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29. 경계
어린 에드워드는 로제 부인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부인의 묘소는 생전에 살던 저택에 마련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관은 예술품처럼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로제 부인은 탐스러운 금발을 잃은 채 도자기 인형처럼 잠들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왜 저렇게 된 걸까.
금발이 귀밑에서 흉하게 잘렸다. 에드워드와 같은 의문을 왕도 느꼈다. 그가 묻자, 아무래도 부랑자의 짓인 것 같다고 신관은 대답했다.
무연고 시신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빼 가는 일은 흔히 벌어졌다. 로제 부인의 신원이 밝혀진 것도 그녀의 품 안에 있던 왕실의 귀물이 상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로제 부인의 머리카락은 약탈할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녀는 살아서 빼앗기기만 하다 끝내 목숨까지 강탈당했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제 몸 하나 온전히 갖고 잠들지 못한 것이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에드워드는 떨리는 손을 그러쥐고 있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를 냈다.
관이 묻히자, 왕은 갑자기 횡설수설했다.
“이대로 묻어 버리는 것은 너무 가엾구나. 저택의 예배당을 지금이라도 손보면 어떻겠느냐?”
그곳을 생전의 부인이 좋아하던 꽃과 물건으로 꾸며 관을 안치하면 그녀가 덜 외로워하지 않겠냐는 얘기였다.
에드워드는 왕이 혼란에 빠져 하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었다.
장례가 끝나자 신관은 돌아갔다.
맑은 하늘에 비가 떨어져서 에드워드는 멍하니 맞고 있었다. 빗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질 때마다 몸이 추워지고 무거워졌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이다.
누군가 옆에 서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웠다.
왕이 아직도 가지 않았다.
그는 아직 젊고 멍한 얼굴로 연인의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비가 멎어 밤하늘에 달이 떴다. 왕이 창백한 얼굴을 에드워드에게 향했다.
“우리밖에 남지 않았구나.”
왕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밖에 없어.”
에드워드는 그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건 에드워드와 어머니 로제 부인뿐이었다.
외딴집에서 오래도록 그들은 왕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이 강제로 떨어진 뒤에는, 각자 버려진 위치에서 또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참을 수가 없구나. 참을 수가 없어. 이제 빼앗기는 일은 지긋지긋하다.”
왕이 말했다. 에드워드는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를 쳐다봤다.
지금껏 왕의 말이 어떤 것도 와 닿지 않았는데, 그 말은 에드워드 자신의 것 같았다.
“그 여자의 아들에게, 내 아들의 것까지 빼앗기는 건 이제 두고 볼 수 없어.”
정말이지 그 말은 옳았다.
조프리 비스코티가 에드워드의 형제조차 아니었다니. 에드워드는 어디까지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에드워드 비스코티는 욕망이 희미한 인간이었다. 그에게 욕망의 존재를 깨닫게 한 사람은 조프리 비스코티다.
그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불을 붙인 사람은 왕비였다.
녹음이 짙푸른 왕실의 숲에서 에드워드는 빛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사냥 대회 중이다. 그러나 왕비의 움직임은 느긋해서 마치 정원이라도 산책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평지를 걷듯 걸을 수 있도록 에스코트하는 사람은 왕비의 아들이었다.
조프리 비스코티.
그의 팔이, 왕비의 손 아래 붙잡혀 있다.
잘 드는 칼이 눈앞에서 움직인다. 둘 사이를 가르고 그녀의 팔을 깨끗하게 자른다.
에드워드가 눈을 깜빡이자 환상은 사라졌다.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는 왕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에드워드는 허락되지 않은 걸 탐하려는 게 아니다.
원래 그의 것이었고, 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건 정의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언제나 조프리는 에드워드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다.
* * *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시종이 들어오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비의 이름이 나왔을 때 느낌은 확신으로 변했다.
조프리의 목덜미를 치자, 방심한 몸은 에드워드의 품 안으로 축 늘어졌다. 조프리의 시종은 눈을 홉뜨고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 와. 하려던 얘기 계속 해.”
에드워드가 명령했다.
조프리의 시종 도트는 에드워드도 아는 인물이었다. 어린 조프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온갖 수발을 들었다.
그 수발에는 에드워드의 식사를 챙기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프리가 에드워드에게 다정해진 이후로, 도트 역시 에드워드에게 친절해졌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렇지 않았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조프리가 에드워드에게 다정하지 않았던 때도.
그 시절 도트는 왕비의 끄나풀 중 하나였다.
도트는 물러섰지만, 에드워드는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조프리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 시종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왕자님께 손대지 마세요.”
“네 주인은 방자한 시종에게도 관대하지. 나도 그러리라 기대하진 마. 말해.”
“왕비님이 돌아가셨어요.”
