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눈을 떴을 땐 대낮이었다.
품이 허전했다. 에드워드가 없었다. 진짜 자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멀쩡히 잘 자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쟁반에 물 잔이 있었다. 표면에 맺혀 흐른 물방울이 쟁반 표면에 흥건했다. 도트가 아침에 깨우러 들어왔다가 물만 두고 나간 듯했다.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혀로 입술을 핥아 봤다.
뭔가 이렇게 했던 것 같은데. 에드워드는 그런 걸 어디서 배웠지?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겠지만, 에드워드가 하는 건 ‘그런’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내가 하려고 한다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밖이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햇살을 받으며 창가로 향했다. 손차양을 만들어 밖을 내다봐도 소란의 근원은 보이지 않았다. 왕성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줄을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도트가 들어왔다.
“왕자님, 일어나셨군요!”
“밖에 무슨 일이야?”
“앗, 어찌 된 일인지 왕자님께서 일어나셨단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진 모양이에요. 새벽부터 다들 왕자님을 뵙겠다, 왕자님께 쾌유 기원 선물이라도 전하겠다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병사들도 고생이에요.”
도트는 투덜거리는 듯했으나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뿌듯해하는 것 같은데.
“백성들이 성문 앞에 모여 있다고?”
“예. 편지와 선물만 받고 해산시키고 있으니 곧 조용해질 거예요. 왕자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식사부터 하시겠어요? 소화 잘 되는 수프와 아주 부드럽게 삶아서 씹을 필요 없는 감자와 흰 빵이 준비되어 있어요.”
신경을 안 쓸 수 있나?
“새벽부터면 몇 시간을 서 있는 거지?”
“앗. 모두가 새벽부터 서 있었던 건 아니고요, 부랴부랴 근처에서 출발해서 외성을 통과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더 모이고 있다고?”
“전하. 선물을 더 보관할 장소가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예전에 전하의 기부 물품, 아니 ‘사치품’을 보관하는 데 쓰던 창고들도 가득 찼는데요.”
시종이 들어와서 물었다. 그 뒤로 병사들과 궁인들이 들어와 문제를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성문에 사람들이 너무 모여들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다 돌려보내고 전하께 말씀을 올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전하를 걱정해서 모였다는 사람들을 몽둥이찜질해서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병사가 말했다.
“내가 갈게.”
“예?”
“날 보려고 찾아온 사람들 아니야?”
“그렇지만…… 전하께서 직접?”
나를 걱정해서 와 준 사람들이라는 것 같다. 에드워드가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겠다. 조프리는 무죄 방면 됐을 뿐만 아니라 꽤 걱정도 사고 있는 것 같다.
이 나라 사람들이 원래 왕족을 좋아하긴 했다. 반역자로 쫓기느라 고생했다고 여겨 주는 걸까?
내가 12첩 반상을 먹는 동안 알렉스가 들어왔다. 도트가 불러온 듯했다.
“성문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알렉스가 등을 보이고 꿇어앉았다. 또 업히라고?
“알렉스 경. 더 빨리 오셨어야죠. 왕자님께서 또 경 없이 외출하실 뻔했잖아요.”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저를 부르시기 전에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저는 아둔하고 행동이 빠르지 않은 인간입니다.”
아니, 뭘 그렇게까지…….
“전하께 멀리 떨어진 방을 배정받은 채로는 필요한 순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전처럼 침실에서 전하를 지키고자 합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난 상관없는데, 라고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러면 에드워드가 들어오기 힘들어진다.
걔는 왜 밤에 몰래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알렉스가 침실에 있으면 자객인 줄 알고 베겠지.
“알렉스 경이라면 믿을 만한 분이니까요, 전하.”
도트가 알렉스를 지지했다. 전에는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다니 남색이 어쩌고 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로웰과도 사이가 좋아졌다. 함께 쫓긴 여정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도움이 된 듯했다.
“됐어. 병사들이 지키고 있잖아.”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감격했다.
알렉스는 낙담했으나, 그는 어제 도트의 옆 방에서 잠들었다. 멀리 떨어졌느니 할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백성들이 조용해지는 이유를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 무슨 전하께서 개나 소나 뵐 수 있는 분인 줄 알고? 그분이 얼마나 바쁜 분인지 알아?”
“이분들이야?”
“전하?”
경비병이 깜짝 놀라 불렀다.
“왕자 전하!”
