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5화 (155/293)
  • 155.

    “뭐?”

    “놀라셨죠! 저도 그랬어요! 믿어지지 않아서,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사실이냐, 진심이냐고요. 이러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취소하면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진심이래요! 맹세한대요!”

    “자, 잘됐다…….”

    바람 빠진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이델라는 나를 놓더니 한 발짝 떨어져서 손톱을 깨물었다.

    “잘된 거죠? 그런데 왜…… 왜 청혼했는지 모르겠어요. 믿기지 않아요. 이상하잖아요.”

    타임라인이 어떻게 돼 가는 거지?

    이델라가 생일 선물을 너무 잘 준 건가? 하트 세 개를 찍었나?

    빠르게 돌아가던 머리가 멈췄다. 이델라는 기뻐하고 있지 않았다. 손톱을 자근자근 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 얘기는 했어?”

    “했어요. 괜찮대요. 그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고, 이제부턴 저를 보호하겠대요. 제가 불행해지게 두지 않겠다고.”

    에드워드가 그렇게 로맨틱하게 굴었다고?

    사랑은 굉장하다. 나한텐 너 때문에 불행했느니 어쨌느니 하더니.

    “그런데 뭐가 불안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사랑…….”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공략 상대에게 함께 마음을 열어 가야 할 여주인공이, 사랑이 무슨 동화에 나오는 마법사라도 된다는 듯이 반응하고 있다.

    불안하게 그러지 마. 나도 불안해지잖아.

    “전하, 제가 결혼을 하면, 정말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결혼식에 참석해 주실래요? 곤란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당연하지.”

    에드워드가 초대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불안했어? 돕겠다고 했잖아. 네가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뒤에 있을게. 별로 도움은 안 됐지만.”

    “아니요! 전하께서 계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전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 보은은 필요하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시간을 주시면…….”

    “응. 그래. 기다릴 테니까 언제든 보답해 줘.”

    난 웃으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벌써 결혼 약속을 했다고?

    에드워드 루트는 진도가 빠르구나. 요즘 애들은 정말. 호감도 하트 세 개째에 약혼이라니 조프리 루트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약혼 축하해. 이건 진짜 약혼이네. 아예 빨리 약혼식을 해 버려. 사람들 백 명쯤 불러서. 증인이 백 명이면 불안감도 가실걸.”

    이델라는 입을 벌리고 아하하 웃었다.

    “그렇게 모여 줄까요?”

    “그럼.”

    왕자 약혼식인데.

    이델라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웃는 입가를 가리려는가 싶더니, 두 손이 얼굴을 덮었다.

    “이델라, 무슨 일 있지?”

    조프리를 끌어안았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델라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죄송해요, 전하. 도와주셨는데.”

    이델라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데이트가 잘 안됐어?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아니요. 아니에요, 전하. 청혼받은 건 사실이에요. 저는, 제가 바라던 거니까요, 바로 승낙했어요.”

    그럼 뭐가 문제지?

    이델라가 손을 치웠다. 어둠 속에서도 눈이 반짝반짝했다.

    기뻐서가 아니다.

    “말해 봐,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말은 잘한다.

    이델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배시시 웃었다.

    “전하.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응. 그래.”

    “저요, 다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어요.”

    어?

    모든 게임은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다.

    그 목표는 단순하고, 목적으로 향하는 수단도 알기 쉽게 설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옛날 RPG 게임의 목적은 용사가 되어 마왕을 잡는 것이다.

    맵을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깨고 잡몹을 잡아 레벨업한다. 동료를 영입하고 장비를 맞추고 스킬을 올리고, 최종적으로 마왕을 죽이는 게 이 게임의 전략과 목표다.

    그렇다고 유연호가 말했다.

    연애 게임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목적은 여주인공의 연애 성공이다.

    수단은, 공략 캐릭터의 성향에 맞는 행동과 대사를 선택해 호감도를 올리는 것.

    공략 캐릭터가 청혼할 때까지.

    이 게임의 목표는 더더욱 적확히 말하자면, 여주인공이 결혼하는 것이다.

    게임 제목 자체가 러브 트랩 메리지니까.

