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1화 (181/293)
  • 181.

    ‘알렉스 경, 위용이 대단하셨죠.’

    ‘소문이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포획할 때도 집채만 한 호랑이를 사냥하는 느낌이더군요!’

    ‘예? 고문? 설마요! 알렉스 경 같은 기사를 감히 누가 고문하겠습니까?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모습은 기사의 귀감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신나서 얘기했다. 알렉스는 감옥에 잡혀갈 만한 대활약을 한 모양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병사들과 17대 1로 싸웠는데, 열일곱 명의 병사들을 전부 때려눕혔다는 듯했다.

    근위 기사들이 알렉스를 그물로 포획해 감옥으로 끌고 갔다. 하루 뒤에 풀어 줬으나 알렉스는 다시 날뛰었다. 이번에는 상대한 기사들이 다쳤고, 에드워드도 선처를 베풀지 않았다.

    알렉스가 지금까지 갇혀 있는 연유였다.

    그가 감옥에서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병사들의 반응이 달랐을 테니까.

    그러나 극진히 대접받고 있다 해도 장소가 감옥이었다. 며칠 경험해 봤을 뿐이지만, 사람이 지내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지하 감옥은 빛도 안 들고 먼지도 많다.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은 큰일 날 것이다.

    “내가 가면 풀어 줄까?”

    “물론입니다, 전하.”

    침실을 지키던 병사들이 대답했다. 뭐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대답이었다.

    난 발을 바닥에 딛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온몸의 근육이 물렁물렁하게 느껴지는 건 오래 누워 있어서인 듯했다.

    허리는 몸을 지지하는 것 같지 않았고 팔다리도 어색했다. 인형의 허리를 잡고 움직이면 휘적휘적 흔들리는 것처럼 그저 내 몸에 붙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도트의 도움을 받아 슬슬 움직여 보니, 단단히 고정한 발목은 조금 불편했지만 걸을 만했다. 숨쉬기 힘든 건 부상 때문이 아니라 몸을 죄는 붕대 때문인 듯했다.

    검이 나를 꿰뚫었다고 느꼈는데.

    이만하면 멀쩡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혼자 걸어 보려고 하자 도트가 비명을 질렀다.

    “왕자님은 이제 막 일어나신 분이라고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도트는 어쩌면 내 몸을 그렇게 험하게 다룰 수 있냐는 듯이 눈물을 글썽였다. 지은 죄가 있는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난 도트와 병사 여덟 명을 달고 북쪽 탑으로 향했다. 탑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를 보고 당황했다.

    “알렉스는 어디 있어?”

    당황할 만한 모습이긴 했다. 난 병사 등에 업혀 있었다.

    내가 외출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도트에게 업히거나 병사의 등을 빌리거나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도트가 슬퍼했을 것이다.

    “저희를 벌해 주십시오, 전하!”

    “벌해 주십시오!”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낮춰서, 그들이 나를 대전으로 끌고 간 그 병사들이라는 걸 알았다.

    “일어나. 알렉스는 어디야? 두 번 물어야 해?”

    “알렉스 경은 위층에 있습니다.”

    “지하가 아니네.”

    병사들이 다시 엎드렸다.

    왜 저렇게 겁을 먹지? 돌아보니 도트가 병사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됐어. 명령에 따른 거잖아. 엎드려 있지 말고 안내해.”

    “예, 예, 전하.”

    벽에 매달린 초가 너울지며 흔들렸다. 계단을 올라가 알렉스가 갇힌 층에 도달했다.

    계단이 너무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를 업은 병사의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나도 내려가고 싶었지만, 도트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혼자 가는 건 계단 내려갈 때 시도해 볼까…….

    간수가 감옥 창살로 등을 기울였다.

    “이곳입니다, 전하. 알렉스 경. 전하께서 찾아오셨…….”

    창살 사이에서 손이 쑥 빠져나오더니 간수가 감옥으로 끌려갔다. 깡 소리가 울렸다. 근육질 팔이 간수의 목을 죄었다. 다른 손은 간수의 품을 파고들어 열쇠 뭉치를 빼냈다. 자물쇠가 풀렸다.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창을 겨눴다.

    “알렉?”

    “……전하?”

    자물쇠가 바닥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이어 열쇠 뭉치가 떨어졌다. 놀라서 열쇠를 놓친 알렉스가 창살 사이로 나를 바라봤다.

    “건강해 보이네.”

    알렉스는 어색한 몸짓으로 눈을 비비더니 잠금장치가 풀린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팔목과 발목을 구속한 수갑이 보였다. 움직임이 이상하다 싶더라니.

