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9화 (179/293)
  • 179.

    30. 현실

    손에 힘을 주자, 얇고 부드러운 이불이 힘주는 대로 끌려왔다.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누운 채 울고 있어서 숨이 막혔다. 뜨거운 눈물이 끊임없이 눈을 적시고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려 귀로 스며들었다. 귀가 물속에 들어간 듯 먹먹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왕이 나를 찌르는 순간, 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과거와 내가 단절되는 느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죽음이었다. 익숙했던 건, 내가 이미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차가 내 몸을 허공으로 띄우고,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을 구르던 순간.

    온몸이 부서지고 내 몸의 피가 나를 모두 떠나는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엄마는 혼자가 되는데. 내가 정말 그래선 안 되는데.

    조프리의 꿈을 꾸고 그의 기억을 모두 이어받은 뒤에도 어쩌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내 바람을 내가 믿었다.

    손에 아직도 휴대폰의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 피부를 누르던 습기와 정수리를 달구는 뜨거운 햇살과, 유연호의 목소리가 느껴졌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모든 걸 두고 난 죽어 버렸고, 먼 곳에 왔다.

    그곳에서 나는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화를 회피하고 잠으로 도피하는 대신 엄마를 붙잡고 얘기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든가, 왜 그런 말을 했냐든가.

    하지만 고칠 수 없다. 다시 돌아갈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다. 왜 그때 하지 못했을까.

    몸이 떨렸다. 배가 땅기는 고통 때문에 절로 이가 악물렸다. 반쯤 꿈에 있는 듯했다. 열에 들떠서 생각은 뚝뚝 끊겼다.

    그곳을 떠난 건 나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조프리? 조프리.”

    “안 돼. 아파…….”

    “괜찮아, 괜찮아, 조프리. 숨 쉬어. 안전해. 네 침실이야. 이제 괜찮아. 일어났으니까 됐어.”

    따듯한 체온이 나를 감쌌다. 단단한 팔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응. 응, 조프리.”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아파. 다시 잠들고 싶어. 에드워드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몸은 꿈쩍하지 않았다.

    “좀 더. 조프리. 입 벌려…… 이것만.”

    살이 손톱에 걸리는 게 느껴졌다. 에드워드는 신음도 내지 않고 내게 뭔가를 먹였다. 온몸의 수분이 눈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고통이 일순간 사라지며 에드워드의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떨어지고 유리창을 닦듯 시야가 맑아졌다. 금방 다시 젖어 들었지만 주변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 그냥 알고 싶었다.

    높은 천장이 보였다. 혼자 잠들기엔 조금 넓은 방. 그러나 너무 익숙해진 조프리의 방이 있었다.

    그 방을 에드워드가 채우고 있었다.

    몸의 체온이 한순간에 올라서, 귀 끝까지 후끈거리는 듯했다. 내 몸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곳이 내 현실이다.

    에드워드의 손이 나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떨어질 것 같지만, 이 손은 나를 놓칠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잠들었던 것 같다. 사방이 어둡고 고요했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문을 억지로 여는 것처럼 뻑뻑했다. 잠들고 나서도 한참 운 듯했다. 눈이 부어서 얼굴에 열감이 있었다.

    목이 말랐다. 일어나서 컵을 찾아야겠지만 몸에 힘이 없었다. 움직이면 고통스러울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다시 눈이 젖어 들었다.

    “조프리?”

    에드워드가 어둠 속에 있었다.

    “괜찮아. 눈 뜨려고 할 필요 없어. 목 아프지. 말하지 마.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잠깐만, 입만 벌려 보자.”

    그의 목소리가 이불처럼 따듯했다. 난 그가 말하는 대로 했다.

    입을 벌리자 입술에 뭔가가 닿았다. 입안으로 물이 들어왔다. 마른 입안이 시원해졌다. 에드워드의 팔이 침대를 눌렀다. 내 위로 체중이 실렸다.

    물이 한번 들어가자 막혀 있던 목의 통로가 열리는 듯했다.

    “괜찮아. 괜찮지?”

    에드워드가 나를 달래며 계속 입을 맞췄다. 혀로 입술을 벌리고 뭔가를 먹였다. 입안으로 알약이 들어왔다. 뱉어 내려 하자 에드워드는 혀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삼키고, 또 물을 마셔야 했다.

    “잘했어.”

    에드워드는 아이를 칭찬하듯 머리카락을 만졌다.

    빈속에 약이 들어간 거부감도 혀에 남은 쌉싸름한 맛도, 그가 여러 번 쓸어 줘서 괜찮아졌다. 따듯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더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이 수면 아래를 넘나들었다. 해변에 맨발로 선 듯했다. 오래전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가족 여행을 갔다. 맨발을 간질이는 파도가 기분 좋아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한참 해변을 뛰어다니다 현기증을 느끼고 엎어졌다. 열이 오른 나를 엄마가 그늘 아래로 데려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식혀 줬다.

