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8화 (178/293)
  • 178.

    모리스 상송은 왕비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장 늦게 접한 사람이었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실까? 이제 어떻게 되시는 거지?”

    “쉿. 그런 얘기 큰 소리로 하지 마.”

    하인들은 복도를 청소하며 지나갔다. 모리스는 문 너머로 들었다.

    문맥을 유추해 보니 그들이 걱정하는 왕자는 조프리였다. 모리스는 문을 두드려 그들을 부르려다가 주먹을 내렸다.

    “그렇다면 왕비님께서는…… 반역이 사실인지…….”

    “나는 안 믿어.”

    모리스는 문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왕비가 죽었고 조프리 왕자는 중태였다. 무사히 눈을 뜬다 해도 왕자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공주 전하.”

    밀라네 공주가 반역이라고. 그 자존심에 그런 죄명을 받았다고.

    죽어서라도 견뎌 낼 리 없었다. 그녀는 왕가의 딸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결코 자신의 책무를 버릴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나눈 연인을 버리고 외국의 왕비가 되어, 그 나라의 후계자를 낳는 의무까지 다하지 않았는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가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리스는 그런 그녀가 증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파벨이 입학한 아카데미에 조프리 왕자가 재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모르는 사실인 양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모리스는 얼굴을 문질렀다. 이럴 때가 아니다.

    “전하의 하나뿐인 아들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이름도 알릴 수 없는 아비지만, 한 번이나마 제 역할을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파이 공작은 모리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는 듯했다. 공작은 여러 사람을 만났고 응접실에서는 가끔 고성이 오고 갔다.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모리스는 알 수 없었다.

    공작이 제시간에 식사하지 않아서, 식당에서 우연히라도 그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모리스는 하인을 불러 파이 공작과 자리를 만들었다. 파이 공작은 실권 없는 왕족이었으나 학자로서는 명망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공작은 학자였다. 모리스는 학자들에게 정치적인 감각을 기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자는 학자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었다. 문명을 떨친 이들이 서로를 얼마나 존경하고 아끼던가? 학업으로 얽힌 인연은 또 어떻던가.

    모리스는 공작의 저택에 묶여 있으나 외출하지 못할 뿐,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파이 공작은 모리스 같은 문장가를 당연하게 존중했다.

    모리스는 정치인이 아니었으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셔벗의 필리프 왕은 학자들을 좋아하는 온화한 사람이었고, 모리스도 곁에 두고 아꼈다. 모리스는 국왕이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파이 공작은 의례적인 안부 인사도 없이 물었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왕비님은 정말 돌아가셨습니까?”

    모리스는 질문으로 답했다. 공작이 안경 너머로 미간을 찌푸렸다.

    “조프리 전하께서는 정말 의식 불명이십니까?”

    “비난하려 부르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리스는 부정했다.

    “조프리 전하를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필리프 폐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혹할 만한 제안에도 공작은 침묵했다.

    “전하를 뵙는 게 그대에게 왜 필요하단 말입니까?”

    “필리프 폐하께서는 전쟁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공주님께서 억울히 누명을 쓰고 셔벗이 무시당하는 작금의 사태에 분노하셨을 따름입니다.”

    “셔벗의 사신은 달리 말했습니다.”

    “아는 자입니다. 저를 그에게 보내 주십시오.”

    “조프리 전하를 알현하게 해 드린다면…….”

    “전하를 모시고 폐하를 뵙겠습니다. 폐하는 영민하고 다정하신 분이므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침묵이 길었다. 모리스는 초조해졌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목적이 달랐다.

    그는 양국의 평화나 전쟁을 막는 일에는 관심 없었다. 결과는 아무래도 좋다. 왕자가 셔벗으로 간다면 그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모리스는 파이 공작이 이마를 감싸 쥐는 것을 보았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깨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다시 눈을 뜨긴 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깨시기를 가장 바라는 건 우리입니다.”

    모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 * *

    에드워드는 왕의 측근들을 잡아들이고 조프리의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후자에게는 조프리의 곁에 머물며 그를 깨우라고 명령했고 왕의 측근들은 가뒀다.

    왕은 강단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며칠 굶기고 핍박하면 대화하기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셔벗의 사신은 귀족적인 인물이었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파이 공작이 유폐한 셔벗의 명사를 만났다. 각국의 외교 대사들과 자리를 만들었고 재상과 그의 영향을 받는 귀족들이 사병을 차출하도록 만들었다.

    신문 발행자들은 잘도 도망 다녔으나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 잡아들일 필요까진 없었다.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가 치료 중이며,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공표했다. 백성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으나 실은 그의 바람도 들어 있었다.

