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선물을 위층으로 전부 옮기고, 이델라와 체레니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체레니아가 문고리를 찰칵 잠갔다.
“자, 이제 말해 봐. 전하랑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어떡해, 내 친구가 왕자비가 되다니…….”
체레니아는 전속력으로 망상 중이었다. 상상 속에서 이델라는 이미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듯했다.
이델라는 변명을 짜냈다.
“정말 아니야! 조프리 전하께서 저번 일로 내게 폐를 끼쳤다고, 어떻게든 배상하고 싶다고 하셔서…….”
“조프리 전하라고? 무슨 말이야? 에드워드 전하가 아니라?”
체레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뭐? 누구?”
“이 선물, 에드워드 전하께서 보내셨잖아?”
“왜?”
이델라가 되묻자, 체레니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드워드 전하랑 연애하는 거 아냐?”
“내가?”
“어? 분명, 너한테 생일 선물을 받고 보답으로 보내셨다고…….”
“왜?”
“자신의 생일에 연인에게 선물을 보내는 건, 그거잖아? ‘당신의 존재가 내 삶의 가장 큰 선물이에요.’ 뭐 그런…….”
“뭐래?”
이델라는 기함했다.
“아냐?”
“아냐!”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옆방에서 벽을 쳤다.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체레니아가 퍼뜩 고개를 들고 속삭였다.
“아, 알았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중이시구나? 너랑 만나는 사람이 있는 줄 아직 모르시나 봐…….”
“아닐걸?”
이델라는 확신했다. 구애 따위는 물론 아니고 이건 호의조차 아닐 것이다. 그녀는 에드워드 왕자를 잘 몰랐지만, 그가 그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에드워드 왕자가 선물을 보냈다…….
이상한 확신이 들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대체 왕자가 왜?
* * *
로웰은 몽블랑 상단 집무실로 들어갔다. 얼마 전과 똑같은 호출이었으나 이번엔 발신자가 달랐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첫째 형인 바트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몽블랑 상단주 제이커 몽블랑은 로웰이 들어오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의 얼굴이 새빨개서 로웰은 눈을 감았다.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도 고함이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의자에 다시 앉아 있었다. 목덜미를 잡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 돌아가실 것 같은데. 찬물 좀 가져와.”
로웰의 따듯한 배려를 들은 제이커가 고함을 쳤다.
“야, 이놈아! 이놈의 자식! 너! 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아카데미에 입학했길래 잘했다고 풀어 줬더니, 누구랑 뭐를 해?”
“맞다, 아버지. 성적표 보여 드릴까요?”
로웰은 하인이 가져온 잔을 뺏어 들고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살살 웃으며 묻자 아버지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보기엔 뭐해도 그냥 시늉이었다. 매일 시간 맞춰 건강식품이란 식품은 모조리 챙겨 먹는 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정정했다.
그래도 화내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아서 로웰은 혀를 찼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왕자 전하께서 해 보고 싶으시다는데 제가 뭘 어쩌겠어요?”
“그러지 말긴, 태평한 소리 하게 생겼냐! 내가 어딜 다녀온 줄 알아?”
“어딜 다녀오셨는데요?”
제이커 몽블랑은 로웰을 노려보면서도 그가 내민 잔을 받아 마셨다. 찬물을 깨끗이 비운 그가 집무실 책상에 잔을 쾅 내려놓았다.
“왕성!”
“비스코티 왕성?”
“누가 불렀는지 맞혀 봐라!”
“폐하?”
“왕비님이다, 이놈의 자식아!”
로웰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왕성에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도 왕비를 본 적은 없었다.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외국 출신의 포악한 왕비.
왕비에 대해서는 소문이 많았다. 사치를 즐기고 내정에는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도 유명한 소문은, 그녀가 왕의 정부를 죽였다는 의혹이었다.
왕족에 대한 추문은 큰 소리로 떠들기 힘들다. 조프리 왕자의 인기도 있어서 평민들은 왕비에 대해 ‘음, 뭐…….’ 하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튼 조프리 왕자의 어머니가 아닌가? 게다가 압도적인 권력자였다. 평민들은 쉬쉬했으나 왕비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자가 영웅이 되어 돌아왔을 때 평민들이 보인 열광적인 반응은 그 반동이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비극에 슬퍼하기 마련이다. 높으신 분의 안타까운 사연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로웰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하고 소문을 어느 정도 믿는 입장이었다. 조프리 왕자를 만나면서 반신반의하게 됐지만, 왕자가 왕위를 포기하는 이유를 듣고 다시 왕비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왕자는 그가 왕이 되지 않는 편이 ‘왕비님께도 좋다’고 말했다.
