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69화 (169/293)
  • 169.

    기사에게 큰 키는 좋은 덕목이었다. 그러나 잠입에 좋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궁인들은 알렉스를 지나치며 힐끗거렸다. 심부름꾼치고는 키가 크다. 기사들 가운데서도 저런 체구는 드물지 않은가?

    심부름꾼 복장의 알렉스는 모자를 눌러쓰지도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면 수상해 보일 거라는 판단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신경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머릿속은 왕자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생각은 떠오를 새가 없었다.

    북쪽 폐궁으로 다가갈수록 인적이 드물었다. 폐궁 가까이 가자 궁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시선이 떨어지자, 알렉스는 비호같은 속도로 달려 폐궁으로 접근했다.

    폐궁은 멀리서 보기에도 흉흉한 모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귀신이라도 나올 듯했으나, 알렉스의 눈엔 밖에서 못질한 창이 가장 먼저 보였다.

    단단한 문은 삼중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상태를 보아 모두 최근에 새로 단 것이다.

    알렉스는 경계 인원을 살폈다. 궁은 충분히 외진 곳에 있어 어떤 소란이 일어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듯했다.

    병사 두 명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허리에는 국경의 군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알렉스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구냐? 멈춰 서라.”

    알렉스는 모자를 벗으려는 듯 움직였다. ‘길 잃은 심부름꾼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건가?’ 하고 방심한 병사들을 때려눕히고는 품을 뒤졌다.

    열쇠가 없다.

    순찰하던 병사가 돌아왔다. 알렉스는 그들도 때려눕힌 뒤 나무를 타고 올랐다. 단단한 가지를 구름판으로 사용해 폐궁의 벽에 달라붙었다.

    벽은 덩굴로 뒤덮여 가려졌으나, 속은 파이고 깨진 벽돌이었다. 손아귀의 힘과 무게 중심을 이용해 알렉스는 홈을 잡고 위로 올라갔다.

    봉인 없는 창이 나타났다. 작은 창은 지금은 더러웠으나 예전엔 장식품처럼 아름다웠을 것이다. 창 아래 화분 받침처럼 단단한 바닥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곳에 발을 딛고 창의 양옆 벽을 짚었다. 고개를 뒤로 돌린 다음, 그는 군홧발을 들어 유리를 깼다.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알렉스는 밖을 살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오는 궁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폐궁 안에서 소란을 들은 궁인을 발견했다. 조프리 왕자의 시종 도트였다.

    “알렉스 경!”

    도트는 유폐되어 있던 사람치곤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의 외관에 관심 없었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예, 물론이에요! 저희를 구하러 와 주셨군요? 다행이에요. 왕자님, 왕자님! 누가 왔는지 보세요!”

    도트가 달려갔다. 그가 유달리 알렉스를 반긴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갇혀 있는 사람으로선 당연할 것이다. 알렉스는 달려서 따라가다 도트를 앞질렀다.

    조프리 왕자는 홀에 앉아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멍하니 앉은 그는 막 잠에서 깬 사람 같았다.

    그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알렉?”

    “예, 전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모시러 왔습니다.”

    알렉스는 참으려 했으나 늦었다. 곁에서 평생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는데, 이 얼마나 무능하고 불충한 기사인가. 그가 얼굴을 가렸다.

    “또 우네.”

    “아닙니다, 전하. 제가 무슨 자격으로…….”

    “우는데 무슨 자격씩이나 필요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알렉스는 고개를 흔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떨어지고 깨끗해진 자리에 왕자의 멍한 얼굴이 들어왔다.

    “크래커 소공작이 위치를 불었습니다.”

    “그레이가?”

    왕자는 여전히 반응이 늦었다. 알렉스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불안감이 찾아왔으나 생각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전하. 최대한 조심히 잠입했으나 소란을 감지한 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밖에 몽블랑이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럼 가야지.”

    “짐을 챙겨 뒀어요! 지금 나가면 되나요?”

    도트가 서둘렀다.

    “예. 위의 창을 깨 두었습니다. 다치셨습니까, 전하?”

    “아니.”

    알렉스는 왕자의 상태를 가늠해 보았다. 그는 왕자의 아침 운동 지도 강사이기도 했다. 왕자가 벽을 타고 내려갈 수 있을까?

    “실례하겠습니다. 제가 안겠습니다, 전하. 도트 님은 제 뒤를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예, 경. 왕자님을 부탁드려요.”

    도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렉스는 왕자를 안아 들고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왕자의 심장이 부드럽게 뛰고 있었다. 품에 안긴 체온이 따듯해서 알렉스는 마음이 놓였다.

