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1화 (171/293)
  • 171.

    머리가 멍했다. 난 가발과 안경을 뒤집어쓴 채 마차에 앉아 수도를 빠져나갔다.

    이델라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고 능숙하게 관문의 병사들을 상대했다. 병사들은 이델라의 얼굴과 신분을 확인하고 쉽게 길을 열어 줬다.

    수도를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건 그 다음부터였다.

    이동하는 동안 이델라와 알렉스는 아카데미의 상황을 설명했다. 알렉스는 말재주가 없어 거들고만 있었고 이델라가 주로 말했다.

    “반역!”

    도트의 눈이 커졌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셨군요? 계속 갇혀만 계셨던 거예요? 지금 아카데미 도시는 유령 도시 같아요. 다들 숨죽이고 있어요. 길에는 행인보다 병사가 더 많아요. 조프리 전하를 찾으려고…….”

    “말도 안 돼.”

    “다들 몸을 사리고 있어요.”

    이델라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반역자의 마차에 타고 있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내가 묻자 이델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또 그 말씀이세요? 은혜를 갚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에클레어 가문의 이델라 양이시죠.”

    도트가 새삼스레 확인했다.

    “예.”

    “저는 왕자님의 시종 도트예요. 왕자님을 어려서부터 모셨어요.”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이델라는 당황한 듯했다.

    “잘 부탁드려요.”

    도트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마치 여행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행보다도 내게는 무슨 신호처럼 느껴졌다.

    여주인공이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조프리와 에드워드도, 알렉스와 로웰도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길 위에 있다.

    게임의 배경은 아카데미였다. 시작부터 엔딩 직전까지 그곳에서 모든 이벤트가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건 그 후의 일들뿐이다. 내가 보지 못한 엔딩들.

    우리는 엔딩으로 향하고 있는 걸까?

    에드워드 공략은 이미 망했다. 이델라는 누구와도 이어지지 않았고 조프리를 구하러 왔다. 반역자인 조프리를.

    조프리 배드엔딩이 떠올랐다. 이제 그 일러스트의 이델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쓰러진 형체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더니, 왕비님의 모습이 겹쳐졌다. 난 눈을 세게 문질렀다.

    죽은 왕비님이. 엄마가…….

    엄마가 울고 있던 게, 꿈이었을까?

    이 게임이 끝나 가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밤이었다. 알렉스가 나를 안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관문 앞으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길을 꽉 막은 채 앞으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줄의 후미에 마차를 대고 있었다.

    성벽에서 횃불이 타올랐다. 불꽃 너머로 하늘을 향해 빽빽이 치솟은 창과 투구가 빛났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보였다. 멀리서 어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병사들이 그를 마차에서 억지로 끌어내고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이놈들이, 놔라!”

    병사가 남자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남자가 악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가발은 아니군. 죄송합니다. 신원 확인이 있겠습니다.”

    “반지를 봐! 가문의 인장이 있잖아!”

    남자의 호소를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검은 머리에 귀티 나는 얼굴입니다.”

    “혹시 모르니 수도로 이송할까요?”

    “잡아들여.”

    이델라가 우리를 마차 밖으로 밀어냈다.

    “전하, 여기까지인가 봐요. 바움쿠헨령에서 뵈어요. 마차는 눈에 띄고 저는 걸음이 느리니, 마차를 처분하고 따라갈게요. 부디 무사하세요.”

    “왕자님. 어서요.”

    도트가 재촉했다. 병사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알아채기 전에, 알렉스와 도트를 따라 산길로 들어갔다. 밤의 산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불야성처럼 빛나는 성문으로 일단의 병력이 빠져나왔다. 그들이 어딘가로 향했다. 알렉스는 말없이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바움쿠헨령으로 가는 걸까?

    “산길이 더 빠릅니다, 전하. 먼저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한기가 들었다. 종장으로 향하고 있다.

    정신없이 걸었다. 열 명의 삼림 경비대와 마주쳤다. 그들이 우리를 붙잡고 추궁해서 알렉스가 목을 꺾었다. 살아남아 도망친 자들이 있을까? 시체를 밟고 달리면서 계속 소름이 돋았다.

    모든 일이 속절없이 나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감각.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피부처럼 내게 달라붙어서 떠나지 않던 느낌이.

    온 나라를 적으로 돌리고, 평생 도망 다니며, 살아갈 수 있나?

    알렉스와 도트를 봤다.

    “영지에만 들어가면 괜찮을 겁니다, 전하.”

    “네, 왕자님. 바움쿠헨 백작은 왕국의 영웅이니까요. 왕자님을 보호할 거예요.”

    그들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나는 다른 게 궁금했다.