어디에 좋다는 말인가?
그런 의혹을 받고 있는 왕비가, 에드워드 왕자가 왕이 되었을 때, 어떻게 좋을 수 있단 말이지?
판단 기준을 정의와 연민으로 삼으면, 그건 왕비에게 좋을 수도 있었다. 인과응보인 셈이니까.
조프리 왕자라면 그런 의미로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로웰은 추측하고 있었고, 그래서 왕비를 좋아할 수 없었다.
결국 조프리 왕자가 왕위를 포기하는 이유는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 때문이 아닌가.
“왕비님이 너를 아시더구나! 자랑스러워해야 하느냐? 왕비님께서 내 아들을 알고 계시다니! 천하의 망나니로! ‘네 아들이 내 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더라’를 돌려 말씀하시는데, 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제이커가 날뛰었다. 로웰은 붙임성 있게 대답했다.
“그만한 걸로 망하겠어요. 왕실 납품으로 수입도 안 올리시면서.”
“왕족을 적으로 돌리고 밤잠은 자겠냐! 네가 대범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구나!”
“이제 와서 저를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것도…… 제가 왕자 전하 곁에서 떨어진다고 밤놀이를 그만두시겠어요?”
“부모가 자식을 예쁘게 보는 데는 한이 없는 거야! 네놈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편하시겠냐!”
거기까지 말하던 제이커는 또 아들에게 말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네놈이 문제는 맞잖아? 안 그러시던 분이 갑자기 저러실 이유가 너밖에 더 있느냐?”
“아버지야말로 자식을 좀 한없이 예쁘게 봐주시죠.”
“네놈이 예뻐할 데가 어디 있어!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방만했으면 에드워드 전하께서 왕실에 말씀하셨겠느냔 말이야!”
“에드워드 전하?”
로웰은 인상을 썼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전하께서 제 얘기를 하셨다고요? 왕비님께?”
“정확히 그렇게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크래커 소공작의 편지에 언급이 되었다는 게 뭐 그런 뜻 아니겠느냐? 두 왕자 전하께서 너를 어찌 알고 계시는지, 정말이지 다음 대 상단은…….”
아버지가 뭐라고 하는 걸 로웰은 귓등으로 흘렸다.
에드워드 왕자라고?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 왕자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자는? 조프리 왕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조프리 왕자는 항복 선언을 했다. 에드워드는 믿지 않았다.
그럴 수 있지. 에드워드가 조프리 왕자를 미워하는 것도 견제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로웰은 생각했다.
경쟁하는 형제다. 내뱉는 말을 다 믿어 달라고 하는 게 무리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의 행실을 단속해서 에드워드에게 좋을 게 뭐란 말인가?
‘왜 갑자기 에드워드가 등을 돌렸는지 모르겠어.’
조프리 왕자가 그렇게 말했던 때가 언제였지?
플랑베 백작 부인의 무도회 이후다.
그전까지 에드워드와 조프리 왕자는 같은 수업을 들었다.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었고…….
갑자기 등을 돌릴 이유.
배신감?
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퍼즐 맞추듯 맞춰졌다.
어쩌면 에드워드 왕자는 조프리 왕자 이상으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이 형제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경쟁 관계가 아니라면.
“당분간 근신해라! 강의 핑계는 대지를 마. 제대로 안 듣는다는 거 다 알고 있다!”
“잠깐만요, 아버지. 저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좀 듣는 척이라도 해라!”
건장한 하인이 앞을 막아섰다. 로웰은 숙련된 솜씨로 하인의 팔을 피했다. 문은 저기다.
하인들이 도련님에게 위해를 가해도 되나 망설이는 틈을 타 로웰은 잽싸게 문밖으로 튀었다.
“저놈 잡아!”
아버지의 고함이 들렸다. 로웰은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 1층에 있던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집무실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