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왕은 대전에 앉아 있었다. 텅 빈 대전엔 그밖에 없었다.
그는 지친 듯 나를 내려다봤다. 왕좌에 앉은 그를 보고도 잠시간은 알아보지 못했다. 저 사람이 누굴까. 뼈 위에 옷을 걸쳐 놓은 것 같은 저 사람은.
왕이 느리게 팔을 들었다. 옷자락이 흘러내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팔이 드러났다. 그는 턱을 괸 채 내가 끌려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는 아픈 사람 같았는데 나를 발견한 순간부터 화색이 돌았다.
피부의 주름이 펴지고 표정이 피어나서 소름이 끼쳤다.
단 위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까지 엔딩에 잘 어울리는 악역 같았다. 다른 곳에서 봤다면 우습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둠 속에 보이는 왕의 모습이 조금 두려웠다.
몸이 떨렸다.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다. 왕을 무서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은 무서웠다.
병사들이 나를 내려놓자, 몸이 짚단처럼 넘어졌다. 무릎부터 닿아서 다행이었다. 쓰러지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균형을 유지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떨고 있구나. 너는 겁이 많은 아이였지.”
왕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친근했다. 언뜻 보아도 그가 아주 기분 좋은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프리 왕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정정했다.
“조프리.”
나는 떨리는 몸을 잡고 있었다. 쏟아지는 모래를 붙잡는 것 같았다.
척추가 녹아 버린 걸까?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또 대답이 없구나. 너는 버릇이 잘못 들었어. 밀라네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지. 아이를 싸고돌아 예의범절을 배울 기회가 없었어.”
왕은 멋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왕의 부름을 무시하고 멋대로 도망 다니더구나. 제멋대로인 데다 부왕을 공경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했는지 봐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는지…… 로제…….”
참을 수 없었다. 그의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한껏 예민해진 신경은 작은 움직임에도 긴장했다.
그가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다. 나를 빨리 끝내 줬으면.
나는 고통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싫었다. 왜 악당들은 꼭 말이 많을까.
“부인은 폐하 때문에 불행해졌어요.”
“뭐라고?”
“만난 적도 없는 제가 부인을 불행에 빠뜨렸다니, 제 능력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너…….”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가 아니에요. 폐하시죠. 알고 계시잖아요?”
“닥쳐!”
“에드워드도 당신 때문에 불행해졌어.”
“저놈을 닥치게 해!”
“당신이 모두 망쳤어.”
병사들이 입을 막았다. 급하게 틀어막느라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 꺾인 다리에 체중이 잘못 실려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일그러진 시야로 단을 내려오는 왕이 보였다. 다행이었다. 왕은 분노로 미쳐 버린 모양이었다.
“너…… 너, 이…… 뻔뻔한 놈이.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해! 네가!”
나는 웃을 뻔했다. 조금 웃었을지도 모른다.
왕이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병사가 놀라 말리는 듯했다. 내 몸을 결박하던 손이 사라졌다. 난 넘어지지 않았다. 왕이 내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왕의 다른 팔은 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들부들 떨렸다.
“너만 없었어도 에드워드는 제 몫을 누릴 수 있었어. 로제는 죽지 않았어.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왕자라고! 조프리 왕자라고! 자격도 없는 놈이!”
단숨에 찔러 줬으면 했다. 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온몸을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정말 말이 많았다. 그 점까지 악당 같았다.
“너를 더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 그 여자를 더 빨리. 로제가 그렇게 가기 전에. 하지만 그 여자가 경계를 풀지 않아서. 로제, 내 탓이 아니야. 용서해 줘…….”
흐느끼던 왕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네가 마음에 들게 행동한 일이 하나 있구나. 그 여자가 왕성을 나서게 했어. 그래서 그 여자가……. 하지만 너를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왕이 나를 내팽개쳤다. 머리가 흔들렸다. 이명이 세상에 가득했다.
왕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검 끝이 아래를 향해서, 목을 베어 주지 않으려는 건가 싶었다.
고통은 싫은데. 끝나지 않는 고통을 참아 내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데.
검이 몸을 파고드는 감각은, 이상했다. 둔탁한 꼬챙이에 꿰인 새우가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죽여 버리면 안 됐어. 살아남은 고통을 그 여자도 느끼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토할 것 같았다. 비린 게 입안을 적시는데, 내가 뭘 토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에 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감각이 없다. 내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아.
