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6화 (176/293)
  • 176.

    재상도 짐작만 하고 있는 일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검에 찔린 상태로 대전을 나왔다. 에드워드 왕자가 그를 안아 들고 있었고 그 다급한 모습을 온 궁인이 목격했다.

    그 이전에, 궁인들은 조프리 왕자가 대전으로 질질 끌려가는 모습도 목격했던 것이다.

    백성들이 ‘사악한 대신들’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 이야기엔 대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악역이 필요했다.

    설마 왕이 제 아들에게 그런 짓을 했겠는가?

    물론 재상은 듣자마자 왕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왕비의 죽음도 왕의 소행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이 무엇이든 상황은 최악이었다.

    정적들에 의해 어머니를 잃고서도,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는 왕자.

    너무 훌륭한 그림이 아닌가.

    조프리 왕자는 죽어야 했으나 이런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었다. 현왕의 인기는 두 왕자와 바움쿠헨 백작이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조프리 왕자의 영웅적인 죽음은 백성들의 등을 돌릴 만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동맹이고 뭐고 이전에 나라는 사분오열됐다.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건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이었다. 사기가 높은 군대는 대군을 상대로도 물러남이 없고 위기에도 이탈이 적다.

    그러나 이 상황이라면 이길 전쟁도 질 것이다.

    왕은 무얼 하고 있는가?

    ‘폐하는 쓰러지셨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시겠군.’

    에드워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궁인은 물론 백성들도 왕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실은 재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국정을 논하기 위해 에드워드 왕자를 찾았다. 그러나 왕자는 조프리 왕자의 침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재상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파이 공작조차 원로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생긴 심경의 변화를 알고 있는 듯했는데 입을 열지 않았다.

    ‘왕자 전하가 네게 험한 짓을 하셨다 들었다. 이 아비에게 말해 주면 마땅한 사과를 들을 수 있게 해 주마.’

    ‘아닙니다.’

    ‘무슨 일이냐? 조프리 전하와 관계된 일이더냐?’

    아들은 고개만 흔들었다.

    재상은 아들을 가만히 바라봤는데, 아들을 재촉하는 것보다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심기를 헤아리게 하는 편이 입을 열기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은 이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조프리 전하께선 무사하십니까?’

    ‘살아 계시긴 한 모양이더구나.’

    재상도 더는 알지 못했다.

    그는 백성들이 길을 막아 왕성에 발도 딛지 못하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창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차를 밀치려 들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재상은 두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그들은 나날이 수가 불어나는 듯했다.

    마차에서 내린 재상은 외출복을 입은 아들을 발견했다. 아들은 마차에 오르고 있었는데, 그 마차는 너무 작아서 가문의 문장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마부석에는 가문의 기사 머랭 경이 앉아 있었다.

    “어디를 가느냐?”

    “왕성에 다녀오겠습니다.”

    “위험해. 불온한 자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 같더구나. 저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잠시만…… 전하를 뵙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어떤 전하를 말이냐?

    마땅히 에드워드 전하여야 했으나, 재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에드워드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 탄 마차는 출발했다.

    * * *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를 가장 오래 보아 온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의 형제였으나, 그레이만큼 왕자를 잘 알지는 못할 것이다.

    재상은 그레이에게 두 왕자의 관찰을 부탁했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와 떨어진 조프리를 자주 찾아갔다. 웃는 낯으로 접근해 영특함을 뽐내자, 왕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하면서도 그레이를 받아들여 주었다.

    왕자는 그런 성격이었다.

    그레이는 세간을 떠도는 신문을 여러 부 입수했다. 크래커 가문의 하인들은 도련님을 믿었다. 도련님이 불온한 취미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신문을 분석하고 계신다고 믿었다.

    그레이는 신문을 여러 차례 읽었다. 신문은 ‘익명의 관계자’라는 둥의 말을 적었는데 그레이는 이런 건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신문은 근거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호도되는 건, 기사에서 다루는 내용이 실제로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왕자의 선행이나 왕자가 했으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일들이 여러 익명의 명사들을 통해 분석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게 그런 일이었구나 알 수 있었다.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자 곁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 기사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자는 실제로 이상한 장소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왕성에 있을 때는 시장이며 경매장을 기웃거렸고 아카데미에서는 밤놀이 장소를 쏘다녔다.

    그 일로 그레이는 로웰 몽블랑을 싫어하게 되었으나, 기자는 그것이 왕자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왕자는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어울렸다. 덕분에 아카데미 도시에서 왕실의 인기는 최고조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정말로? 왕자가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고?

    왕자의 옆자리에 있을 때도 그레이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다. 왕성에서, 그레이가 왕자를 독점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도.