    물 짜는 소리가 들렸다.

    찬 수건이 이마를 닦았다. 시원하고 기분 좋았다. 열 오른 이마에 길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는 수건을 다시 물에 담그는 듯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어깨를 움츠리자 에드워드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달랬다.

    “괜찮아. 열을 식히려고 그래. 좀 더 자. 약을 먹었으니까, 일어나면 개운할 거야.”

    간지러운 입술이 이마와 눈꺼풀 위로 닿았다. 별처럼 멀고 반짝이는 감각이었다.

    “너무 오래 자지는 말고. 다시 일어나야 해.”

    에드워드의 숨이 느껴졌다.

    “아니야, 내 말 같은 건 듣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아냐. 잠들지 마. 눈 감으면 안 돼. 내 곁에 있어 줘…….”

    왜 저렇게 우는 걸까. 에드워드를 울릴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일어나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 *

    싸우는 소리에 깼다.

    “왕자님을 괴롭히지 마세요!”

    “하지만 식사를 하셔야 약을 드신다니까요?”

    “이래서 상인들은. 왕자님께 필요한 건 마음의 안정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무슨, 의식을 차리신 분을 궁 안에서 영양실조로 혼절하게 만들면 그보다 어이없는 일이 없을 텐데.”

    목소리의 주인은 도트와 로웰이었다.

    도트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왕자님은 지치셨어요. 지금까지 제대로 못 주무신 만큼 주무셔야 해요.”

    잠이 그런 원리던가? 나만 의아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뭐 그런 논리 없는 주장이…….”

    “왕자님!”

    도트가 비명을 질렀다.

    빛이 눈부셨다. 커튼이 걷힌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평화로운 방에, 쟁반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왕자님! 일어나셨군요!”

    도트는 떨어뜨릴 쟁반을 볼 생각도 없이 달려왔다.

    눈을 반쯤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칠 년째 써 온 침대와 방. 그곳에 있는 도트의 존재도 익숙했다. 그러나 내가 도트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바움쿠헨 성이었다.

    “왕자님, 왕자님…….”

    “전하.”

    두 사람이 침대 양쪽 옆에 달라붙었다.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도트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일어나시면 안 돼요!”

    “맞아요, 제가 해 드릴게요.”

    로웰이 재빨리 내 몸을 부축해서 등받이에 기대 앉혔다. 도트는 따듯한 물을 가져왔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한 통증과 달려오는 에드워드. 병사들이 나를 대전으로 끌고 갔는데, 일어나 보니 내 방이었다.

    삼엄한 감시도 불친절한 대접도 없었다. 감옥은 어둡고 습해서 숨이 막혔다. 지금은 시종과 측근이 한방에 있고 부드러운 침구와 햇살이 있다. 반역자가 부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런 것부터 물으시는 거예요?”

    도트가 눈물을 글썽였다. 훌쩍이면서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난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지금이 며칠이야? 나 얼마나 잤어?”

    “제가 이곳에 온 뒤로도, 열흘 동안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며칠 전에 잠깐 깨어나시고 또 사흘을 더 주무셨고요.”

    로웰이 말했다.

    사람이 그렇게 자도 멀쩡한가? 일단 로웰 얼굴은 안 멀쩡해 보였다.

    “열흘? 내가 그렇게나 잤다고? 재판은? 왕은 어떻게 됐어?”

    “폐하는 아프세요.”

    도트가 대답했다.

    “폐하는 너무 쇠약해지셔서 판단력이 흐려지신 모양이에요. 측근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충성스러운 왕자님을 의심하셨다지 뭐예요.”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전하께서 반역이라니 누가 믿기나 하겠어요? 아무도 믿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죠.”

    로웰이 중얼거렸다.

    “폐하의 대리로 국정을 운영 중인 에드워드 전하께서 왕자님의 누명을 벗겨 주셨어요.”

    “에드워드가 폐하 대신 국정을 본다고?”

    왕이 자리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고?

    그래 보이긴 했다. 그래도 사람 하나 죽일 정도의 힘과 판단력은 있었는데.

    “예. 전하께서는 이제 안전하세요.”

    로웰이 대답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다들 괜찮은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

    “예. 전하께서 희생하셨으니까요.”

    대답은 술술 나오는데 뭔가 이상했다. 로웰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는 어떻게 왔어?”

    “저희를 두고 성을 떠난 전하께서 생사를 헤매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왕성으로 올라왔어요. 그땐 전하께서 아직 반역자라 엮이는 순간 사형이었는데요.”

    “…….”

    로웰이 이렇게 비꼬는 성격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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