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8화 (158/293)

158.

알렉스 바움쿠헨은 소란을 듣고 일어났다. 희미한 소음이 창밖에서 들렸다. 축제일 아침이다. 아카데미 내에선 학생들이 준비하는 부스가, 밖에선 상인들이 준비한 매장이 열렸다.

동아리에 소속된 학생들은 이미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축제 준비를 하는 소음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품 안에서 잠든 조프리 왕자를 바라봤다. 몸을 옆으로 틀어 빛을 가리자 왕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왕자는 새벽에 몇 번 깼다. 좀 더 주무시게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알렉스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밖의 소음이 거슬려진 뒤에야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병사들이 보였다. 기숙사장이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는 듯했다.

전날 밤, 이렇게 창가에서, 에드워드가 조프리 왕자를 내려다봤다. 이델라 에클레어와 함께 있는 모습을.

이후 조프리 왕자는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를 적대하고 있다. 알렉스는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에드워드에게서 조프리 왕자를 보호하면 된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이델라가 위험해’라고 말했다.

알렉스는 그녀가 위험하든 말든 궁금하지 않았으나, 조프리 왕자와 함께 새벽에 두 번쯤 깼을 때는 이유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가 이델라 에클레어를 노릴 이유는…… 그녀를 해치면 조프리 왕자가 충격받을 테니까.

조프리 왕자가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니까.

‘아니요. 전하께서 그녀를 특별하게 대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알렉스가 그렇게 말했던 건 진심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이미 알렉스도 구해 준 적 있었다.

왕국의 영웅과 병사들을 투입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었다. 지금 이델라를 돕는 건 그에 비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알렉스는 성장한 뒤에야 작전의 규모를 알고 놀랐다. 왕자의 호의, 책임감, 선량한 마음, 뭐라고 말해도 관계없었다. 조프리 왕자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자애로 대하는 고귀한 왕자.

그러나 로웰 몽블랑은 알렉스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너 혹시 어디 갇혀 자랐어? 눈이 달려 있으면 저렇게 눈치 없을 수가 없는데. 아니, 친구야, 폭력은 쓰지 말자…….’

‘뭐가 특별하다는 거지?’

‘아니, 그냥 봐도 호감 없는 사람한테 할 행동이 아니고. 대하시는 것도 너무 스스럼없고.’

‘전하께선 첫 만남에 나를 같은 침대에서 재우셨다.’

‘어쩌다가? 좋았겠다, 가 아니라. 아니 뭐, 귀족 가문 친구를 편히 대하실 수도 있지.’

‘난 그때 소매치기로 잡혀 들어갔어. 전하께서 감옥에 가두는 대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

‘네 과거의 비밀 스스럼없이 말해 주지 좀 말래? 너 양자 되기 전에 소매치기였냐? 알고 싶지 않았어…….’

문란하고 믿을 구석 없는 로웰 몽블랑은, 알렉스에 비하면 귀족 그 자체인 데다 눈치도 빨랐다.

알렉스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재촉하자 로웰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그녀를 돕겠다고 말했을 때 전하께서 거절하셨잖아.’

‘그게 뭐?’

‘전하를 아직도 몰라? 상인 뺨치게 실용적인 분인데. 거리에서 딱 한 번 본 나를 불러다가 일을 맡기셨을 때부터 알아봤지. 너만 해도,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를 구해 내는 데 바움쿠헨 백작 각하의 힘을 빌리셨다고. 그런데 왜 이델라 에클레어는 본인의 힘으로, 그렇게 접촉해 가며 신경 쓰셔야 하는데? 내게 맡기면 빚이며 약혼이며 깔끔하게 정리될 텐데.’

‘…….’

‘또 한 번 보고 싶으신 거잖아? 가까이 있고 싶고, 돕고 싶고, 자주 만나서 마음을 얻고 싶고, 뭐…… 그런 거지.’

로웰은 조용해지더니 ‘아무튼.’ 하고 화제를 돌렸다.

‘전하께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시든, 호감을 발전시키시든, 정리하시든. 너랑은 상관없잖아? 기사는 의문 없이 따르는 자라며?’

로웰이 싱글싱글 웃어서 알렉스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옳은 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린단 말인가?

창 아래를 다시 보니 병사들이 없었다. 돌아간 건가?

문이 울린 건 그때였다.

“알렉스 바움쿠헨 경. 경비대의 호출입니다. 사유 재산 유출에 관한 참고인 조사라고 합니다. 짐작 가는 일이 있습니까?”

기숙사장이 문 너머로 말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크게 당황한 듯했다. 자존심 강한 귀족이 이렇게 허둥거릴 일이 뭔지 알렉스는 알 수 없었다.

알렉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흔들렸다. 반대편에서 문고리를 잡고 철컥철컥 돌리던 사람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이 흔들렸다. 왕자가 눈을 떴다. 알렉스는 불쾌감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수가 여섯. 복도를 가로막고 있어 퇴로가 없다.