    왕자는 무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몽블랑 상단에 숨어 왕자의 행방을 기다리는 동안 알렉스는 자신을 죽여 버릴 뻔했다.

    처벌은 후에 왕자에게 받을 예정이었다. 지금은 왕자가 안전한 것으로 충분했다.

    안도감이 너무 커서 알렉스는 왕자에게 느낀 위화감을 오래 생각하지 못했다.

    * * *

    파이 공작은 왕을 만나려고 했으나 주치의에게 가로막혔다. 왕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누구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셔벗은 부국이었다. 비스코티와 셔벗이 동맹을 맺을 수 있었던 건, 비스코티의 존재가 셔벗에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비스코티는 북방의 이민족을 막는 방패였다. 그러나 국경 분쟁의 승리로 북방은 잠잠해졌다. 셔벗이 공주의 일을 좌시해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셔벗과 국경을 맞댄 나라들은 셔벗을 견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명분 없는 전쟁을 반길 귀족은 없었다. 본디 역모는 강력한 명분이었으나, 왕비의 죽음은 정황이 수상했다.

    셔벗은 비스코티의 왕비가 모함을 받았으며 끝내 살해당했다고 분노했다.

    재상은 왕을 배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왕비의 죽음이 진정 사고냐는 질문은 비스코티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돌고 있었다. 재상마저 의심하고 있었다. 정말 왕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

    재상은 왕을 추궁하는 대신 조프리 왕자를 잡아들이는 데 주력했다. 외부의 화를 두고 내부가 반으로 나뉘어 싸우는 형국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문이 퍼지는 속도보다 빨리 왕자는 도주했다.

    재상은 왕이 아닌 에드워드와 국정을 논의하고 있었고 에드워드는 국경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공주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동맹이 편했을 것이다.

    재상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건 비스코티가 외부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 위협은 처음에는 국경의 외적들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왕비로 바뀌었다.

    에드워드는 총기가 보이는 왕자였고 국경 분쟁을 승리를 이끌어 스스로의 자질을 증명했다.

    재상은 희망을 보았다. 그는 셔벗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국과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고 에드워드를 혼맹에 올려놓고 신중해져 있던 차였다. 셔벗과 같은, 말이 동맹일 뿐 실상은 끌려다니는 사태가 반복되어선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게 어그러졌다.

    동맹의 대가로 그들은 또 무엇을 빼앗기게 될까? 하인이 달려와 그레이의 마차가 왕성에 들어왔다고 알렸다.

    “그 아이가?”

    재상은 이런 상황에도 안도를 느꼈다. 아들은 재상의 위안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는 폐궁에 갇혀 있을 조프리를 떠올렸다.

    모든 일을 조프리와 연관 지어 떠올린 지는 꽤 되었으나 이번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레이의 도움으로 남의 눈을 피해 조프리를 마차에 올렸다.

    그가 입막음을 해 두었던가?

    조프리의 행방이 알려져선 안 된다. 그레이가 존경해 마지않는 부친에게도 마찬가지다.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겠으나, 에드워드는 불안했다. 그레이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뒤늦게 깨달았다.

    에드워드는 조프리가 불안한 것이다. 그의 존재가. 그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가 에드워드를 원망할 거라는 사실이…….

    어떻게 이런 걸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속이 뒤틀렸다. 그는 며칠간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소화되지 않고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재상을 보내고 에드워드는 아직 해가 떠 있는 하늘을 쳐다봤다. 창문을 막아 놨으니 조프리는 이런 하늘을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 전에 하늘 따위를 볼 정신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시종에게 왕비의 부고를 들었겠지.

    울었을까?

    에드워드는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그는 곧 출전할 것이다. 조프리를 봐야겠다.

    폐궁은 한차례 청소했으나 조프리가 머물 만한 곳은 아니었다. 조프리는 금과 은에 둘러싸여 자란 것치고 성품이 무던했으나 몸은 예민했다.

    에드워드는 손만 대도 쉽게 멍이 들던 몸을 떠올렸다. 기침을 참고 있을까. 조금만 숨을 막아도 헐떡대던 몸이다. 마음이 괴롭고 몸이 힘들어 그곳에서 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가짜 형제는 마음이 물렀다. 원망을 미리 받아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오래 누굴 미워할 만큼 독한 성품도 못 되니까.

    에드워드는 여차하면 조프리를 다시 기절시키자고 생각하며 폐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건 기절한 병사들이었다. 에드워드는 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매트리스 위는 텅 비었다. 트레이는 한쪽에 내팽개쳐져 있고 어수선하게 짐을 꾸린 듯한 흔적이 보였다.

    궁인이 조프리를 발견했다면 소란이 없었을 리 없다.

    조프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데리고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레이 크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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