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이델라가 도착한 건 그다음이었다.
“전하를 찾는 외지인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백작이 물어서 확인하러 갔다. 이델라와 마부였다. 마차는 없이 말만 보였다.
“전하!”
이델라가 와락 안겼다. 그녀의 등을 토닥여 줬다. 엔딩에 필요한 모든 인원이 모였다.
두통이 심했다. 속이 메슥거렸으나 백작 부부가 식당으로 부르는 건 거절하지 않았다.
백작 부부와 정찬을 가졌다. 오랜만에 하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이델라는 백작 부인과 대화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도트는 여기서도 내 식사 시중을 들려고 했다.
저녁에 백작을 따로 만났다.
알렉스는 백작 부인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 하고 끌려갔고 도트는 내가 방으로 보냈다. 둘 다 소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충성스럽고, 조프리를 따르고…… 그래서 사지까지 따라왔다. 이 게임의 배드엔딩은 한 명만 죽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바움쿠헨 백작이 물었다.
“알렉스한테 들었어?”
“예. 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왕의 군대가 오면 나가서 대치하지 마. 나한테는 지금 말을 준비해 주고.”
“예?”
“왕성으로 돌아갈래.”
“어딜 가신다고요?”
백작은 다른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궁에 갇혀 계셨다 탈출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탈출한 곳으로 돌아가시겠다고요?”
“내전을 막고 싶어.”
대답이 안 된 것 같다.
“그대도 그렇잖아. 그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른 사람이니까. 이 나라 백성들이 다시 전쟁을 겪게 하고 싶지 않겠지. 나도 그래. 난 이 나라의 왕자잖아.”
반박할 구석이 없게 말했다. 백작은 바로 반박했다.
“아니요, 전하께선 반역자이십니다. 죽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 내전을 막기 위해?”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해. 에드워드를 설득할 수 있어. 그가 이 전쟁을 멈추고 날 보호할 거야.”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백작을 응시했다. 눈싸움이라면 왕 때문에 단련되어 있다.
“예. 에드워드 전하께 전령을 보내겠습니다. 전하께서 폐하를 설득하셔서 조프리 전하를 복권하시면 되겠군요.”
“안 돼. 내가 직접 가야 해.”
논리로는 백작을 설득할 자신이 없다.
내가 우기자,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더니 주변만 성큼성큼 돌아다녔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전하를 궁에 가둬 놓고, 폐하께서는 왜 전하를 찾으셨습니까? 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친 반역자로 만들기 위해? 재판의 기회도 없이 처형하려고? 그걸 막을 방법을 알고 계셨다면 전하께서는 왜 목숨 걸고 탈출하셨습니까?”
“그땐 내게 협상할 수단이 있다는 걸 몰랐어. 에드워드를 만날 기회도 없었고.”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백작이 테이블을 쾅 짚었다.
“다 좋다고 칩시다! 전하께서 왕성까지 안전하게 도착하시리란 법은 어디 있습니까? 에드워드 전하를 어떻게 만나실 겁니까? 저는 이곳에서 전하의 목이 어느 날 성벽에 효수됐다는 소식이나 들으면 되는 겁니까?”
“도와줄 사람이 있어.”
“어디에요? 뭘 하느라 이제껏 안 돕고 그런 일을 돕는답니까?”
백작이 화를 내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너도 봤잖아. 이델라랑 같이 온 마부.”
“예?”
“오는 길 중간까지 우리가 탄 마차를 몰았어. 탈출의 숨겨진 공신이지. 손님방 안 내줬어?”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마부가 뭐요? 숨겨진 고수라도 됩니까? 아니면 왕족?”
“그 사람 크래커 공작의 기사야.”
공작이 총애하는 기사 머랭 경이다.
마부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눈썰미가 없는 편이라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말을 빌려줘. 전쟁은 없을 거야. 사태를 해결하고 올게.”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법 같은 방법이 있다면 왜…….”
“왕족의 비밀을 너무 캐려고 하지 마.”
“제 아들을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안 되지. 알잖아. 눈에 띄어.”
“전하. 저는 전하께서 성군이 되시리라 믿었습니다.”
“왕비님처럼 말하네.”
바움쿠헨 백작은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사실 전하께선 처음부터 제게 그러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내 일행을 잘 부탁한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들은 조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고 전부 반역자로 만들 수야 없는 노릇이다.
내게 이곳은 게임이지만, 그들에겐 아니니까.
