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4화 (174/293)

174.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친구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마, 의장. 이번 사태라는 게 뭘 말하는 거야? 올바른 질문에서 올바른 답이 나온다고 선배들이 말했지.”

점잖게 토론하기에 그들은 서로의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봤다.

조프리 왕자가 이 방을 발견한 이후로 그들은 신사다운 태도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방의 누구도 신사가 아니니까.

“그래. 내가 실수했어. 조프리 전하께서 반역자라는 말을 믿어?”

자연스럽게 토의의 의장이 된 제임스는 호칭엔 신경 쓰지 않았다.

“병사들이 전하를 찾고 있어. 반역이 아니라면 뭐야?”

“전하께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귀족들을 매수하고,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고 믿어?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분이야?”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질문하다니, 의장이 할 일이야?”

“난 토의를 하자는 거야. 우리가 저 밖의 병사들처럼 조프리 전하가 끔찍한 죄인이라고 말해야겠어? 다른 의견을 내는 것부터 토의의 시작이겠지.”

“의장의 말이 옳아. 이미 저 밖의 사람들은 답을 내렸어. 일전에 조프리 전하께서도 그러셨잖아? 우리 같은 지식인이 할 일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거라고.”

“좋은 분이셨지.”

“그분의 성품을 말할 자리가 아니잖아!”

“성품이 아니라면, 무엇을 말해야 하지? 우리가 그분의 무엇을 더 알고 있어?”

“그분이 악독한 일은 못 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지. 사실 아카데미의 누가 그걸 모르겠어?”

순식간에 방 안이 시끄러워졌다. 학생들은 흥분을 참으려 팔짱을 끼었다.

“아카데미뿐이야? 시장의 상인들도 알고 있어. 카페 주인이 오늘 왜 출근하지 않았는지 알아?”

“왜인데?”

“전하께서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라고 끙끙거리다 속병이 나서 못 나왔다는군.”

그들은 혀를 찼다.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 모인 이들은 동정심과 이해력도 뛰어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카페 주인이 안됐다고 생각했다. 평민이라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카페 주인은 명실상부 조프리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학생이었고 힘이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세상을 성토하고 괴로워하다 해산할 것이다.

제임스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을 모았던 것이다.

“들어 보니 알 것 같은데. 다들 이번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전하는 그럴 분이 아니야. 전하께서 이대로 경비대에 잡히면, 그분은 반역자로 처벌받겠지. 유배지에서 영원히 감시 속에 살며 역사서에 ‘2왕자 조프리가 반역을 저질러’라는 한 줄로 일생이 정리되실 거야. 그분을 그렇게 둘 수 있어?”

“우리가 뭘 어쩔 수 있는데?”

신문 창단 멤버들이 짜증 냈다. 제임스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우리가 하는 일이 뭐야? 기사를 쓰는 거지.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거야!”

“설마…….”

“기사를 쓰자.”

“걸리면 사형이야!”

“지금까지는 뭐 안 그랬어? 전하께서 그날 눈감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죽은 목숨이었어. 반역자로 처벌받는 건 우리가 됐을 거라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야심이 없진 않아. 전하를 변론하는 건, 우리도 확신을 가진 다음에…….”

“전하를 욕할 때는 뭐 확신을 갖고 했냐?”

“저, 손님들.”

“헉!”

신문 창단 멤버들은 저들끼리 싸우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펄쩍 뛰었다. 카페 주인 아들이 밖에서 물었다.

“찾아온 분이 계시는데요. 손님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다고.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우리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그들은 겁에 질려 물었다. 주인 아들이 말했다.

“로웰 몽블랑 씨가 보낸 분이라고 하시던데요.”

“그놈이!”

제임스는 안도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문을 열었다.

주인 아들의 옆에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제임스 또래로 보였는데, 여자 쪽은 야무지고 남자 쪽은 순진한 인상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전하께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라고 들었는데요.”

“무슨 일이지? 아니, 들어와서 말해.”

제임스가 말했다.

남녀는 은밀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과거 왕자가 참석한 자선 행사에서 시를 낭독한 적 있었으며, 성장한 지금은 고아원의 운영 업무를 돕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고아원에 기부 들어온 물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왕자 전하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요. 저희는 수도 고아원에서 왔어요.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전하께서 익명으로 하셨던 오랜 기부에 대해서예요…….”

* * *

바움쿠헨 성의 하녀 레나는 왕자 전하의 방을 담당했다. 그녀는 사용인들 사이의 경쟁 끝에 그 역할을 맡았다.

