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70화 (170/293)
  • 170.

    “그레이가 입궁했다고?”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듯합니다. 마차가…….”

    에드워드는 궁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궁으로 달려갔다. 에드워드의 애마는 다갈색 몸을 민첩하게 움직여 재상의 저택으로 향했다.

    왕자의 방문이었다. 집사와 하인들은 급히 작은 주인을 불러왔다.

    그레이는 창백한 얼굴로 에드워드를 마주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에드워드는 확신했다. 그레이는 불안한 중에도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프리는 이곳에 없다.

    “저택엔 없군.”

    “…….”

    “공작 소유 별장도 아니야. 네 개인 별장…… 그럴 리 없나. 어디에 뒀어?”

    “전 모릅니다, 전하.”

    그레이가 말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면 다른 말이 나왔어야 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의 목을 쥐었다.

    “누구한테 말했어? 누구한테 행방을 알렸지?”

    사용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레이는 부들부들 떨며 에드워드의 손목을 잡았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레이를 던져 놓고 다시 말에 올랐다. 저택의 작은 주인을 지키러 달려온 사용인들이 혼비백산해 물러났다.

    그레이가 안전을 확신할 만한 상대.

    조프리에게 절대적으로 안전한. 그런 충성심을 가진 사람을 에드워드는 알고 있었다.

    알렉스 바움쿠헨.

    바움쿠헨 백작령!

    * * *

    로웰은 이델라에게 가방을 안겨 줬다. 이델라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로웰은 안내했다.

    “위조 신분증 두 장과 변장 세트, 경비로 쓸 만한 돈이 들어 있어요.”

    “위조 신분증?”

    “예전에 놀러 다니던 시절에…… 아니, 아무튼 잘 쓰던 거니까 지금 와서 들키진 않을 거예요. 전하와 바움쿠헨에게 전해 주세요.”

    “네.”

    무슨 인사를 해야 할까? 이델라가 망설이자, 로웰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봐요.”

    이델라도 긴장한 채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왕자의 구출을 돕겠다고 자원했을 때, 로웰은 그게 좋은 생각인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왕자와 관련 없어 보이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이델라라면 최상의 카드였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의 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 그는 곧장 왕성으로 들어가 왕자를 구출할 것이다.

    로웰은 그 길로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유언장에서 제 이름 빼셨어요?”

    “아, 안 한다니까!”

    “빼 주세요. 지금 당장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대신 지금 돈 좀 주시면 안 돼요?”

    “너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거야?”

    로웰의 형제들은 기뻐할 것이다. 서로의 유산을 호시탐탐 노리며 사이좋게 뒷발질을 하는 종자들이니까.

    그렇다 해도, 로웰은 그들이 돈을 노리고 자신을 죽이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그런 막장 집안은 아니다. 로웰을 후레자식이니 망나니니 하는 애칭으로 불러 대는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로웰은 집안에 해를 끼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늘부로 저희 연은 끊긴 거예요. 누가 찾아오면 그렇게 말씀하세요. 진작 버린 자식이라고.”

    “야, 야!”

    “이거 가져가도 돼요?”

    로웰은 아버지 집무실에서 장식품을 몇 개 챙겼다. 금으로 만든 물건은 어디서든 돈이 된다.

    하인들이 로웰의 뒤를 따라 나왔다. 로웰은 복잡한 표정의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고 대여한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바움쿠헨령이었다.

    * * *

    왕자가 실종되고 이델라는 정신이 없었다. 병사들은 조프리 왕자의 초상화가 걸린 가게로 쳐들어가 가게를 조사하고 가게 주인을 끌고 갔다.

    아카데미에서도 왕자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은 한 번씩 추궁당했는데, 그들이 대단한 신분의 귀족들만 아니었어도 상황은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이델라는 병사들의 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오히려 걸려든 건 체레니아였다. 그녀의 가문에서 연 파티에 왕자가 참석한 적 있으니까.

    누구도 이델라가 특별히 왕자와 친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이었으나, 이델라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왕자를 목격한 사람이었는데 왕자를 돕는 데는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델라는 약혼자의 방문을 받았다.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는 이델라가 상상한 것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대머리에 배가 산만 하고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끔찍한 상인은 아니었다. 쥐같이 생긴 사람이었는데 이델라를 보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이, 이델라 양, 이미 연락을 받았겠지만, 제가 당신의 약혼자입니다. 초상화에서 본 그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착오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전 누구와도 약혼한 적 없어요.”

    “예? 연락이 갔을 텐데. 이델라 양의 부친이…….”

    “아버지의 채권자이신가요? 빚에 대해선 들었어요. 갚으라고 말씀하시러 오셨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신원 확실하고 장래 유망한 아카데미 학생이니 떼어먹힐 위험은 없을 거예요.”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면 뭔가요? 아카데미 도시에서 아카데미의 학생을 겁박하실 생각인가요?”

