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5화 (175/293)
  • 175.

    선원들은 술집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지금은 뱃일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뱃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도록 갑판 위아래를 오가고 부둣가에서 힘쓰는 일을 하며 살아 왔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강렬한 햇볕이 익숙했다.

    십 년을 살면 그곳이 고향이었다. 생활의 기반이 이 도시에 묶여 있으니, 돈을 벌었다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본래 항구 노예였다. 살기 힘들어 스스로를 노예로 팔거나 부모에게 내다 팔린 사람들이었는데, 뱃일이야 힘과 경력이 중요한 일이다 보니 상대가 노예든 평민이든 공평하게 얻어맞으며 일해야 했다. 그들은 사실 노예라는 신분보다 까마득한 빚과 강도 높은 일이 더 괴로웠다.

    주인이 이상한 사업에 혹하기라도 하면 먼 바다에 나가서 죽는 일도 흔했다. 노예가 죽었는데 보상이 있을 리 없었고, 살아 돌아온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선원들의 대우가 좋아진 건 왕자의 사업 성공 이후였다.

    왕자는 약속을 지켰다. 선원들은 면천됐고 거금을 포상으로 받았다.

    그들은 몹시 기뻤으나 얼떨떨했다. 이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이 갑자기 아름다워졌는데 그들이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뱃일밖에 없었다.

    ‘돈을 벌면 가게를 차려서, 부자가 돼서, 저택을 짓고 결혼을 하고, 또 새 가게를 내서…….’

    막연히 상상하던 일을 시도한 선원들은 돈만 날려 먹었다.

    어쨌든 용케 망하지 않고 가게를 유지하는 벤 같은 선원도 있었다. 그들은 벤의 술집에 모여 말없이 술을 펐다.

    왕자의 약속을 듣고 무역로를 탐사하던 때는 선원들에게 빛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살아 돌아와 명성을 얻었으며 왕자에게 거금으로 치하받기까지 했다.

    그들이 왕자의 칭찬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 술에 취할 때마다 자랑해서 항구 도시의 모든 술꾼들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항구 도시가 지금처럼 번영한 것도 왕자의 은혜였다. 귀족들과 상인들의 돈이 항구로 몰리면서 사람과 물자가 모였다.

    벤 같은 놈의 술집이 아직 안 망한 것도 왕자의 덕이 아닌가?

    조프리 왕자가 저질렀다는 부정부패와 탐욕, 야망.

    병사들은 왕자의 죄를 말하며 죄인을 옹호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둥 헛소리를 했으나 선원들은 알고 있었다.

    선량한 조프리 전하는 모함을 당한 것이다. 귀족들의 정치놀음에 당해 반역자로 몰린 것이다.

    동료들이 대부분 모였다는 확신이 들자, 벤은 술집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카운터 밑에서 신문을 꺼내 왔다.

    얌전히 술을 마시던 동료들이 한자리로 모여들었다. 가장 커다란 테이블에 신문을 펼쳐 놓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조프리 왕자를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신문을 읽는 일도 중죄였다. 발행처가 알려지지 않은 이 신문은, 은밀한 경로로 전국에 퍼져 읽히고 있었다.

    사람이 여럿이라 내용을 읽기가 힘들었다. 벤은 동료들을 자리에 앉히고 큰 소리로 기사를 읽어 줬다.

    신문의 첫 기사는 ‘왕자의 사라진 자금-고아원의 따듯한 겨울’이었다. 기사를 다 읽자마자 사방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다 개소리일 줄 알았다고! 전하께서 뭐? 고아들을 노예로 팔아? 어린애도 안 믿을 소리를 하다니!”

    “제대로 된 소문이 도는 꼴을 본 적 있어? 전하께서 왕을 독살하려 했다잖아! 정신 나간 것들.”

    “그건 왕비 아니었어?”

    벤은 무심코 반론했으나 묵살당했다.

    “하지만 왕비 전하는 돌아가셨지!”

    “틀림없이 살해당했을 거야.”

    “입막음 조로 살해당한 거지. 외국인 왕비였지만, 그렇게 돌아가실 분은 아니었어.”

    “맞아. 훌륭한 분이었지. 조프리 전하를 낳고 기르신 분이잖아?”

    “전하께선 얼마나 괴로우실까…….”

