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60화 (160/293)
  • 160.

    ‘전하, 만약의 일인데요. 조프리 전하가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한 말씀이 진심이라면……. 그런 거짓말을 하는 분은 아니니까요…….’

    그레이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그분이 왕위 계승자의 짝으로 용납될 수 없는 상대를 원하기 때문이라면…….’

    ‘무슨 뜻이야?’

    ‘예를 들어 바움쿠헨 같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신다거나, 그래서라면…….’

    ‘…….’

    ‘저도 진심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가능성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해서요!’

    그레이가 변명했다.

    에드워드가 식은 표정으로 쳐다봐서 그레이는 몹시 부끄러워했다.

    알렉스 바움쿠헨과 연인이라거나 하는 헛소리는 물론 아무렇게나 한 말이다. 그 조프리가 남자 애인을 만들 리 없지 않은가. 그가 왕비를 그렇게 배신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말이 다시 떠오른 건, 눈앞의 여자 때문이었다.

    온화한 인상. 불행한 배경.

    조프리가 동정할 요소를 충분히 갖춘 여자.

    그러나 조프리의 감정이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면.

    에드워드는 이델라 에클레어에게 ‘생일 선물의 답례’를 보냈다.

    산더미 같은 선물이 여자 기숙사에 쌓였다. 일꾼들이 드나들 때마다 학생들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눈 깜짝할 새 이델라와 에드워드의 관계에 대한 추측은 아카데미를 휩쓸었다.

    별일 아니다. 알렉스 바움쿠헨과 로웰 몽블랑을 건드린 것처럼 그녀의 생활을 휘저은 정도다.

    그러나 두 사람을 건드릴 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조프리는 기숙사 밑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자신에게 매달린 여자의 등을 도닥여 주고,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저희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이델라 에클레어가 다시 물었다.

    에드워드도 알지 못했다. 그녀를 왜 아카데미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지.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눌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델라가 인파에 휩쓸려 비틀거렸다. 에드워드는 그녀가 넘어질 뻔한 모습을 보다가 손목을 잡았다. 휘청이는 몸을 일으키고 휙 잡아끌었다.

    “……에드워드. 너 뭐 하는 거야?”

    에드워드는 뒤를 돌았다. 골목에서 조프리가 나왔다. 방금까지 달려온 듯 숨이 가빴다.

    그는 이델라와 에드워드 사이를 가로막듯 서서, 이델라의 팔에서 에드워드의 손을 떼어 냈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드워드는 조프리가 당황하거나 경계하는 모습에 익숙했다.

    그게 조프리의 가장 부정적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조프리 비스코티는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조프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에드워드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다. 그가 누군가를 해쳤다는 듯이. 혹은 해칠 거라는 듯이.

    소중하고 약한 것을 대하듯 이델라를 뒤로 숨겼다.

    에드워드의 속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 * *

    알렉스와 나는 병사들을 따라 경비대로 들어갔다.

    경비대장의 집무실은 책상과 소파 정도가 있는 단출한 방이었다. 수도에서 임명되어 내려온 경비대장은 아직도 집무실에 개인 짐을 풀지 않은 듯했다.

    여러 사건이 있었는데도 경비대장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에드워드와 함께 습격받았을 때 경비대장은 조프리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찾아가 증언을 들었다.

    경비대장은 진중한 얼굴, 기사다운 체격의 40대 남자였다. 병사가 차를 내오기도 전에 경비대장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된 사건은 어떤 귀족과 관련 있었다.

    “사유 재산 유출죄?”

    “예, 전하. 해당 노예가 바움쿠헨 경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해당 노예는 도주 중이었습니다. 노예의 주인인 귀족이 조사를 부탁해 추적하던 차에 행적이 끊겼고, 노예를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바움쿠헨 경이 되는 셈입니다.”

    “간단한 조사네. 알렉스가 행적을 대답하면 풀려나는 거야?”

    무슨 사건인지 모르겠다. 내가 간단하게 정리하자, 경비대장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알렉스 바움쿠헨 경은 용의자입니다, 전하. 해당 노예는 귀족의 사유 재산입니다. 그 물건을 바움쿠헨 경은 사적으로 취득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 재산 유출죄에 해당합니다. 이 때문에 노예주인 귀족이 바움쿠헨 경을 고소하겠다고 날뛰는 중입니다.”

    “죄도 확정 안 됐는데?”