    “다리를 다치신 겁니까? 걷지도 못할 정도로?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전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렉스가 흐느꼈다. 난 서둘러 병사 등에서 내려왔다. 알렉스의 팔을 잡았지만, 그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나 봐. 멀쩡하잖아. 안 다쳤어. 방금은 도트가 너무 걱정해서 도움을 받은 거야. 너야말로 괜찮아?”

    “죽여 주십시오.”

    “아니, 괜찮으냐고.”

    “예, 전하. 주인을 잃은 기사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지 멀쩡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무사하심을 확인했으니 이제 벌을 받겠습니다.”

    알렉스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내게 고정됐다. 그의 말은 전부 진심일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지, 사지를 잘라 달라는 건지 뭔지 모르겠다.

    “알렉, 지금 밖은 새벽이거든?”

    “예. 전하.”

    “난 굉장히 피곤해.”

    “예.”

    “침실까지 부축해 줄래?”

    “예, 전하.”

    “앗. 조심히 드세요!”

    알렉스는 자책하던 것도 잊고 나를 들어 올렸다. 병사와는 안정감이 달랐다. 그는 숨소리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가 감옥을 떠날 때까지 정말로 가로막는 사람이 없었다.

    순식간에 침실에 도착했다. 도트가 대야에 물을 받아 와 내 발을 씻겼고 알렉스는 겉옷을 벗겼다.

    자라고 보낸 로웰이 옆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런, 알렉스 경을 데려오셨네요.”

    “저자에게 전하의 옆방을 주셨습니까?”

    알렉스는 도트에게 물었다.

    “행실이 방자하긴 해도 왕자님께 가진 충성심은 진실한 것 같아서요.”

    “그럼요, 그럼요.”

    셋이 아무 말이나 하는데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 하품을 참으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병사들이랑은 왜 싸웠어?”

    “왕을 처단하려는 걸 막기에 앞에서 치웠습니다.”

    “뭐? 왜?”

    “왕이 없으면 전하께서 괴로우실 일도 없을 듯하여…….”

    “일리 있는 의견이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서야 되겠어요? 알렉스 경은 전하의 측근으로서 자각이 부족해요.”

    “죄송합니다.”

    도트가 알렉스를 혼냈다.

    잠이 달아났다. 알렉스는 그렇다 치고, 도트는 뭘 잘못 먹은 걸까? 나보다 궁에 익숙한 사람이 이 대화에서 불경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상황을 전혀 모르겠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멍청해서 그렇다고. 애초에 폐하께서 살아 계시긴 한 건지도 알 수 없는데.”

    로웰이 하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전하께선 모르시죠……. 말씀드려도 되나요? 소문에 불과한 일이라서요.”

    “말해 봐.”

    “폐하께서 이미 돌아가셨다는 말이 있어요. 폐하의 궁에서 나온 소문이라 신빙성이 높죠. 무엇보다 폐하의 주치의가 한시도 전하의 궁을 떠나지 않았으니까요. 폐하께서 정말 편찮으시다면, 누구보다 그 곁을 지켜야 할 사람이 주치의 아닌가요?”

    불온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발표한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폐하를 마지막으로 뵌 사람이 누구지?”

    “모르겠어요, 왕자님. 아무도 모를 거예요.”

    도트가 대답했다.

    난 에드워드가 왕을 밀치는 모습을 봤다. 그마저도 제대로 본 게 아니다. 밀쳤다는 건 순간의 인상이었다.

    해골같이 마른 왕이 쓰러졌고…… 그 뒤는 아무도 모른다.

    * * *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 잠 깨는 차를 마시고 침대에서 뒤척이며 눈을 뜨고 있었다.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고단했다. 감기려는 눈꺼풀을 못 움직이게 버티는 것도 일이었다.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간지러운 감촉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그건 마르고 부드러운 데다 사람의 체온만큼의 온기를 띠고 있었다.

    입술이었다. 거스러미가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고, 체온은 조금 낮았다.

    그가 물러서는 게 느껴졌다.

    “어디 가?”

    난 눈을 떴다. 금발의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건 순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에드워드의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뭐 하는 짓일까?

    “언제 깼어?”

    “너 들어올 때부터.”

    손이 움찔 움직였다. 에드워드는 멀어지려는 듯했다.

    “거짓말이야.”

    “…….”

    “갈 거야? 또 도망치려고?”

    “아니.”

    “그럼? 기절시키게?”

    “그런 짓은 안 해. 이제 못 해.”

    에드워드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목소리에 강제로 집중하게 되는 게 불편했다.

    “그럼 손 떼.”

    그는 말을 잘 들었다.

    에드워드가 보였다. 그는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주사를 기다리는 아이. 에드워드는 고통이 찾아올 걸 알고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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