    동료들은 슬퍼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왕비님이 좋은 분이었나? 벤의 머릿속엔 아니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었으나,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기사를 읽어 갈수록 분노와 슬픔은 커졌다. 벤과 동료들은 술집을 거덜 낼 기세로 마셔 댔다.

    “전하께선 잘 도망치셨겠지?”

    “누가 숨겨 드리고 있을까?”

    “항구로 오시지 않으려나. 전하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드릴 텐데.”

    “좋은 생각이군! 사실 이런 때는 뱃길이 안전하지 않나.”

    “내게 배가 있어.”

    “배가 있다고 해도, 입 무거운 선원들은 어쩌고?”

    누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선원들이 발을 굴렀다.

    “이런 멍청이를 봤나. 여기 모인 건 뱃놈들이 아니고 뭐야?”

    “누가 전하를 모셔 와. 우리가 모시자고! 모든 게 준비됐잖아!”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떠들었다. 전하를 모시는 상상에 잠시 기분 좋아졌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종소리가 딸랑 울렸다. 선원들은 조용해졌다. 병사인가?

    늦게 뛰어 들어온 자는 그들과 같은 처지의 전직 선원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주인공이야, 뭐야?”

    동료들이 야유했다. 선원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전하께서 잡히셨어!”

    “뭐야?”

    “전하께서 잡히셨단 말이야! 왕성에 끌려가셨어! 병사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자세히 말해 봐.”

    문 닫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벤이 선원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끔찍했다. 조프리 전하는 제 발로 왕성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을 하셨는가?

    비스코티가 전쟁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셔벗의 왕은 분노했고, 비스코티 내부에서 조프리 전하를 따르는 세력은 목숨 걸고 항전할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선원들은 무력했으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술집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 * *

    재상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각지의 백성들이 조프리 왕자의 복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왕자의 반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재판조차 원하지 않았다. 왕자를 재판정에 세워서는 안 된다. 그런 불경한 일을 저지르다니 귀족들이야말로 불충하다고 분노했다.

    경비대는 반역죄인을 옹호하는 자들을 잡아들였으나 감옥이 남아나질 않았다. 조프리 왕자의 수배지는 벽에 붙이는 즉시 사라졌고 왕자를 지지하고 재상을 욕하는 글이 대신 붙었다.

    -재상이 폐하의 눈을 가려 왕비님을 죽이고, 죄 없는 조프리 전하마저 처형하려 한다!

    -역모를 꾀하는 건 오히려 파이 공작과 재상 일당이다!

    재상은 가문의 마차를 타고 입궁하다 광장에서 길이 막혔다. 마차를 가로막은 백성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대역죄인 재상은 조프리 전하를 살려 내라!”

    “조프리 전하를 살려 내!”

    “재상이 대신 죽어라!”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사병들이 그들을 끌어냈으나 악담은 끊이지 않았다. 재상은 어처구니가 없는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왕성 앞에서 이 무슨 무도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런 일이 온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땐 뛰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현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수차례 반란이 일었다. 헛된 욕망을 품은 귀족들의 짓이었지만, 왕성을 범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재상은 바움쿠헨과 같은 기사들을 보내 진압한 뒤 보고서만 받아 보았다. 민심이 등을 돌렸다는 말은 재상에겐 문서상의 일이었다.

    “조프리 전하를 살려 내라는 건 또 무슨 말이냐? 누가 그분을 처형대에라도 올렸느냐?”

    재상은 분통을 터뜨렸다. 조프리 왕자는 왕성에 있다. 치료가 끝났는데도 일주일이 넘게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왕자가 눈을 뜨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가운데는 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반란이라도 일어날 판이다.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궁인들은 일하다가도 눈물을 쏟았다.

    셔벗과의 국경에선 신경전이 벌어질 뻔했다. 셔벗의 기사가 성벽 아래서 비스코티 왕가를 모욕했다. 그럼에도 비스코티의 기사들은 응하지 않았다.

    기사는 명예를 중시하고 기사도를 지키는 것을 가장 큰 미덕으로 아는 족속이었다. 그들이 주군에 대한 모욕에 분노하지 않을 정도다. 재상은 국경에 주둔한 군대의 충성심조차 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왕자가 도망쳤다면 그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버린 왕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알면서도 사지로 돌아왔고, 이는 왕자를 믿던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왕자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문이 어디서부터 퍼졌는지 재상은 알 수 없었다.

    궁인, 병사, 누구를 의심하든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방에서 왕자의 얘기를 떠들고 있었으니까.

    왕의 대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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