    왕자는 실종돼서 생사도 모르는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귀찮게 굴까?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워서 분노가 일 정도였다. 이 시각에도 왕자는 죽어 가고 있을지 모른다.

    이델라는 조프리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의 갈등을 알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아는 이상으로 둘의 관계는 복잡했다.

    특히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에게 뒤틀린 감정을 품고 있는 듯했는데, 이델라는 조프리 왕자에게 말할까 망설이다 말았다.

    조프리 왕자는 자신의 형제를 소중하게 여겼다. 왕자가 형제가 아닌 이델라를 믿을까?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이델라는 그때 말했어야 했다.

    이델라는 에드워드가 조프리 왕자의 실종에 관여됐다고 확신했다. 왕자가 이대로 잘못된다면, 그건 그녀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왕자의 불신을 사더라도 말은 꺼내 봤어야 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비겁한 마음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로웰이 왕자가 갇혀 있는 장소를 알았고 그를 구출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델라는 왕자를 빼내 오는 역으로 자원했다.

    이델라는 로웰 몽블랑이 준비한 마차에 앉아 왕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의 마차가 나오고 그 안에서 조프리 왕자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왕자는 창백한 얼굴이었고 다리를 약간 끌고 있었다.

    다친 걸까? 이델라는 눈물을 참았다. 왕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전하.”

    이델라는 재빨리 마차 벽으로 몸을 붙여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왕자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이델라?”

    “예,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왜 여기 있어?”

    이델라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왕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왕자와 같이 들어온 사람들인데도 왕자는 그들을 처음 본 것처럼 반응했다.

    평소의 왕자가 아니다. 이델라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왕자가 제정신일 리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그녀는 왕자의 질문에 답했다.

    “전하를 구출하러 왔어요. 이제부터 이 마차는 바움쿠헨령으로 향할 거예요. 그곳에서 로웰 씨와 합류하기로 했어요. 여기, 가발이랑 안경이에요. 왕자님과 알렉스 경은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가려 주세요. 관문을 통과하는 건 제가 맡을게요…….”

    * * *

    바움쿠헨 백작 부부는 한밤중에 손님을 맞았다.

    성안의 하인들은 방을 준비하고 물과 식사를 나르느라 분주해졌고 병사들은 비상이 걸렸다. 평시의 두 배가 되는 인원이 성벽을 경계해서 성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조프리 왕자와 그 일행은 흙먼지를 맞아 지치고 더러운 모습이었다. 마차는 중간에 버려 말만 타고 있었다. 말들은 잔뜩 지쳐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지경이었다.

    반역자 왕자.

    백작 부인은 자신의 숄로 왕자의 얼굴을 가리고 안으로 모셨다. 병사들을 불러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게 하고 사용인들의 입을 막았다.

    그사이 백작은 왕자의 시종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관문을 통과하는데 창을 든 병사들이 마차마다 사람들을 끌어내 바닥에 세웠다. 그들은 통행인의 얼굴과 체격을 꼼꼼히 살펴보고 신원을 확인했다.

    광장마다 왕자의 초상화가 붙어 있어 성안으로는 아예 들어갈 수 없었다. 왕자 일행은 산길을 통했다. 가져온 건량은 많지 않았고 말과 사람이 동시에 지쳤다. 밤에 이동하는 일행을 수상쩍게 여긴 산림 경비대에게 붙들려 알렉스가 무력을 사용한 일도 있었다. 추격자가 붙는다면 금방 흔적을 찾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알렉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니, 잘했다. 전하를 무사히 모셔 왔구나.”

    바움쿠헨 백작은 알렉스의 머리를 마구 쓸어 주고 왕자에게 다가갔다.

    왕자는 창백하고 조용했다. 백작은 두 팔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왕자의 등이 굳었다. 그는 당황한 듯 백작을 올려다봤다.

    “병사들이 올 거야.”

    “예, 전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왕자가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지친 것일까? 계절은 여름에 가까웠다. 추울 리는 없을 것이다.

    백작은 그가 왕자를 안아 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자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지만, 왕자가 안아 줘야 할 대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왕자는 처음부터 충성의 대상이었다. 백작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조금 쉬어도 돼?”

    왕자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전하. 내일 낮까지 무엇도 전하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바움쿠헨 백작은 아들에게 손짓했다.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왕자를 부축했다. 방으로 모셔다드리고 올 것이다.

    왕자는 지독하게 지친 얼굴이었다.

    백작의 주인은 왕이었다. 그는 기사 서임을 받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 왕은 백작을 번번이 실망시킨 주인이었으며, 조프리는 존경할 만한 왕자였다. 바움쿠헨 백작은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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