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6화 (156/293)
  • 156.

    28. 오해와 착각

    파벨은 초조했다. 아버지가 비스코티 왕성에 도착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소식을 전한 하인은 죄가 없었으나, 파벨은 하인의 건방진 태도를 트집 잡아 괜한 분풀이를 한 뒤 거리를 쏘다녔다.

    오늘이 에드워드 왕자의 생일이라는 걸 파벨은 뒤늦게 알았다. 선물을 미리 준비해 뒀어야 했는데. 아버지 소식 때문에 때를 맞추지 못했다.

    파벨은 짜증스러운 마음을 술로 풀었다. 그 때문에 점호 시간이 지나서야 기숙사에 들어가게 됐다.

    서두르던 그는 기숙사를 앞두고 멈춰 섰다. 취해서 헛것을 보나? 그는 두 눈을 비볐다. 그래도 눈앞의 형체는 바뀌지 않았다.

    조프리 왕자와 이델라 에클레어가 포옹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정하게 무슨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파벨은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무 뒤에 숨었다. 그 상태로 귀만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엿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기사가 아니었고 육체 단련도 싫어했다. 지금은 취해 있기까지 했다.

    발이 나뭇가지를 밟고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알렉스 바움쿠헨이 이쪽을 쳐다봤다. 파벨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나무 뒤에 달라붙었다. 숨도 쉬지 않고 기다렸다가, 다시 기숙사 앞을 훔쳐봤다.

    왕자와 에클레어가 헤어지고 있었다.

    에클레어가 손을 흔들며 사라진 뒤에도, 왕자와 알렉스 바움쿠헨은 기숙사로 들어가지 않았다.

    둘이 심각하게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

    왕자가 바움쿠헨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기댔다.

    달에 비친 왕자의 살결이 새하얘서, 파벨은 보지 않고도 그의 표정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하고 멍한, 사람 가슴을 간질거리게 하는 얼굴일 것이다. 바움쿠헨은 그에 넘어간 듯 왕자를 부축해 기숙사로 올라갔다.

    파벨의 심장은 폐가 뻐근할 정도로 뛰었다.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아드레날린이 피를 타고 돌았다.

    파벨은 자신이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느꼈다.

    이성적인 뇌가 어서 빨리 두 사람을 따라가라고 외쳤다.

    파벨은 살금살금 따라갔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려.

    왕자와 바움쿠헨은 301호로 들어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모르는 듯했다.

    방에서 복도로 빛이 새어 나오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벨은 계단을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갔다.

    그는 301호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말을 엿들었다.

    “내일은 나가지 말고……. 하루 종일 여기서…….”

    왕자의 말이 드문드문 들렸다.

    다음 날은 축제일이다!

    학생들이 전부 나가서 놀고 있는 동안, 왕자와 바움쿠헨은 방에서 은밀한 놀이를 하겠다는 게 아닌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쾌감이 달렸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가지 말자니, 왕자도 꽤 밝히지 않나.

    파벨은 슬금슬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결정적 증거’를 완벽하게 써먹을 수 있을까.

    왕자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게 두면 안 된다.

    두 사람이 밀회했다는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현장을 습격해서, 그들을 잡아야 한다!

    파벨은 잠시 기다렸다. 둘이 그런 일을 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삼십 분쯤 기다린 뒤, 파벨은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의 새 친구들과 옛 친구들의 방문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이렇게 부르면 방 안에선 들리지만, 복도를 울릴 정도로 큰 소음은 나지 않는다.

    로웰과 신호를 주고받을 때 쓰던 못된 방법으로 친구들을 부르자, 그들은 짜증 내며 문을 열었다.

    “아, 이 시간에 뭐야?”

    “파벨 진짜 짜증 나.”

    파벨은 옛 친구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에겐 인력이 필요했다. 다수의 입은 무서운 법이다.

    “야, 야. 내가 진짜 엄청난 거 보여 줄게.”

    “잠이나 자. 내일 축제거든?”

    “넌 한가할지 몰라도 우린 데이트 있다고.”

    파벨은 놀라서 물었다.

    “뭐, 너네 둘이 사귀어?”

    “아, 좀. 개소리 말고!”

    친구들이 그에게 베개를 던졌다. 파벨은 이 자식들이 언젠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겠다고 결심했다.

    “됐어! 너넨 꺼져! 나도 너네 필요 없거든?”

    “꺼지긴 네가 꺼져야지, 여기 우리 방이야!”

    “내가 더러워서 간다! 가!”

    화내고 나갔더니 복도에서 기숙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점호 시간에 뭐 하는 거지? 다른 학생들 잠을 다 깨울 셈이야?”