    그런데 게임의 여주인공이 결혼하기 싫어하면 어떡하지?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결혼해서 잘 해낼 것 같지 않아요. 그 사람은 좋은 사람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결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고, 집안도 책임지고 싶지 않고, 부모님이 어찌 되든 다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어요.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저만 책임지고 싶어요. 저한테 연락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이델라는 숨도 안 쉬고 내뱉은 다음,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이에요.”

    아니잖아?

    “제가 아무리 이기적인 애라도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요.”

    여주인공이 애써 웃었다.

    에드워드는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조프리 루트 때는, 하트 세 개쯤 되면 여주인공이 이런 고민을 이미 조프리와 상담하고 있었다.

    “네가 왜 이기적이야?”

    “전하께서는 정말 좋은 점밖에 안 봐 주신다니까요.”

    이델라는 내가 위로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모르겠는데. 네 생활 책임지면서, 학비 대고 공부하면서, 너처럼 열심히 사는 애를 본 적 없는데, 누구한테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데?”

    “와, 전하, 제가 말씀 안 드렸죠. 저 부모님 꼴도 보기 싫어서 올라온 거예요.”

    이델라는 어색하게 말했다.

    “그게 다야?”

    “그리고, 아시잖아요. 이미 약혼자가 있는데, 그 사람과 결혼하면 집안 빚도 사라지는 건데, 그러기 싫어서 여기서 결혼 상대를 찾고 있잖아요…….”

    같이 욕해 주면 되는 건가? 이델라는 가끔 모든 걸 비관하는 상태에 들어선다.

    에드워드가 안 하니 내가 수습하는 수밖에 없다.

    “혹시 욕먹는 거 좋아해?”

    “네?”

    “아니면 자책하면서 기쁨을 느껴?”

    “네? 아니요!”

    “이기적으로 굴려면 집안 돈을 다 가지고 가출했어야지. 네가 어디 있는지도 알리지 말고, 졸업할 때까지 집에 연락하지도 말고.”

    “하지만 집에 가지고 가출할 돈이 없는데요?”

    있으면 들고 도망쳤을 거야?

    이델라는 집에 생활비도 보내고 있다.

    “정말로 그만두고 떠나진 않을 거예요. 저 그렇게 책임감 없는 애는 아니에요.”

    이델라가 웃으며 말했다. 속이 답답해지려고 한다. 착하고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왜 그게 네 책임이야?’

    어?

    유연호의 목소리가 불쑥 떠올랐다. 이 말을 유연호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맞다. 기억났다.

    내가 이 게임을 시작했던 이유.

    ‘난 모르겠는데. 네가 책임질 필요도 없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이 칙칙한 거야. 아니, 너 욕하는 건 아니고. 사실 맞는데.’

    ‘그냥 연애나 해 보는 게 어때? 어? 너랑 연애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 으음, 그래……. 이 반에서 이름 외운 사람 나밖에 없다고……. 너 심각한 거 아니냐?’

    그리고 유연호는 내게 게임을 보냈다.

    편의점 카운터에서 유연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한번 해 봐. 이 게임 주인공 너랑 비슷해.’

    왜 그렇게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냐고 로웰이 물었을 때. 당연히 이 게임의 주인공이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델라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난 그녀를 신경 썼을 것이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넌 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잘할 거야. 하지만 정말로 힘들어지면…….”

    “…….”

    “나한테 말해.”

    이델라는 결국 행복해지겠지만. 나는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도움 되지 않겠지만.

    이델라는 “감사합니다.” 하고 치맛자락을 올려 인사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해요.”

    그녀의 위로 별이 수없이 박힌 밤하늘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다.

    이델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던 건, 결국 내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것과 같은 바람이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다 잘될 거야. 이 게임은 그런 게임이다.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는 게임.

    “별말씀을.”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는 웃으며 두 손을 흔들었다.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게임의 엔딩 컷 같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찾아오겠지.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알렉스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기숙사 위층에서 누군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은 금방 닫혀서, 상대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들떠 있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갈비뼈 아래에서부터 불안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기숙사 밑에서부터 층을 셌다. 알렉스가 “전하?” 하고 불렀다.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1층, 2층……. 귀가 웅웅거렸다.

    닫힌 창은 4층이었다.

    에드워드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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