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9화 (159/293)
  • 159.

    “이런, 잘난 이델라 에클레어 양 아니야.”

    이델라는 무시했다.

    “브륄레는 어디 있나요?”

    “에클레어 양에게 농락당한 슬픔을 위로하러 갔지.”

    “거기가 어딘데요?”

    “천국 같은 곳이지.”

    “괜한 소리 하지 마. 에클레어 양 같은 아가씨가 알 필요 없는 곳이랍니다.”

    브륄레의 친구들은 웃으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델라는 미간을 좁혔다. 그런 쓰레기 같은 곳이 그래서 어딘데?

    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평민들 사이에서 일해 왔는데 ‘아가씨는 몰라도 좋을 곳’ 같은 데를 모를 리가 없었다. 레온 브륄레, 이 쓰레기가!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마음이 급해 큰 실수를 할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머리의 열은 식지 않았고, 그녀는 다음 사람을 찾았다.

    “에드워드 전하는 계시나요?”

    “오오, 이런. 훌륭하신 이델라 에클레어 양…….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군.”

    브륄레의 친구들이 빈정거렸다. 이델라의 표정이 변했다. 친구들은 그녀가 모욕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나,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온 에드워드가 물었다.

    “날 찾아왔어?”

    “에드워드 전하!”

    레온 브륄레의 친구들이 양쪽 벽으로 물러섰다. 금발의 왕자는 그들을 지나쳐 이델라 앞에 섰다.

    이델라는 에드워드를 노려봤다. 그 건방진 작태에 레온 브륄레의 친구들은 헉,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왕자는 이델라를 벌하지 않았다.

    그는 기숙사 문을 열어 주며 “나가서 얘기할까.” 하고 말했다.

    이델라는 망설이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먼저 나갔다.

    그 뒤를 에드워드가 따라갔다.

    레온 브륄레의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랑이란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저 얼음 같은 에드워드 왕자를 녹아내리게 만들다니.

    * * *

    모리스 상송은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작다고는 해도 소파와 책장이 갖춰진 제대로 된 방이다. 저택에서는 두 번째 서재나 작은 주인의 공부방 정도로 사용될 만한 장소일 것이다.

    왕성에서는 한창 생일 파티가 진행 중이었다. 생일을 맞은 당사자인 에드워드가 없는 에드워드 왕자의 생일 파티다.

    수도 귀족을 여럿 초대해 상당한 규모로 열려서, 외부인인 모리스조차 파티가 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은 모리스에게도 자리에 참석해 달라고 말했다. 왕비가 낳은 적자도 아닌 아들을 장자로 인정할 정도니, 그가 에드워드 왕자를 총애하고 있을 거라곤 예상했다.

    그렇다고 해도 셔벗의 귀족인 모리스를 왕자의 생일에 초대하는 건가 싶었다. 그는 왕비의 나라에서 온 귀족이다.

    왕에게 다른 의도가 있나 살폈으나 왕의 표정에선 에드워드 왕자에 대한 순수한 자긍심만 느껴질 뿐이었다.

    모리스조차 느낄 정도였으니 파이 공작은 반드시 참석해야 할 자리였을 것이다.

    “공께서는 어째서 왕성에 계시지 않습니까?”

    “집에 손님을 모시고 주인이 외출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파이 공작이 말했다.

    “저는 공의 손님이 아닙니다.”

    “예. 제가 바란 사람이 아니라 경께서 오셨더군요. 실은 덕분에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명망 높은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유감입니다.”

    유감일 게 뭐란 말인가? 모리스는 불안감을 느꼈다.

    파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왕비님께 시와 음악을 가르치셨다고요.”

    “예. 공주님이실 적에 잠시 연이 닿아……. 제가 와서 공께 곤란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절이라면 제가 맡아도 괜찮을 것 같다 자만한 모양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연유를 듣고 본국에 가 폐하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경께서 수고하실 일은 없습니다. 경께서는 너무도 유명한 분이라 과한 인선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파이 공작이 천천히 말했다. 모리스는 찻잔도 올려져 있지 않은 테이블을 쳐다봤다. 이 방에 안내받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래도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한 모양이었다.

    “이 방에서 머물러 주셔야겠습니다. 저희가 필요로 할 때까지.”

    “저는…….”

    “이는 부탁이지만, 협조해 주시지 않는다면 불가피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

    이는 협박이 아닌가?

    파이 공작은 본국에도 이름이 퍼진 학자였다. 명예를 들먹이려던 모리스는 파이 공작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닫았다.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떤 곤란에 처한 것인가? 왕비의 사실까지 가서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나온 일이 떠올랐다.

    왕비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는가?

    * * *

    에드워드는 기숙사까지 찾아온 이델라 에클레어를 아카데미 밖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종알종알 떠들었다.

    “잠깐만, 걸음이 빠르세요. 저희 어디까지 가는 건가요?”

