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66화 (166/293)
  • 166.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두개골 안쪽에 정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파할 시간이 없다. 지금 눈을 떠야 한다. 확인할 게 있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밀랍으로 붙인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는데,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다. 여기가 어디지? 현실인가? 나는 누구랑 있지?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지만, 병원이 아니다.

    인공적인 불빛도 나를 둘러싼 사람도 없었다. 내 옆에서 울던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혼자였다.

    예배당처럼 조용한 공간이었다. 오래된 건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고풍스러운 천장. 게임 속의…….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반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아카데미는 물론 조프리가 있을 만한 어떤 장소도 아니다.

    사방이 희미한 조명으로 밝았다. 그러나 밝다곤 해도 촛불이 밝히는 범위 안에서만이었다.

    천장이 높고 어수선한 공간.

    협탁과 작은 책상, 거치대마다 촛불이 놓여 있었다. 이사 직전의 건물 같기도 했다. 머리 위로 달빛이 드는 창문이 나 있고, 그 아래 위층으로 향할 수 있는 둥근 계단이 보였다.

    바퀴 굴러가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우측 복도에서 도트가 튀어나왔다. 소음은 그가 끌던 트레이에서 나는 거였다.

    저 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 있었는데.

    “왕자님, 깨셨어요?”

    “도트?”

    “아직 일어나지 마세요. 조심히…….”

    도트는 트레이를 내팽개치고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목부터 신경이 땅겼다. 도트의 말이 아니라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매트리스 위였다. 조프리 궁에 있는 것만큼 푹신한 매트리스는 아니다. 그러나 깃털이 들어간 얇은 이불이나 베개는 왕실 납품용으로 보였다.

    “여기 왕성이야?”

    “예.”

    “어떻게 된 거야?”

    도트의 얼굴이 촛불에 비쳤다. 앳되고 단정한 얼굴이다. 옷은 여전히 아카데미 하인 복장이었다.

    “왕자님,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어요. 지금은 주무세요. 두통이 심하신 거죠? 다시 일어나면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날도 늦었고…….”

    “왕비님이 왜? 무슨 일을 하셨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있던 장소는 아카데미였다.

    옆에 에드워드가 있었고, 그 방으로 도트가 들어왔다.

    “……들으셨어요?”

    “들으라고 소리친 거 아니야?”

    도트는 행동을 멈췄다.

    “왕자님……. 왕비님이 돌아가셨어요.”

    머리가 멍했다.

    “에드워드 전하가 왕자님을 기절시켜 이곳으로 끌고 오셨어요. 저도 이곳이 어딘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이곳의 물건이 왕실에서 사용되는 것이라, 안 쓰는 궁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지만…….”

    “북쪽 폐궁이야.”

    관자놀이를 눌러도 두통이 가시질 않는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내장을 누르고 있다. 구역질이 난다.

    “왕자님께서 어떻게 아세요?”

    “에드워드가 데려온 적 있어.”

    ‘궁에 들어가기 싫으면 여기 와도 돼.’

    에드워드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곳을 소개했는지 떠올랐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먼지가 부유하는 내부를 신비롭게 비춰서, 언뜻 보면 예쁜데 건강엔 안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었다.

    에드워드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거였구나.

    놀랍지 않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충격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멍했다.

    쟨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아카데미에선 궁금했는데. 알게 된 지금 명쾌해지지도 않았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고장 난 기계 장치 같다. 뭔가 생각을 하거나 느껴야 할 것 같은데, 화나지도 슬프지도 않다.

    조프리는 왜 울지 않을까.

    “왕자님, 괜찮으세요?”

    도트의 손이 팔에 닿았다.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웠다.

    “잘 모르겠어.”

    조프리가 울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조프리의 몸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잘 겁먹거나 지치거나 했는데. 그의 몸에 익숙해져서, 이젠 내가 같은 공포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느끼게 됐는데.

    조프리가 조용하다.

    “왕자님?”

    “왜 이러지?”

    가슴을 주먹으로 쳐 봤지만 때린 곳만 아팠다. 조프리는 반응하지 않는다. 몸 상태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기승을 부렸는데.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꿈을 보여 주고 감정을 멋대로 조종해서, 그럴 때마다 네 몸 찾아가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게 일과였다.

    “이상해.”

    “왕자님!”

    도트가 내 주먹을 잡았다. 그는 숨을 고르고, 내 손에 빈 찻잔을 쥐여 줬다.