조프리 왕자 전하는 바움쿠헨령의 사용인들에게 영웅이었다. 옛 고아원 출신의 노예들은 구출되고도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거처와 일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이 바움쿠헨 백작이었다.

‘이제 아무도 너희를 건들지 못해. 왕자 전하의 명이시다.’

그녀는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 봤다.

그때까지 누구도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았지만 백작은 방패가 되어 주었다. 폭력도 굶주림도 추위도 없는 몇 년이었다.

바움쿠헨령은 좋은 곳이었다. 백작은 좋은 영주였고, 사용인들에게도 좋은 주인이었다.

그 백작의 주인인 왕자는 레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조프리 전하께 은혜를 입었다고 감사 인사를 드리리라. 조프리 전하가 훌륭한 분이라는 얘기는 귀가 닳도록 들어 왔다. 한낱 하녀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 주실 분이라고. 그녀의 인사도 받아 주실 것이다.

그녀와 같은 고아원에서 자란 알렉스는 왕자 전하의 기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하를 보호해 백작령으로 돌아왔으며 앞으로도 전하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은혜를 갚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레나는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왕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면, 왕자는 왕이 되는 걸까.

백작도 왕자도 좋은 분들인데 이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두 분이 왕국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자 전하께서 왕이 되시면, 이 나라는 바움쿠헨령만큼이나 좋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백성들은 왕과 왕족을 우러러봤다. 받은 것 없이 그들을 칭송했으나 레나는 아니었다.

그녀만이 아니다. 바움쿠헨 성의 많은 사용인이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괴로웠던 건 왕과 귀족들이 무능하며 탐욕스러웠기 때문이다. 바움쿠헨령에 와서 그것을 알아 버렸다.

“하지만 반역이잖아?”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백작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지?”

“나라의 영웅이신데.”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무패의 기사시잖아.”

“에드워드 전하는? 그분의 무용이 사자 같다던데.”

사용인들은 말이 많았다. 그 내용이란 게 하나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레나는 발을 구르며 화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항복하고 싶다는 거야? 전하를 팔아넘기고 백작님을 배신할까!”

“그럴 리가.”

사용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니?”

“역시 활을 배워 둬야 했다는 거지.”

“우리가 귀족도 아니고 사냥꾼도 아닌데 활 쏴서 뭐 할 거냐고 했던 놈 누구야? 수성전에서 단검으로 무슨 재주를 부리게?”

옛 고아원에서 구출된 원생들은 백작의 하인이 되거나 사병으로 들어갔다.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제 버릇 어디 못 간다고, 하인이 된 원생들조차 제 몸 지키기에 열심이었다.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모른다. 그 전에 몸을 지킬 재주 하나쯤은 익혀 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날 고아원에서, 덩치가 너무 크거나 나이가 많은 원생들은 노예 시장으로 끌려가기 전에 죽었다. 짐마차로 시장에 보내진 소수의 원생들만이 살아남았다.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백성들은 전쟁을 끔찍하게 여기지만, 그들은 이미 전쟁 같은 삶을 겪었다.

왕자와 백작이 그들에게 안전한 삶을 주었다. 두 분이 사라진다면, 왕국은 이전처럼 끔찍한 곳이 될 것이다.

사용인들은 대개 단검이나 봉, 드물게 검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활쏘기는 대단한 기술인 데다 준비해야 할 물품이 많아서 함부로 덤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그들은 거리로 쫓겨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익힌 무예는 웬만한 병사에 견줄 만했다.

왕에게 불충하고 왕자와 백작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이 사용인들은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레나는 만족했다. 그녀는 왕자의 방을 청소하러 갔다. 그러나 손님방에 왕자는 없었고, 백작의 고함 소리만 들렸다.

“전하의 뜻을 무시하겠다는 거냐? 네 경거망동이 전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은 왜 몰라!”

“예, 아버지는 훌륭한 기사십니다! 그리하여 전하를 믿고 그분을 사지로 보내신 겁니다! 에드워드 그자는 전하를 해칠 기회만을 노려 왔습니다. 전하께서 그자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아버지는 모르시잖습니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긴 하겠군요. 전하만 제거하면 그자는 목적을 이룬 셈이니까!”

“그러니까 전하께서…….”

백작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전하를 그리 모르십니까?”

레나는 벽에 기대 입을 막고 서 있었다. 알렉스는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 부자가 이토록 싸우는 모습을 그녀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대화 내용이 구슬처럼 꿰어 맞춰지며 하나의 그림을 이뤘다.

왕자 전하께서 에드워드 왕자에게 갔다. 자신을 희생해서, 전쟁을 멈추기 위해.

그녀는 비명을 참았다. 그리고 사용인들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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