알렉스는 복도 맞은편에서 문을 열고 상황을 훔쳐보는 학생들까지 확인하고 병사들과 눈을 마주쳤다. 병사들은 위압감에 질린 듯했으나, 임무를 방기하진 않았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경. 조사에 응해 주신다면, 부당 대우는 없으리라 약속드립니다.”

“협조?”

“예. 부탁드립니다.”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왕자가 알렉스의 옷자락을 잡았다. 등이 당겨져서 알렉스는 가벼운 떨림을 느꼈다.

“알렉? 무슨 일이야?”

불안해하는 왕자를 두고 갈 수 없다. 알렉스는 판단했으나, 병사들을 진압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왕자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조사만 받으면 돼?”

“조프리 전하?”

“나도 같이 가.”

병사들은 당황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알렉스와 조프리 왕자는 축제 첫날 아침 경비대로 끌려갔다.

* * *

이델라는 씩씩거리며 남자 기숙사로 찾아갔다.

에드워드 왕자가 자신의 생일에 여성에게 선물을 보냈다는 소식은 이미 온 아카데미에 퍼져 있었다. 생일날 아카데미를 떠나 있던 이델라 같은 사람들만 소문을 늦게 접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델라는 기숙사 근처에서부터 ‘앗, 저 사람은…….’ ‘누군데?’ ‘에드워드 전하의!’ ‘아, 그?’ 하는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델라는 험악한 얼굴로 사람들을 쏘아보았으나, 학생들은 가십에 정신이 팔려 이델라의 심기는 눈치채지 못했다.

“에드워드 전하 찾아오셨어요?”

웬 남학생이 큰 소리로 묻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주변에서 하지 마, 미친놈아, 하면서 웃어 대서 이델라는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구겼다.

에드워드 왕자의 생일날 이델라와 레온 브륄레는 하루 종일 아카데미 밖에 있었다.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다 저녁에 청혼을 받았다. 이델라가 수락한 뒤에는 레온이 너무 기뻐서 지금 들어가도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바람에, 들뜬 기분을 달래느라 밤거리를 걸어 다녔다.

하루를 온종일 아카데미 밖에서 보낸 셈이다. 에드워드 왕자의 수작을 알아차릴 새는 물론 없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 아카데미에 돌아온 후 이델라가 사태를 알았듯이, 레온 브륄레도 왕자의 선물 사건을 알았다.

이델라와 레온은 축제를 함께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델라는 축제 당일 아침 레온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가 준비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건 물론 아니었고,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말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레온은 밤을 꼴딱 새운 게 분명한 얼굴로 이델라를 노려봤다. 배신감과 실망으로 점철된 얼굴이었다.

‘저와 에드워드 전하 사이를 저울질하느라 바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대가 일이 있어 바쁘다고 한 말을 저는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말았군요. 그 일이 이런 일일 줄이야.’

레온이 빈정거려서 이델라는 기가 턱 막혔다.

이델라가 말한 일은 말 그대로의 일이었다.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그녀는 이 도시에 남아 있을 수도 없었다!

‘와아, 제게 무슨 일인지 먼저 물어보지도 않으시네요.’

‘꼭 물어야 알겠습니까? 당신과 같은 여성들의 마음을 제가 알았어야 했는데…….’

‘마법사이신 줄 몰랐어요. 말하지 않아도 제 속마음을 아시네요!’

‘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어제의 청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사랑의 배신이 이토록 비참할 줄이야. 당신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똑같이 당하길 바랍니다. 하기야 위기의 순간 당신을 보호해 주지도 않은 왕자 전하와 다시 만나겠다니, 앞길이 가시밭길이겠습니다만.’

레온 브륄레는 저주를 남기고 가 버렸다.

네 잘난 사랑은 하루 만에 저주가 되니?

이델라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레온은 발이 빨랐다. 이미 저만큼 가 버려서 이델라는 멍하니 남겨졌다.

난데없이 뺨 맞은 기분이 가시자, 이델라는 속에서 열이 올랐다.

정말이지 일과 데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는 건 곡예 같은 짓이었다. 몸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바빴으나 이델라는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데이트에 좀 더 비중이 실린 균형이었다.

이델라는 자신의 사악한 계획에 레온을 이용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튼 이 남자는 그녀의 마수에 걸려든 셈이 아닌가.

최선을 다해 대해야겠다고 부채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연인이 될 생각이었다. 기숙사 방에 연애 서적만 열 권이었다.

레온 브륄레는 첫 만남부터 그가 이델라에게 반한 이유를 말했는데, 그녀가 용감하고 동시에 가련해서 그의 이상형에 꼭 맞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이델라는 도대체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이상형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날부터 ‘나와 결혼할 여성은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물론 그대는 노력할 필요도 없이 이미 그런 여성이기 때문에 나는 넋이 나갔고…….’ 같은 소리를 하는 남자였지만. 어쨌든 레온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고 그녀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아무래도 대화를 해 봐야 했기에 이델라는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서 보자마자 소리를 지를 것 같긴 했지만…….

그러나 남자 기숙사에 레온은 없었고 그 친구들이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며 이델라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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