    “다른 귀가 없는 곳까지. 내일 전교생이 대화 내용을 떠들고 다니길 바라?”

    “…….”

    이델라는 알아듣고 조용해졌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아리송했다.

    조용한 장소를 찾는 거라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갈 필요는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눈에 보였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표정 변화 없이 생각했다.

    조프리를 고립시키긴 쉬웠다. 애초에 어울리는 사람이 적었다.

    개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둘뿐이었다. 알렉스 바움쿠헨과 로웰 몽블랑.

    각자의 방식으로 떼어 내고 접근할 수 없게 조치했다.

    혼자 남은 조프리 비스코티는 에드워드 개인의 힘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틈을 타서 조프리 곁을 기웃거릴 만한 무리는 그레이 선에서 정리했다.

    에드워드가 추종자 형성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다른 왕자의 존재를 잊었다. 에드워드의 생일은 좋은 핑계였다.

    겨우 이 정도 사람들.

    이런 자들이 조프리 곁엔 너무 많다.

    그러나 모두 정리했다기엔 거슬리는 한 사람이 남는다. 이델라 에클레어.

    에드워드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유한 표현이다. 그들은 분수대를 지나쳐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외출했을 때도 이 길을 지나갔다. 그날 에드워드는 습격당했다. 그 자리에 이델라 에클레어도 함께 있었다.

    에드워드는 이델라가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에드워드가 알아볼 만한 표식을 표정에 달고 있었다. 허기진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누구에게나 해가 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짓는 의태 같은 표정.

    에드워드는 불쌍한 아이였고 알렉스 바움쿠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자라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속까지 제정신인 건 아니다.

    이델라 에클레어도 겉은 멀끔했다. 그러나 속내는 까 봐야 알 것이다. 깨끗하지만 낡은 옷, 일하는 사람 특유의 거친 손, 탄 피부 같은 것이 그녀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려 줬다. 일하는 귀족이라고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그냥 불행한 사람이었고 조프리는 그런 사람을 잘 알아본다.

    그녀는 조프리가 기꺼이 동정할 만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습격은 단순하고 빠르게 정리됐다. 에드워드는 목숨의 위협도 느끼지 않고 습격자들을 처리했다.

    그러는 동안 이델라는 벽에 붙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은혜를 입었다, 언제든 갚겠다, 라는 건, 자신의 형편이 차고 넘칠 정도로 좋아져 은혜란 것이 언젠가 떠오른다면 갚겠다는 뜻이다.

    에드워드는 이델라를 자극했다.

    ‘왕비가 보낸 사람이야.’

    ‘조프리가 정말 몰랐다고 생각해? 네가 위험해질 거라고.’

    ‘경비병들이 어떻게 시간에 맞춰 도착했을까. 돌아가서 조프리에게 물어봐. 습격자를 누가 신고했을 것 같아?’

    그는 이델라의 표정이 변하는 걸 관찰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았을 때,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한 상대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수 있는지.

    그러나 그녀는 정색하고 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녀는 조프리를 믿었고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그녀가 정말 싫어졌다.

    그뿐이었다. 그는 알렉스 바움쿠헨도 비슷한 정도로 싫어했다. 거스러미처럼 눈에 거슬리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녀가 견딜 수 없어진 건 얼마 전이었다.

    이델라 에클레어는 에드워드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다. 생일 당일보다 며칠 전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이델라가 선물한 것도 아니었다.

    그 선물은 조프리의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받는 순간 알았다. 조프리의 선물은 항상 비슷했으니까. 이델라는 에드워드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생일이시라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누구에게 들었다는 건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속에서 답이 나왔다.

    조프리다. 그가 이델라 에클레어에게 에드워드의 생일을 알리고 선물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물을 같이 전해 달라고.

    ‘그때 제게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생각해 봤어요. 전 조프리 전하를 믿어요.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 그걸 궁금해하셨던 거죠?’

    에드워드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당황한 듯 말했다.

    ‘아닌가요? 정말로 의심하셨던 거예요? 하지만 그분은…… 에드워드 전하를 소중히 여기시잖아요.’

    그녀가 뭔데 저런 말을 하고 있을까.

    그레이 크래커는 오랫동안 전령 같은 역할이었다.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 에드워드에게 떠오르는 건 조프리와 그레이 크래커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그레이는 과거의 조각 같은 존재였고 그가 조프리와 에드워드 사이를 오가는 건 그때부터 지속되어 온 일이었다. 그게 그의 역할이다.

    이제 그 역할이 이델라에게 옮겨 왔다는 것처럼.

    에드워드와 조프리의 가교가 그녀라는 것처럼.

    그녀가 에드워드의 표정을 살폈다. 에드워드와 조프리의 관계를 궁금해하고 있다. 에드워드의 반응을 살피고, 의문을 품고, 조프리를 위해 두 왕자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무슨 자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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