    파벨은 자기 방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된 이상 혼자 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알렉스 바움쿠헨의 거대한 주먹이 떠오르자 용기가 나질 않았다.

    옛 친구들, 아니, 친구라고 부를 수도 없는 비겁자들을 욕하며 파벨은 씩씩댔다.

    그놈들은 에드워드 왕자의 생일이 오늘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파벨을 빼놓고 선물을 준비했겠지. 에드워드 왕자가 그놈들의 비열한 본성을 눈치채야 하는데!

    그때 파벨의 머리에 비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에드워드 왕자가 있지 않은가?

    그의 정보를 백분 활용할 수 있는 왕자가.

    아카데미에는 ‘알려진 얘기와 달리 조프리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의 사이가 좋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파벨은 그게 헛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조프리와 에드워드 왕자가 함께 다닐 때, 파벨은 에드워드에게 직접 귓속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조프리를 이기면 크게 치하하겠다고.

    그때는 솔직히 조프리 왕자에게서 파벨 무리를 떼어 놓으려는 심산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검술 시험 때의 일이며 조프리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가 다시 따로 다니는 걸로 아카데미에선 또 말이 많았다. 두 분이 크게 다투신 게 아니냐고.

    파벨은 알 수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평판 좋은 조프리 왕자를 내심 망신 줄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왕위 경쟁을 하는 두 왕자가 사이좋다는 건 말이 안 됐다!

    파벨은 복도를 살펴봤다. 그리고 기숙사장도 깨어 있는 학생들도 없는 어두운 복도를 소리 없이 지나갔다.

    그가 에드워드 왕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파벨레 상송입니다, 전하. 조프리 왕자가 숨기고 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알려 드리려고 합니다…….”

    파벨은 침을 삼켰다.

    문이 열렸다.

    파벨은 만면에 미소를 걸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준비한 에드워드 왕자의 생일 선물은 그 누구의 것보다 훌륭할 것이다.

    * * *

    이델라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달래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몸이 고단했으나 바로 침실로 올라갈 순 없었다.

    여자 기숙사장이 이델라를 붙들었다.

    “네 앞으로 온 선물이 있어. 휴게실에 뒀는데, 좀 가져갈래?”

    기숙사장이 말했다. 그녀는 이델라보다 2년 선배였고, 이델라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눠 보지 못한 사이였다.

    “지금 바로 가져갈게요.”

    이델라는 휴게실로 향했다.

    왜 휴게실에 보관하고 있지? 의문이 들었으나, 생각을 이어 가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러나 기숙사장과 몇 명의 학생들이 뒤를 따라오는 데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 왜 따라오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선물 뜯는 거 구경해도 돼?”

    “와아, 제 선물을 구경하시겠다고요?”

    “조금만 구경하고 우리가 옮기는 거 도와줄게.”

    기숙사장과 그 친구들이 상냥하게 제안했다. 이델라도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텐데.”

    휴게실에 들어서자마자 이델라는 기숙사장의 말을 이해했다. 선물을 왜 휴게실에 보관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휴게실은 연휴를 맞은 가게 같았다. 엄청난 선물들이 한편에 쌓여서 작은 산을 이뤘다.

    “도와줄까?”

    기숙사장이 다시 물었다. 그녀를 따라온 학생들의 수가 늘었다. 이델라는 그들이 왜 저렇게 눈을 빛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쨌든 도움은 필요했다.

    “부탁드려요.”

    “우와, 이 옷감 좀 봐.”

    “시계잖아? 너무 예쁘다!”

    “외국의 향유야!”

    “로맨틱해!”

    학생들은 이델라에게 온 선물을 구경하며 기뻐했다. ‘포장을 벗기면 짐이 반으로 준다’고 다른 학생들이 말해 줘서, 이델라는 선물을 풀어 보는 데 동의했다.

    귀금속과 교역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귀한 물품이 공들인 포장지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그때마다 행복해했는데, 이델라로서는 다른 사람이 좋은 선물을 받는 게 왜 기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물건을 구경하고 이델라의 방으로 옮겨 주는 무리에 체레니아가 가세해서, 이델라는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델라, 왕자님이랑 무슨 사이야?”

    체레니아가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역시 이 선물은 조프리 왕자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델라는 “나중에, 올라가서 얘기해 줄게.” 하고 속삭였다. 왕자의 선물이라면 왜 방금 전 그녀가 찾아갔을 때 말해 주지 않은 건지 의문이긴 했다. 하기야 왕자는 원래 자신이 해 준 일을 자랑하지 않는 분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일전에도 엄청난 선물을 한 적 있었지만, 그때는 익명으로 보냈다.

    이델라는 이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게 뻔하니까. 이델라를 배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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