    이 세계 자체가 내 도피처는 아니었을까.

    난 또 엄마를 그곳에 두고 도망친 게 아닐까.

    나는 밤의 편의점에 앉아 있다. 삼각 김밥을 먹고 요구르트 음료수를 마시는데 둘 다 맛이 없다.

    운이 좋으면 괜찮은 게 폐기로 남을 때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왜 이런 걸 출시했을까 싶은 이상한 게 남는다. 왜 사장님은 이런 걸 들여오는 걸까. 누구의 취향일까.

    나는 언제 나이를 먹을까. 언제 스무 살이 될까. 스무 살이 되면 최저 시급은 받을 수 있을까. 야간 수당을 받을 수 있을까. 주휴 수당은 받을 수 있을까. 정말 그런 걸 받는 사람이 있나. 매일 일을 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언제 빚이 사라질까. 나도 서른이나 마흔이 될까. 고등학교를 왜 인문계로 갔을까. 엄마는 왜 대학에 가라고 말했을까. 내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을까. 엄마는 왜 내게 늘 미안해할까. 나는 왜 미안할까. 미안해하는 게 왜 미울까.

    이런 걸 고민해서 좋은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조프리는 몸이 덜 피곤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새벽까지 일하고 신문 배달을 돌고 학교에서 잔다. 난 어디서나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다.

    대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도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졸업하면 직장을 구해 월급을 받으며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런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도망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가끔 다 포기하고 싶다.

    거짓말이에요.

    다시는 어디 가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울지 마세요…….

    * * *

    새벽에 깼다. 덥고 답답했다. 등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알렉스가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들어오라고 이불을 걷어 줬던 기억이 났다.

    덥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듯한 것 같기도 했다. 안락의자에는 도트가 앉아 있었다. 의자는 창가에 있었는데 창밖의 희미한 빛 때문에 도트의 얼굴이 보였다. 잠든 그는 입을 살짝 벌리고 침대를 향해 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알렉스가 눈을 떴다.

    “전하?”

    “더 자.”

    “어디 가십니까?”

    알렉스는 이 성에 자기 방이 있고 도트는 옆방을 배정받았지만, 두 사람 다 떠나지 않았다.

    내가 움직이는 대로 알렉스의 시선이 따라왔다. 창가로 가자 그는 일어났다.

    난 창밖을 내려다봤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왕자님, 더 주무세요. 피곤하시잖아요.”

    어느새 눈을 뜬 도트가 권했다.

    ‘로제 부인을 죽인 건 저예요. 제가 일러바쳤기 때문에 부인이 해를 당했어요. 에드워드 전하께서 벌하셔야 하는 상대는 저예요. 그러니까 왕자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순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트는 자기 말을 믿고 있을까? 믿고 싶은 걸까.

    그는 조프리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이게 에드워드의 복수라는 것만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도트가 로제 부인을 발견한 건 나 때문이다. 내가 로제 부인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게 정말로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멍했다.

    바움쿠헨 성은 전쟁 준비에 들어섰다. 성 밖의 백성들을 안으로 들이고 창고를 개방해 물자를 비축하고, 경계 신호를 주고받느라 성은 새벽에도 깨어 있었다. 난 그 소리에 눈을 떴던 것이다.

    “전하께서는 안전하십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도트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내려 왔다. 셋이 따듯한 차를 홀짝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일개미처럼 바쁜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이 동이 텄다.

    로웰이 찾아온 건 정오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전하” 하고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막지 않아서 놀랐다. 로웰은 눈 밑 점이 선명한 다갈색 눈동자로 나를 들여다봤다.

    “괜찮으세요?”

    “아니.”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르겠다. 로웰은 알까? 그가 다시 나를 안았다.

    “죄송해요.”

    “네가 왜?”

    “몽블랑의 도움은 받을 수 없어요. 전하를 돕는 건 저 개인이에요.”

    “응.”

    “이미 아시겠지만, 전하께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셔벗으로 몸을 피하시거나 이곳에 남는 거예요.”

    셔벗이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난 좋은 학생은 아니었지만, 셔벗에서 나를 어떻게 이용할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셔벗을 개입시키면 외세를 끌어들인 왕자는 되겠다. 역사서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좋지만.

    로웰이 내 손을 잡았다. 고개를 숙인 채 그가 계속 말했다.

    “전하께서 전쟁을 원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런 걸 견딜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도요.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는 전하를 따를게요.”

    “응.”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전하. 전하만 생각하세요.”

    로웰의 다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전에 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생각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내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 배드엔딩밖에 없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상황이 나빠지다니, 이 게임이 그런 엔딩을 원하는 게 아니면 불가능하다.

    난 전쟁통에 죽고 싶진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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