* * *
머랭 경은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쥐고 있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하늘은 새까맣게만 보였다. 다시 해가 뜰 것 같지도 않고, 가장 깊은 밤 속인 것만 같다.
“머랭 경.”
“전하.”
한때 조프리와 에드워드의 외출을 도왔던 기사는 그때처럼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저 같은 자를 기억해 주십니까?”
머랭 경이 미소 지었다. 찡그린 얼굴이라 제대로 웃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도 머랭 경은 마부인 척 마차를 몰았다.
어린 에드워드와 나, 그레이와 도트가 그 안에 있었다. 그때 우리는 로제 부인을 만나러 갔었다.
“그대는 무사히 크래커 공작 저로 보내겠다고 약속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휴, 이걸 어쩌나.”
“다른 문제가 있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인 것 같은데요. 아니, 전하께서는…….”
“잡담은 나중에 하는 게 어때?”
“나중에 언제요? 왕성에 도착해서요?”
“글쎄.”
“어이구야.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도련님은 또 어쩌시려는지.”
중얼중얼하며 머랭 경이 말에 올랐다.
왕성에는 몽블랑 상단에서 구매한 대단한 명마가 많았다. 다 조프리 궁 마구간에 있을 텐데. 그 애들 중 내 목숨을 구해 준 말은 한 마리도 없는 셈이다.
바움쿠헨 백작이 준비한 말은 특별한 명마는 아니었으나 온순하고 낯을 잘 가리지 않는 착한 말이었다.
그레이는 왜 그랬을까.
왜 조프리를 감금하는 데 협력하고, 또 그의 행방을 로웰에게 흘렸을까.
왜 머랭 경을 보내 탈출을 도왔을까.
에드워드는.
날 가둬서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나도 너와 같은 고통을 겪길 바랐어?
* * *
말은 겁이 많은 생물이었으나, 잘 훈련된 말은 기수를 믿고 야밤에도 달려 주었다. 희미한 조명을 등불 삼아 달리다 보니 날이 밝았다.
바움쿠헨령에서 수도로 가는 길은 수도 없이 많았고, 나는 일부러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실은 내가 택한 것도 아니고 머랭 경에게 부탁한 뒤 따라 달렸을 뿐이지만.
내가 조프리 왕자라는 건 수도까지 갈 필요도 없이 발각됐다. 어느 관문의 병사가 내 신분증을 보고 외인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냐고 추궁했고, 난 사실 내가 조프리라고 밝혔다.
머랭 경에겐 달아나라고 신호를 줬다.
병사들은 허둥지둥하다가 나를 묶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팔을 뒤로 꺾었다.
아, 하고 소리를 내자 병사는 ‘죄송합니다’ 하고 또 팔을 놓쳤다.
어수선한 관문이었다.
뒤로 묶인 팔이 아팠다. 잘못 묶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묶은 병사를 제외하고 관문의 다른 병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밤낮으로 나를 감시하며 가장 빠른 마차를 골라 수도로 호송했다.
왕자를 공개적으로 호송해야 하는가?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가? 저들끼리 싸우다가 후자가 이긴 듯했다.
커튼이 걷히지 않아 마차 안은 끔찍하게 덥고 답답했다. 꺾인 팔은 감각이 없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묶인 부분은 피가 통하지 않았다. 왕을 만나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끌려가 탑에 갇혔다.
끝없는 계단을 내려가서, 창문도 없는 지하에 갇혀 있었다. 빛이 전혀 들지 않았고 여전히 더웠다. 나는 조금 녹아내린 것 같았지만, 빛이 들지 않아서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전혀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병사들이 창살문을 열고 나를 꺼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계단에 발이 부딪혔다. 병사들이 제대로 서라고 재촉했다. 발목이 꺾였는데 별로 아프지 않았다. 감각이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계속해서 이명이 들렸다. 폐궁에서 깨어난 뒤부터,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병원의 기계음.
처음엔 희미하게 들렸을 뿐이다. 지금은 나를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건 게임이고, 조프리는 게임 속의 등장인물이고.
그 애는 열여덟 살에 죽을 거라고.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게 게임이라면, 현실은 어디 있을까?
악몽 속에서 난 나를 잡아먹으려는 괴물에게 쫓기고 있다. 필사적으로,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그게 꿈인 줄도 모르고.
엄마가 울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셨다. 이명이 너무 심해 속이 메스꺼웠다.
통로마다 마주치는 궁인들이 소스라쳐서 고개를 숙였다.
내일이면 온 성안에 소문이 퍼지겠구나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