하지만 왕이 끝내 줄 것이다. 나를 현실로 돌려보내 줄 거야.
왕이 고꾸라졌다.
* * *
이명이 사라지고, 세상이 소름 끼치게 조용해졌다.
안 돼.
왜?
귀를 잡아 뜯고 싶었다. 머리라도 상관없었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묶인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병사들의 목이 날아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했다. 목 끝까지 두근거렸다.
기울어지는 내 몸을 누군가 안았다. 숨을 헐떡이며 나를 내려다보는 에드워드가.
“에, 에드…….”
“응, 조프리. 쉿……. 가만히 있어.”
“죽여 줘.”
“뭐?”
결박이 풀렸다. 자유롭게 된 팔로 에드워드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어서 빨리 날 죽여 줘. 내가 현실감을 되찾기 전에.
“날 죽이고 싶지. 복수하러 왔잖아. 이제 난 아무것도 없어. 만족해? 제발…….”
그렇다면 제발.
눈앞이 흐려졌다. 늦었어. 난 너무 아프고, 심장은 터져 버릴 것 같고, 숨 쉬는 것조차 괴롭다.
이명이 들리지 않아. 여긴 왕성이잖아.
병원이 아니야.
“빨리…….”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뭐가 이렇게 미끄러운지 몰랐다. 손이 젖어 있었다.
에드워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그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게 들렸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경련하고 있었다.
“아니야, 조프리, 제발…….”
그가 나를 만졌다. 얼굴과 머리를 더듬고 견딜 수 없다는 듯 내 온몸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의 숨결까지 선명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선명하면 안 되는데, 방금 전까지 그러지 않았는데.
“안 돼.”
“조프리? 말하지 마. 피 나잖아. 나중에…….”
“아파. 안 들려.”
“괜찮아. 내가 있어. 의사를 부를게.”
에드워드의 금발만은 눈에 들어왔다.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의 손엔 검이 없지만, 괜찮았다.
에드워드라면 맨손으로도 목을 꺾을 수 있다. 왕처럼 어설프게 굴지 않을 것이다. 제발.
“빨리 죽여 줘.”
눈앞이 흐렸다. 에드워드의 형체가 뭉개졌다.
입에서 비린 피가 왈칵 쏟아졌다. 보고 싶지 않은데 눈이 내려가서, 피에 젖은 가슴을 보게 됐다. 셔츠가 흠뻑 젖어서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지혈하고 있었다. 흰 손이 덜덜 떨려서, 나까지 떨고 있는 것 같았다.
폐가 뻐근할 정도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가 목을 막아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머리가 노랗게 변하고 숨을 쉬는 게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현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안 돼.”
내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게 떨어지고 있었다.
“조프리, 안 돼. 제발…….”
* * *
아카데미 남자 기숙사의 기숙사장 제임스 퐁듀는 조프리 왕자 소유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카페 깊은 곳에 마련된 방은 비밀스러운 일을 실행하기에 꼭 맞았다.
이 카페는 제임스와 그 친구들이 처음으로 신문을 만든 곳이기도 했다. 그때는 조잡한 형태였고, 신문이라는 이름도 개념도 생각하지 않을 때였지만. 유서 깊은 곳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카페 주인이 잡혀 들어가지 않았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병사들이 카페를 조사했을 때, 복도에 걸려 있던 조프리 왕자의 초상화는 내려진 상태였다.
왕자가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은 왕자가 보기에도 흡족한 수준의 그림을 걸고 싶어 내려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자의 마음에, 동시에 카페 주인의 마음에 찰 만한 대단한 화가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고 왕자의 초상화를 다시 거는 일은 무한정 미뤄지고 있었다.
그게 주인을 살렸다.
병사들은 카페가 조프리 왕자의 소유인 줄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카페를 구입한 뒤로 왕자가 드나든 적 없었다는 사실도 금방 알아냈다.
카페의 단골손님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귀족이었고, 병사들은 그들을 함부로 추궁할 수 없었다.
병사들은 그들을 구슬렸다. 그러나 이 카페를 드나드는 학생들이야말로 조프리 왕자의 추종자였기 때문에, 왕자나 그 주변 사람들에게 불리한 말은 털끝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임스 퐁듀와 그 친구들은 덕분에 안전할 수 있었다.
제임스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아니라면 신문 같은 걸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추를 풀고 머리를 헝큰 채 테이블에 둘러앉아 고뇌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번 사태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