    에드워드는 일정을 끝내고 조프리의 침실로 돌아왔다. 잠든 조프리를 보고 서랍 위에 신문을 대충 던져 놓았다.

    첫 면 기사 제목이 보였다.

    -조프리 전하는 회복 중! 신의 축복이 함께하심이라.

    에드워드는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로제 부인이 그렇게 죽었을 리 없다. 조프리가 이런 모습으로 쓰러져 있을 리 없다.

    에드워드는 손을 씻고 조프리의 시중을 들었다. 물이 든 대야와 물수건이 들어왔다. 오래전 조프리가 해 주었던 것처럼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간호했다. 그의 옷을 벗기고 몸을 닦았다.

    “네가 오해일 거라고 했잖아. 약속 어긴 적 없다고. 뭐가 오해야? 내게 뭐든 원해도 된다고 말해 놓고, 그 약속 아직도 지키지 않았잖아.”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손을 잡았다. 물수건으로 닦아 열을 식히고 그 손에 입술을 댔다.

    “날 버려두고 가지 마. 미워해도 괜찮아. 일어나서 검으로 찔러. 다 너에게 줄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다 괜찮으니까, 조프리.”

    부드러운 손에 젖은 속눈썹을 비비며 에드워드는 속삭였다.

    “제발.”

    그 순간 신문이 서랍장 아래로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바람 없는 방이다. 아무도 건들지 않은 신문 뭉치가 어떻게 바닥에 떨어질 수 있는가?

    서랍장의 서랍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에드워드가 들어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런 것을 착각하지 않는다.

    그는 서랍을 완전히 열었다.

    그곳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갈색 가죽으로 만들었고, 크기는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가 손을 대자, 상자는 기다리고 있던 듯 열렸다.

    상자 안에 든 건 작은 약병이었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어째서인지 알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뚜껑을 열고 물약을 머금었다. 그리고 조프리에게 입 맞췄다.

    * * *

    나는 장례식장에 있다. 상주의 증표를 달고 문상객을 기다리고 있다. 끝없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온몸의 수분을 쏟아 낼 듯 엄마는 울고 있다.

    장례식장은 텅 비었고 엄마의 곁엔 나밖에 없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떠나갈 사람들이다.

    나는 자라는 중이다. 더 자라면 엄마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아진 엄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나보다 훨씬 작아져서 울고 있다.

    엄마에겐 이제 너밖에 없으니 네가 잘해야 한다고 친척 어른이 말한다.

    나는 내가 엄마의 전부라는 걸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어.’

    내 앞에 잘 차려입은 남자애가 앉아 있다.

    장례식장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아이다. 처음 보는 아이가 분명한데도 얼굴이 익숙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우울한 표정을 한 아이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괴고 있다.

    난 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마마마의 전부라는 걸 알고 있어. 내가 버리면 어마마마가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는 것도 알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살고 싶어?’

    ‘나 대신 어마마마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줄 거야?’

    ‘그렇다면, 내 몸을 사용해도 좋아.’

    배경이 바뀌고 나는 옥상에 서 있다. 바람이 느껴지고 머리 위로는 새파란 하늘이 있다. 교복을 입고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이 보인다. 나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그들 중 누군가를 보고 있지도 않고, 팔을 걸치고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찔한 높이의 운동장을 내려다보는데 땀이 흐른다. 어지러워서 다리의 힘이 풀릴 때까지 서 있다. 아찔한 공포감에 심장이 뛴다. 높은 곳은 좋지 않다. 좋지 않다는 사실을 난 알고 있다.

    옥상 문이 쾅쾅 소리를 낸다. 나는 놀라 돌아본다. 유연호가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

    ‘거기 있지 마. 이리 와.’

    어느새 나는 옥상 출입구에 몸을 기대고 있다. 유연호랑 같은 방향을 보며 그의 말을 듣는다.

    ‘저번에 한 얘기 말이야. 너희 어머니는 네 생각처럼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너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네가 책임질 필요도 없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것 같아.’

    손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주먹에 쥔 휴대폰이 떨리고 있다.

    ‘네가 가장 너를 싫어하는 것 같아, 나는.’

    유연호는 신중하게 말을 고른다. 난 그가 부끄러운 말을 잘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 생각을 알아채고 허리를 찌른다. 내 허리를 쿡, 쿡, 찌르는 손가락이 간지럽다.

    유연호가 웃고 있다.

    ‘사랑을 해. 너한텐 그런 세상이 필요해.’

    햇살이 따듯해서 정수리가 달아오르는 것 같다. 유연호는 땀을 흘리면서도 내 옆에 붙어 있다.

    『플레이어님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휴대폰 화면이 반짝이며 메시지가 떠오른다.

    『행복하신가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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