    조프리 왕자는 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그레이가 유일했다.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살피는 통로 역시 그레이였다.

    왕자는 시답잖은 얘기도 그레이에게 했다. 남들 앞에선 절대 하지 않을 에드워드 얘기 같은 것. 왕비님이 누구를 만나 보라고 말씀하시는데 곤란하다거나 파티 참석이 싫다거나 너도 꼭 같이 참석해야 한다거나.

    그래서 그레이는 왕자가 로웰 몽블랑과 사업을 성공시켰을 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왕자는 그레이에게 사업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은 밝히지 않았다. 그레이는 선을 느꼈다. 견고하고 단단한 선이었다.

    ‘정말로 왕비님을 믿으세요?’

    그레이는 왕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알았다. 그가 절대로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

    그레이는 그런 것들을 잘 피해 갔고 왕자와 괜찮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이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까지는.

    아카데미에서도 그는 왕자의 옆자리에 있었지만, 왕자와 같은 방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왕자를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피상적인 관계 속에서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고, 자신의 마음을 버림과 동시에 왕자를 버렸다.

    왕자는 그레이를 친구로 받아들일 만큼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자의 곁을 원하는 사람은 많아서 그레이가 빠진 자리는 쉽게 메꿔졌다.

    그레이의 자리에 들어간 건 알렉스 바움쿠헨과 로웰 몽블랑이었고 그들은 왕자를 지키려 목숨을 걸었다.

    그레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자 전하께서 잡히셨어요.’

    ‘뭐?’

    ‘스스로 잡히신 거예요. 제가 어쩔 수 없었다고요.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요? 이 나라의 기사라는 자가, 왕자 전하께서 스스로 희생해 전쟁을 막겠다고 하시는데…….’

    머랭 경은 그레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께서 처형당하시면, 저는 작위를 반납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습니다. 이 전쟁은…… 저는 그냥…… 모르겠습니다.’

    왕자가 처형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랭 경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날은 뒤로 미뤄졌다.

    그레이는 신문의 창간호를 구했다. 조프리가 했다는 일들은 그레이에게 너무도 낯설고 이상했다. 그렇다는 게 가장 이상했다. 그레이는 줄곧 왕자 곁에 있었는데, 그는 왕자를 모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모를 수 있을까.

    창간호에서 편집장은 신문의 창간사를 이렇게 적었다. 이 신문의 존재 의의는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과 그에 대한 그들의 식견을 알리는 것이라고.

    창간호의 마지막 장을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레이는 이들이 얼마나 불온한 생각을 가진 자들인지 알았다. 이들은 외국의 젊은 식자층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공화론’을 공부하는 자들이었다.

    공화주의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사상이었는데, 그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나라가 혼란한 정도에 따라 백성들에게 먹혀들기도 했다.

    ‘왕자 전하의 꾸짖음을 듣고 크게 깨친바, 공부하기 이전에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한다.’

    골방에서 학자들이 하는 생각이 현실에 닿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왕자가 조프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자는 이 공화주의자들을 어디서 만났단 말인가? 역시 그 밤놀이 장소인가?

    그리고 먼저 신문을 만들라고 충고했다는 말이지.

    이 불온한 식자층은 그리하여 반란 세력이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이러한 세력이 테러를 일삼는 것에 비하면 온건한 진로였다.

    그레이는 조프리 왕자가 사업을 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들은 모두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그가 선량한 의도로,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왕자가, 이렇게 귀와 눈이 밝은 이들을 만나면서, 그레이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까?

    그가 누굴 만났는지. 에드워드가 누굴 만났고 무슨 짓을 계획했는지.

    ‘나는 왕좌를 원하지 않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레이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왕비님을 믿으세요?’

    ‘믿어.’

    ‘사업이 성공했는데 기뻐하시지 않는 것 같네요.’

    ‘물론 기쁘지.’

    침대에 홀로 남겨진 어린 조프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외롭고 우울해 보였다.

    아무도 그가 진 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조프리 왕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왕자를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가 이런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와 왕비가 어디까지 내몰릴지 알고 있었다면. 그런데도 왕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이라면.

    그레이는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 폐부가 아파서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 창밖의 소란이 들렸다. 내려다보니 왕성으로 출근한 아버지가 마차에서 다시 내리고 있었다.

    “밖에 불온한 자들이 무리 지어 소란을 피우는 듯합니다. 도련님께서는 들어가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인이 권했다. 그레이는 무시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있었다. 항의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그들을 끌어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울고 화내는 소리로 거리가 시끄러웠다.

    이게 왕자가 원한 그림일 리 없었다. 그레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머랭 경을 불러 왕성으로 갈 마차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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