    “왕자님. 차를 따라 드릴게요. 드시고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여기 이것저것 잘 갖춰져 있더라고요. 이런 폐궁이라도 관리를 하네요. 왕성도 인력이 남아도나 봐요…….”

    아닐걸.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궁을 에드워드 혼자 제집처럼 쓰고 있었다. 관리인은 에드워드 자신이었다.

    도트는 끓여 온 물로 차를 우려서 내가 들고 있는 잔에 따랐다. 여전히 한 손으론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잡으면 못 마셔.”

    “앗.”

    도트가 손을 놨다.

    차를 마시자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졌다.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입이 멋대로 열리고 조프리가 속내를 내비치는 일은 없었다.

    그대로 누워서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여전히 밤이었다. 도트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뭘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청소 중이었다.

    물이 든 양동이와 대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왕자님을 이런 먼지투성이 공간에 모실 수 없지’라는 속마음이 느껴졌다. 도트라면 그럴 것이다. 조프리가 왕성까지 와서, 이런 더러운 장소에 머물고 있다면 참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조프리가 아직도 여기에 있지?

    “앗, 왕자님. 일어나셨어요?”

    “장례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데, 그런 물음이 입에서 튀어 나갔다.

    “네? 아……. 준비 중일 거예요.”

    “일 거라고? 너도 몰라?”

    “그게…….”

    도트가 망설였다.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우리 나갈 순 있어?”

    도트가 대걸레질을 멈췄다.

    “아니요. 왕자님.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열린 문이 없어요…….”

    “창문은?”

    “2층까지는 모두 잠겼어요. 3층은…… 열면 뛰어내릴 순 있을 것 같아요. 밖에서 못질하진 않아서, 어떻게 열 수만 있으면……. 하지만 병사들이 밖에 있어요.”

    1층과 2층 창문은 밖에서 못질됐단 뜻이다.

    조프리는 이곳에 갇혔다.

    가둔 사람은 에드워드다.

    왕비님을 해친 사람도 에드워드일까?

    “왕비님의 사인은 들었어?”

    “사인은…….”

    도트가 입술을 물었다.

    “마차 사고예요, 왕자님.”

    “그럴 리가.”

    부정의 말이 먼저 나왔다.

    “알잖아. 왕비님은 왕성 밖으로 외출하는 분이 아니야.”

    예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왕비님이 왕성에서 나가지 않는 이유는 왕성 밖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왕비님은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다.

    외부의 사교 행사에 참석하는 일도, 왕비님은 조프리 때문에 시작했다.

    그 전까지 왕비님의 사교란 왕성 안으로 사람을 부르거나 파티를 열 때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각국의 외교 사절을 만나고 궁인들을 관리하고, 귀부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교 행사를 하는 게, 왕비님이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왕비님이 조프리도 없는데 외부 행사에 나가셨다고?”

    도트는 입술을 축였다.

    “아니에요, 왕자님. 왕비님은 사교 행사에 참여하러 가신 게 아니라, 아카데미로 오시던 길이었어요.”

    “왜?”

    “왕자님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하셨대요. 왕자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아무래도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고. 왕자님…….”

    나 때문이다.

    조프리에게 일어나는 문제는, 그가 얽힌 상황 탓이 90퍼센트쯤은 됐다.

    로제 부인의 일도, 그래서 에드워드와 틀어진 것도, 완전히 내 책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난 어리석었지만 그 모든 사건에 내가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거만하진 않았다.

    하지만 조프리의 나쁜 소문은 내가 만들었다. 내 판단하에, 게임에 없던 일을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다.

    왕비님이 마차 사고를 당했다고…….

    로제 부인은 마차에 치여 죽었다.

    노린 거라면 에드워드는 끔찍하게 집요하고 영리했다.

    공기가 희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왕자님은 잘 먹고 쉬셔야 해요. 힘내셔야 나가서 장례식도 치르실 수 있죠.”

    도트가 억지로 밝게 말했다.

    정말로 멍해져서, 그를 쳐다봤다.

    “정말 그렇게 믿어? 에드워드가 나를 내보낼 거라고? 날 죽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요. 왕자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도트는 힘주어 말했다.

    이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시종 캐릭터는 맹목적이다. 이 상황에 와서도 조프리는 무사할 거라고 믿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도트가 대걸레를 놓고 다가왔다.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웃고 있었다. 눈이 불안하게 반짝거려서 난 넋을 놓고 그를 올려다봤다.

    “왕자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제가 에드워드 전하께 말씀드릴 테니까요. 제가 그랬다고. 로제 부인과 왕의 밀회를, 왕비님께 말씀드린 건 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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