    “예.”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설령 고소당한다 하더라도 이런 재판은 피해액을 배상하는 걸로 합의됐다.

    “잠깐, 알렉스가 고소당했다면, 설마 노예가 잡힐 때까지 구류야?”

    “예, 그렇습니다.”

    “그 귀족이 누구야? 합의하겠다고 전해.”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전하께서 아끼시는 기사의 행방에 큰 관심을 보이시는 건 이해합니다. 이미 충분한 이상으로 전하께 사정을 설명해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은 사법권을 침범하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위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는 법이 없으니 고소 당사자의 신변은 말씀드리기 힘들다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 경비대장은 몹시 훌륭한 사람이어서 왕자의 권력이 통하지 않았다.

    ‘어?’ 하는 사이 난 경비대에서 쫓겨났다.

    모르는 사건이다. 이건 또 어느 루트의 이벤트지?

    아무래도 이 게임은 모든 루트의 이벤트를 골고루 진행시키려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여주인공 시점으론 공략 상대가 연루된 사건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게임에서도 그녀가 모르는 사건이 다른 캐릭터들에게 벌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알렉스 루트의 고난.

    알렉스는 나와 내내 붙어 있었다. 잠시 떨어져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라면 손에 꼽았다. 흔치 않은 일이라 언제였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아카데미로 누군가 알렉스를 찾아온 날.

    손님은 알렉스의 고아원 시절 지인이었다. 난 호위 의무 때문에 망설이는 알렉스를 다녀오라고 떠밀었다.

    고아원 시절 친구, 라는 건 알렉스의 진짜 친구라는 뜻이었다. 난 알렉스에게 고아원 원생들을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건 조프리가 해결해야 할 빚이다.

    찾아왔다는 친구가 도망 노예 신분일 줄은 몰랐지만.

    친구가 노예 신분으로 도망쳐 왔다면 알렉스는 당연히 도주를 도왔을 것이다.

    만약 여주인공이 알렉스 루트를 공략하고 있을 때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자연스럽게 여주인공이 알렉스의 과거를 알게 될 수도 있었겠지.

    좋은 이벤트였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시기가 좋지 않다. 알렉스가 아니라 나한테.

    에드워드가 조프리와 이델라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

    함께 있던 정도가 아니다. 오해하기 쉬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이델라는 에드워드에게 청혼받은 시점에서, 조프리와 포옹을 한 셈이다. 결혼 약속이 아니라 예비 연인 단계를 깼을 때만 해도 에드워드는 이델라와 조프리를 죽였다.

    오싹해서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다. 경비대 밖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으려니 경비대원들이 몰래 찾아와서 차와 초콜릿 같은 걸 쥐여 줬다.

    “죄송합니다, 전하. 새로 온 대장님이 정말 깐깐한 분이어서……. 얼마나 까다로운 분인지 수도에서 데려온 병사들과만 어울리신다니까요.”

    “요 근처 가게에서 쉬고 계시면 저희가 소식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렴 바움쿠헨 경 같은 분이 남의 노예에 손대고 입 닦으셨겠습니까? 오해가 있었을 겁니다.”

    “이크, 대장 나온다. 전하. 저희가 순번을 짜서 휴식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병사들이 우르르 경비대로 돌아갔다. 경비대장이 “여기 아직까지 계십니까?” 하고 눈치를 줘서 난 경비대를 벗어나기로 했다.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부딪힌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놀랐다.

    “헉, 조프리 전하.”

    “왜 혼자 계시지? 호위는…….”

    “…….”

    이제 이 얼굴도 퍼졌다. 도망쳐도 사람들이 알아보겠지. 도시는 글렀고, 소문이 퍼지지 않은 시골이라면…….

    심장이 계속 두근두근 뛰는데 피가 차가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드엔딩 스위치를 눌렀다……. 조프리는 죽는다.

    “도련님! 도련님 잡아!”

    “유리문! 문 열지 마!”

    “아악! 도련님, 도망치시면 안 돼요! 이러고 가시면 저희 죽어요!”

    “알게 뭐야! 너희 대체 누구 편이야? 헉, 전하!”

    발이 닫는 대로 걷다가 몽블랑 상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옷이 엉망이 된 로웰이 다 벌어진 셔츠를 추스르며 유리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내 손을 잡아챘다.

    “왜 여기 계세요? 잠깐, 전하, 달려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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