이미 아시잖아요, 그런 얼굴로 도트가 노려봤다. 그러나 목소리는 공손했다.
“왕자님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하얀 얼굴을 내려다봤다.
왕비가 죽었다고?
도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었다. 조프리의 시종이 조프리를 애타게 찾은 순간 직감했다.
그 여자가 죽었다면, 물론 사고사일 리는 없다.
왕의 짓이다. 왕비와 조프리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왕이, 그 늙어 버린 머리를 굴려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재판 전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 멍청한 왕이.
몇 시간 전이었다면 에드워드는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비가 죽었다.
그 사실을 알면,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는데.
조프리가 그를 용서하고, 오해가 있었다고 말하고, 그의 품에 안겼는데.
왕이 일을 저질렀다면, 뒤는 없다.
에드워드는 잠시 도트를 쳐다봤다. 얼굴만은 소년 같은 시종은 그 시선에 흠칫 놀랐다.
“와, 왕자님을 해칠 건가요?”
겁을 집어먹은 채로도 그것부터 묻는다. 이 시종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에드워드는 알고 있었다.
목격자는 없는 편이 낫다. 조프리를 끌고 간다면, 저 시종은 시끄럽게 굴 것이다.
죽일까?
하지만 조프리의 시종이었다.
조프리가 깨어나면 힘들겠지. 조프리는 왕자여서, 혼자서 하는 일은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외롭고 괴로울 것이다.
“이리 와.”
시종은 떨면서도 명령에 따랐다. 에드워드는 시종 역시 기절시켰다.
왕은 조프리를 찾을 것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경비대에 구속된 바움쿠헨의 이름만 팔아도 조프리는 제 발로 찾아갈 테니까.
왕비가 죽고 조프리까지 구속되면 지지 세력은 움직일 수 없다.
파이 공작이 재판을 그대로 진행하면, 죽은 왕비는 반역자가 된다. 반역은 3대를 멸족. 조프리 역시 반역자의 혈육으로 처벌받는다.
셔벗의 개입은 국경에 보낸 군사들이 누름돌 역할을 할 것이다.
나라 안팎으로 왕비의 악행을 알리고 두 사람을 파렴치한 반역자로 만들어 놓으면, 셔벗에도 명분은 없다.
나머지 일은 간단하다.
왕은 조프리를 죽일 것이다.
왕족에 대한 예우로 유폐형, 같은 것을 왕이 떠올릴 리 없다.
이대로 왕성에 끌려간다면, 재판이 일어나기도 전에 조프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조프리가 왕성을 떠나 왕비의 보호 아래서 멀어진 순간부터, 왕은 조프리를 노렸다.
에드워드는 몇 번이나 그 위협에서 조프리를 구해 냈다.
조프리는 살아 있어야 하니까.
왕비를 협박하기 위해, 그녀가 살아서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인질이 되어 줘야 하니까.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에드워드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왕을 특별히 미워한 적은 없었으나, 이제는 그를 증오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조프리는 죽은 듯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 위로 몸을 숙였다. 길게 뻗은 목에 손을 두르고 손바닥으로 맥박을 느꼈다.
조프리가 눈을 뜨고, 에드워드를 원망에 찬 눈으로 노려본다면.
다신 에드워드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에드워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하! 에드워드 전하! 들으셨어요? 왕성에서…….”
문이 열리고 그레이 크래커가 뛰어 들어왔다. 에드워드는 가까스로 조프리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손에 흠뻑 땀이 배어 있었다.
“……전하?”
그레이가 숨을 멈췄다.
에드워드는 얼굴을 문질렀다. 오한이 들었다. 조프리의 맥박이 옮아온 것처럼 온몸이 쿵쿵 뛰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 알았다. 그건 공포였다.
* * *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익숙한 소리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소리인데, 너무 오래전에 들어서 기억나지 않는 듯한…….
마치 병원 같다.
한번 생각하고 나니 소독약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공기를 떠도는 이상한 병원 냄새.
멀쩡한 사람도 멍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냄새였다. 어릴 적 난 이 냄새를 싫어했다. 냄새의 주인인 아버지도.
무슨 소리가 들린다. 웅, 하는 공기의 진동 같은 소리.
그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나를 건드렸다.
“일어나. 기다리고 있잖아.”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앞이 환했다. 빛 속에 있는 것 같다.
눈을 뜨면, 네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을 텐데.
눈꺼풀이 무겁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다. 입이라도 벌려 말하고 싶지만, 몸이 아주 작은 틀에 갇힌 느낌이다.
어딘가에 갇혀서 흔들리고 있다. 그 틀을 벗어나는 행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치 죽어 있는 것 같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속이 메슥거린다.
“나만 졸업하게 할 거야?”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