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80화 (180/293)

180.

“만약 저희가 잘못되면, 전하께서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로웰은 잘못을 고백하듯 말했다. 도트가 조용했다. 평소라면 불경하다고 나섰을 텐데.

“제가 바움쿠헨 백작령을 집결지로 잡지 않았다면, 외국으로 나갈 배편을 찾아 전하를 모셨다면. 전하께서는 무사하셨을지도 몰라요. 제가 상단에 영향을 더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상단을 통해 전하를 모실 수 있었겠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전하를 지킬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전하께선 원하지 않으셨겠죠.”

“…….”

“제가 로웰 몽블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적어도 왕성에 줄이 닿는 사람이었다면 전하께서 다른 선택을 하시도록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전하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시는 동안…….”

로웰이 얼굴을 문질렀다.

“바꿀 수도 없는 과거를 생각했어요. 제가 전하를 지켰어야 했는데. 전하께 보호받는 게 아니라. 전하를 모신다는 사람이…….”

“로웰. 네가 날 보호했잖아.”

“아니요.”

난 로웰을 가로막았다.

“왕성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네가 도왔어. 목숨을 걸었잖아.”

반역자인 조프리를 구해 내기 위해서 로웰과 도트는 목숨과 명예를 걸었다.

아니. 아니다. 조프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난 그들을 배신한 셈이었다. 그러나 로웰은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책하고 있었다.

“미안해. 걱정했지?”

“걱정이라고요?”

로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눈이 붉어지지도 않았는데 그가 곧 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누운 채로는 손이 닿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허리부터 비명을 질렀다.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 괴롭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괴롭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요! 전하께서는 정말, 자기 자신을 뭘로 생각하세요?”

기어코 로웰은 화를 냈다. 그가 나를 쏘아봐서 속이 간지러워졌다.

뭐라고 할까.

나 되게 사랑받고 있지 않나?

예전이었다면 뭐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난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나 자신을 너무 소중하게 여겨서는 아니었다.

“울지 마. 앞으로는 내 목숨을 귀하게 여길 테니까…….”

도트는 이미 훌쩍이고 있었다.

“약속하셨어요, 왕자님.”

“응.”

“왕자님이 잘못되셨다면 전 뒤를 따랐을 거예요.”

“아니, 그러진 말고…….”

“왕자님이 만약 병에 걸리시더라도, 나이 들어 돌아가셔도, 제가 따라가서 왕자님을 모실 거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돼요.”

필요 없어…….

그러나 이번에는 로웰이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몹시 곤란했다. 이 둘이 언제부터 화해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르겠다.

에드워드가 내 혐의를 벗겨 줬다고.

나는 안전하다고.

궁인들이 의사를 모셔 왔다. 그러느라 문을 열고 있는데, 나를 보고 눈물짓는 궁인이 많았다.

도트가 그들과 식사를 준비해서 가져왔다. 의사는 내 체온을 재고 맥박을 확인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뭔가 허전하다고 느낀 건 도트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뒤였다.

“알렉스는 어디 있어?”

도트가 식기를 놓다 말고 멈칫했다.

뭐지?

로웰이 대신 대답했다.

“감옥에요.”

“뭐? 왜?”

“멍청해서…….”

뭐?

* * *

문밖에는 열 명의 병사가 있었다. 조프리는 과보호 받는 왕자였지만 문 앞에 병사를 줄지어 세워 놓는 일은 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궁인들을 도와 트레이를 안에 들여놓았다. 행동은 친절했으나, 그 숫자 때문에 감시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혐의는 풀렸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나 나가면 안 돼?”

병사에게 묻자 그는 놀라서 부정했다.

“아닙니다, 전하. 외출하고 싶으십니까? 어디로 모실까요?”

모신다고?

“나가시게요, 왕자님? 아직 식사도 하지 않으셨는데요.”

“맞아요, 전하. 식사하고 약을 드시면 저희가 모실게요. 꼭 나가셔야 하는 일이 아니면 며칠은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트와 로웰이 걱정했다. 멀쩡히 눈 뜬 나보다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있지 않나?

“알렉스가 감옥에 있다며.”

“네, 왕자님.”

‘네’가 아니라.

“구하러 가야 하지 않아?”

“앗, 알렉스 경을 걱정하시는 거군요! 그런 거라면 왕자님이 직접 가실 필요 없어요. 사람을 보내 부를게요.”

그렇게 쉽게 석방되는 건가?

대체 뭐 때문에 갇힌 거야?

“에드워드 전하를 통해야 하지 않을까요? 날뛰어 댄 역사가 있어서 또 풀어 주진 않을 것 같은데요.”

로웰이 말했다. 도트가 놀라서 그를 돌아봤다.

“모처럼 일리 있는 말을 하시네요.”

“…….”

“식사를 마치고 약을 드시면 제가 감옥에 다녀올게요. 알렉스 경은 곧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트레이 세 대 분량의 접시가 협탁 위에 놓였다. 놓을 자리가 없어서 궁인들은 다른 방에서 테이블을 더 가져와야 했다.

난 의자에 앉으려고 했지만 도트가 만류했다. 그는 침대 위에 앉은뱅이 테이블을 놓더니 말했다.

“드시고 싶은 음식을 말씀해 주세요.”

“어, 감자수프?”

“네, 왕자님.”

침대 테이블 위에 수프가 놓였다. 병실에 온 기분이었다. 시중드는 사람이 열 명은 넘는 호화 병실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시종들과 병사들이 시중을 들며 내 안색을 살폈다. 작은 침실도 아닌데 사람이 가득해서 복작복작한 느낌이었다.