“조프리 왕자 전하? 전하시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이내 팔을 뻗었다. 수를 셀 수 없는 인파가 나를 쳐다보고 일제히 손을 뻗는 건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가까운 손을 잡고 악수하자 손의 주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이게 아닌가?
“전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셨어.”
“세상에. 씻지 말고 가보로 간직해야…….”
“잘라서 팔면 경매가가…….”
저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너무 몰려서 앞줄에 있던 사람이 넘어질 뻔했다. 그들을 통제하느라 경비병들이 식은땀을 뺐다. 사람들은 한 명씩 내 앞을 지나가며 가져온 선물이나 편지를 내려놓았다.
‘선물이 많다’는 건 말 그대로였다. 성벽을 따라 선물이 쌓여 있었다. 대단한 물건은 없었고 꽃다발이나 과일 바구니 같은, 평범한 문병 선물이 대부분이었다. 수상쩍으나 민간에는 신앙처럼 퍼져 있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도 눈에 익은 용기에 담겨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왕비님이 저런 거 좋아하셨는데. 가슴이 쿡 쑤셨지만, 내색하지 않고 백성들의 인사를 받았다.
내가 깨어났고 그들의 앞에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기뻐해 줘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 두 배는 살았을 법한 농부는 내게 웬 약초를 선물하며 부끄러워했다.
“전하께서 이런 것을 드실지…….”
“물론이야. 고마워.”
“전하께서 깨어나셨으니 전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상점 직원이 물었다. 그는 예전에 내게 바가지를 씌운 적 있는 타고난 장사꾼이었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물어서 난 대답했다.
“무슨 전쟁?”
“셔벗과의 전쟁이요! 셔벗의 왕이 전하를 셔벗으로 보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대요. 전하, 제발 전쟁을 막아 주세요. 전 징집되기 싫어요!”
난 도트를 돌아봤다. 그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도트도 모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할게.”
상점 직원에게 약속했다. 그는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 내게 원기 보충제를 선물한 뒤 떠났다.
역시 에드워드를 봐야겠다. 괘씸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사람을 깨우지도 않고 사라지더라니,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전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일을 겪어도 아무 생각 없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살아남는 거였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기대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닥친 일을 해냈을 뿐이고 내가 조프리 왕자로서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느낌은 없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라며 우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정말 왕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꽤 사랑받는 왕자였던 것 같다.
왜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걸까?
이해할 수 없지만, 신기할 정도로 안정감이 들었다.
난 이곳에 있어도 된다.
역시 에드워드를 만나러 가자.
그가 밤에 찾아오길 기다릴까 했지만, 이건 정무였다. 밤의 침실은 정무를 논하기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원래 궁한 쪽이 찾아가는 법이다.
* * *
문 너머로 언성 높여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해서 병사를 쳐다보자,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왕의 대전이다. 그곳의 주인이 없으니 시끄러운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숨을 삼켰다. 폐가 뻐근했다.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때 난 거의 제 발로 걸어오지 못했는데, 어쨌든 지금은 내 의지로 찾아왔다.
에드워드가 있는 한 내가 이곳에서 다쳐서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병사들이 문을 열었다. 난 안으로 입장했다. 소리 높여 누군가를 질책하던 자들이 입을 다물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봤다.
난 의외의 구도에 당황했다. 내가 생각한 그림은 적어도 이렇지는 않았다.
재상의 곁에는 계급이 낮은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재상이 선을 그은 듯 일정 거리 이상 가깝진 않았다.
그 귀족들의 낯이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왕의 사냥을 따라다니던 기사 작위를 가진 아첨꾼들이었다. 왕의 사냥 친구들.
재상과 왕의 친구들을, 그 반대편에 선 귀족들이 질책하는 모양새였다. 그런데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도 감히 재상을 몰아붙일 정도로 대단한 귀족이 아니었다. 재상은 창백해진 얼굴로 모욕을 감내하고 있었다.
나는 재상 반대편에서 바움쿠헨 백작을 발견했다.
그는 얼어붙은 듯 나를 쳐다봤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눈짓으로 인사했으나 백작은 무서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화난 것 같다.
에드워드는 단상 위에 서 있었다. 옥좌에 앉지는 않았으나 팔을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왕관을 들고 있었는데, 설전에 집중하지 않고 가지고 노는 용도인 듯했다.
그 방만한 자세를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놀라운데,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에드워드가 왕관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단상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