알렉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여기 서 계세요? 지금에야 말씀드리지만, 알렉스 경도 이제 왕성에 들어온 분이니까요. 일종의 궁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제가 선배라는 점을 명심해 주셔야 해요.”

    “예, 도트 님.”

    “왕자님은 쉽게 무리하시는 분이니까요. 우리가 곁에서 왕자님이 편하게 지내시게 도와 드려야 해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물수건을 짜 주세요!”

    “예, 도트 님.”

    알렉스는 착실하게 대답하고 물수건을 짰다. 거대한 손이 젖은 수건을 비틀자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도트는 칭찬하고 나갔다.

    방엔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돌았다.

    “전하, 폐하를 진찰하는 의사를 알아보면 되겠습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그렇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데.

    “왕성에 아는 사람 있어?”

    “아니요, 전하.”

    “소문 듣고 다니는 거 잘해?”

    “아닙니다.”

    어떻게 알아보려고?

    알렉스는 물수건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있었다. 초조한 듯했다.

    “전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전하를 모시고 왕성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능력자였다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아니었지만.

    “죄책감 갖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난 알렉스의 손을 잡고 손수건에서 떼어 냈다. 손수건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찢어지지 않은 게 용했다.

    “이번 일은 내 탓이야. 너도 이델라도, 부족한 점은 없어. 죄책감 갖지 마. 그래서 편해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잖아. 어떻게 더 강해지게?”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알렉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해이해져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와 다들 제가 자격이 있는 것처럼 치켜세워 주어서. 전하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곁에 두어 주셔서…… 제 목표가 이루어진 것 같았습니다.”

    “목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건…….”

    그의 눈이 떨렸다.

    “더 강해지겠습니다, 전하. 다시는, 제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전하를 위험에 두지 않을 겁니다.”

    알렉스가 말을 맺었다. 도대체 무슨 목표인지 궁금했지만, 알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은혜를 갚는 종류겠지.

    사실 난 해 준 것도 없지만.

    착한 애다. 난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응원할게.”

    도트가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 먹고 침대에 기대 있으려니 잠이 왔다. 잠깐 자고 일어났을 땐 또 다른 손님이 와 있었다.

    “왕자님이 주무신다는 얘길 듣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렉스 경이 손님맞이를 대신하고는 있는데요…….”

    도트가 말했다.

    알렉스가 상대할 만한 손님.

    난 간단히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향했다. 문 너머로도 소란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가 수도에 왔는데 얼굴 한번 안 보인 게 잘한 일이라는 거냐?”

    “스승님은 제가 없어도 무사하시지 않습니까?”

    “이래서 아들 키워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알렉스를 괴롭히고 있던 장신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백작.”

    바움쿠헨 백작이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번에야말로 혼날 것 같다.

    백작은 화부터 내지는 않았다.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아니, 그렇진 않아.”

    “다행이군요.”

    그는 다탁을 빙 둘러 다가오더니 팔을 벌렸다. 그가 스스럼없이 끌어안아서, 난 대응하지 못했다. 손만 어정쩡하게 들고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대전까진 왜 나오신 겁니까? 절 보러 오셨습니까?”

    화내려던 게 아닌가?

    “그땐 몰랐지만, 백작이 왔다는 걸 알았다면 그대를 보러 갔을 거야.”

    백작에겐 미안했다. 다른 사람들은 바움쿠헨 성에 두고 왔을 뿐이지만, 백작은 의도를 갖고 속였다. 그가 내게 말과 기사를 내어줬다. 그는 내 소식을 듣고 자신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이제 전하 말씀은 안 믿습니다. 듣기 좋은 말씀 마시고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나 알려 주시죠.”

    “언제 내 주치의로 취업했어?”

    “농담이 나오십니까? 입은 괜찮으신 모양이군요.”

    그는 혀를 차더니 나를 놓아줬다. 안기고 놓일 때마다 배가 땅겼지만 내색은 안 했다.

    “왜 그렇게 눈치를 보십니까? 생전 안 그러시던 분이.”

    그는 오히려 그게 더 속상한 듯했다.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왕성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양하지 않았다. 궁인들도 맡은 구역이 있어 다 알 만한 사람들만 마주쳤고,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난 연회도 잘 참석하지 않았으니 인간관계가 좁은 게 당연했다.

    그중에서 어른이라고 느꼈던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바움쿠헨 백작은 사실 좋은 어른이었다. 난 어느 정도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대가 화낼 줄 알았는데.”

    “제가 전하를요? 어떻게 말입니까? 전하께서 뭐든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리석게 전하께만 모든 짐을 맡겨 버린 제가 아니라요? 그런다고 다음부터 전하께서 ‘목숨이 위험할 일 같으니 그대가 먼저 가라’고 제게 명령하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인간쓰레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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