“다들 나가라고 할까요?”

도트가 물었다. 시종들이 눈빛으로 애원했다.

“괜찮아. 있으라고 해.”

시종들은 기뻐하며 내게 한 숟갈씩 뭔가를 먹이려 들었다. 받아먹다 보니 배가 터질 듯했다.

“이런, 청소 구역을 잘못 들었네.”

“정문으로 간다는 게 복도를 잘못 돌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길을 잃은 궁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티 나게 침실을 기웃거려서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방문자가 많았다. 궁인들은 상기된 얼굴로 인사하고 나갔다. 웃으며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을 붉히며 기뻐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궁에 배속된 사용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시종들은 귀족이었다. 조프리의 궁에 남아 있어 봤자 좋을 일이 없었을 텐데.

나도 눈치가 있어서 그런 말은 안 했다.

“궁을 지켜 줘서 고마워.”

내가 말하자, 시종들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한참 울도록 두다가 각자 자리로 돌려보냈다.

에드워드에게 보낸 궁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알렉스를 만나 볼 수 있을까?’

부탁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건 물론 에드워드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온 성안의 궁인들이 내 침실을 찾은 듯했다.

에드워드는 오지 않았다.

* * *

에드워드와 알렉스보다 먼저 마주한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크래커 소공작이 방문했습니다. 들여보낼까요?”

문밖에 선 병사가 물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내 시종 내지는 비서처럼 행동했는데, 방문객이 올 때마다 내게 큰 소리로 누군지 알려 줬다. 그럴 필요 없었지만, ‘아닙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하는 말을 몇 번 듣자 권하기도 귀찮아졌다.

“들어오라고 해.”

“들어오라십니다!”

그레이는 문턱을 넘어오며 잠시 병사들을 돌아봤다. 옆모습만 봐도 어이없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시킨 거 아냐.”

“아무 말씀 안 드렸는데요……. 전하.”

그레이가 내게로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얼굴이 왜 그래?”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살이 빠져서 마른 광대가 보였다. 덕분에 인상이 더 날카로워졌다. 며칠 굶었나?

그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더니, 막상 눈이 마주치자 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거 말고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실 줄 알았는데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뭐가?

그레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둘이 잠깐 옆방으로 가 있을래?”

“괜찮으시겠어요, 전하?”

“응.”

도트와 로웰을 보내도 그레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표정이 안 좋았다. 저렇게 안 좋은 표정은 별로 본 적 없는데.

그레이도 탈출을 도운 멤버였다. 왜 머랭 경을 보냈는지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은 날카로워도 본성은 착한 애다. 내가 죽는 꼴을 보긴 싫었던 거겠지만.

“차 마실래?”

“전하를 폐궁으로 모시는 걸 도왔던 사람이 저예요.”

분위기를 풀기도 전에 그레이가 대뜸 말했다.

“아, 그래.”

“……알렉스 바움쿠헨에게 무고를 씌워 가두고, 로웰 몽블랑을 전하에게서 떼어 놓은 사람도 저예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응.”

“전하의 뒤를 캐고, 행적을 정리해 에드워드 전하께 보고한 사람도 저였어요.”

“아카데미에서?”

조금 당황했다. 왕성에서 그랬던 건 알고 있었지만.

“예? 아니요. 아니, 초반에는 아니었는데……. 제가 에드워드 전하께 보고드리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어요?”

“아니?”

“‘아카데미에서’라고 하셨잖아요. 왕성에서, 제가 전하 곁에 있을 때도 저를 의심하고 계셨던 거군요?”

“아니라니까.”

“저를 당연히 믿지 않으셨겠네요. 다 알고 계셨으니까.”

듣지도 않을 거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다. 그레이는 약간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래도 어렸을 적엔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겠네요. 제가 전하를 더 외롭게 만들었어요.”

“그레이.”

“예?”

“탈출 도와줘서 고마워.”

그레이는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게 고마워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전하께서 일어나 주셔서 감사한 사람은 오히려 저라는 걸…… 아시잖아요. 이미 제 마음도 알고 계셨던 거 아닌가요?”

“알아.”

복잡한 녀석이다. 에드워드 편을 들어 나를 고립시키고 감시하긴 하지만, 내가 진짜 위험한 건 바라지 않는다.

내가 왕성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하는지, 에드워드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만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한다.

뭐 그런 거겠지. 그래서 지금 죄책감에 눈도 못 마주치는 거 아냐.

“그러지 마.”

“전하, 저는…….”

“됐어.”

죄송하다거나 깨어나셔서 다행이라거나 하는 얘기는 이미 많이 들었다.

그레이가 내 앞에서 울 것 같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우는 모습은 그만 보고 싶었다.

“예…….”

“문병 선물은?”

“예?”

그레이는 여전히 얼이 빠졌다.

“없어? 매너 없네.”

“죄송합니다. 다음에 챙겨 올게요.”

그레이가 쩔쩔맸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본다.

“지금 주면 안 돼? 알렉스 좀 감옥에서 꺼내 줘. 에드워드가 소식이 없는데. 정무가 많이 바쁜가 봐.”

“그럴 리가요.”

“에드워드 잠깐 만날 수 있어?”

“예. 물론이죠.”

그레이가 얼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나가려다 말고 망설였다.

“내일도 찾아와도 되나요?”

“언제는 물어보고 왔어?”

조프리의 문병을 오는 건 원래 그레이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나가고 두 시간이 지나 시계는 자정을 가리켰다. 에드워드도 알렉스도 오지 않았다.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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