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이델라와 에드워드의 데이트에서 있었던 습격은 게임에서대로 조용히 지나갔다.
경비대에 신고한 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이델라는 다녀와서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제 안전이요? 전…… 괜찮았어요. 에드워드 전하도요. 그분이요. 예……. 훌륭한 기사의 표본이셨어요. 전혀 겁내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아니, 미친 사람들에게서 저를 멋지게 지켜 주셨어요.”
“괜찮았다니 다행이네. 축제는 갈 거야?”
지나가는 말처럼 묻자, 이델라는 의심 없이 대답했다.
“네. 이미 약속 잡았어요.”
됐다.
한숨이 나왔다.
“축제 시기에 맞춰 약혼자가 올라올 거야.”
“벌써요?”
이델라의 눈이 커졌다.
약혼자는 원래 좀 더 일찍 아카데미에 도착해야 했다. 축제 시기에 맞춰 올라오는 이유는, 몽블랑 상단에서 활약해 줬기 때문이다.
로웰은 상단 직원을 보내 약혼자를 붙잡아 뒀다. 투자 위험성이니 자금 유동성이니 하는 어려운 소리를 하면서 겁을 주면 당분간 거기 매달려 있을 거라고 했다.
이델라가 에드워드를 공략할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이델라는 에드워드와 순식간에 오해를 풀고 데이트도 다녀왔다.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겠네요. 전하, 감사해요.”
“뭘. 이 정도로.”
“전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런 짓을 생각으로만 그쳤을 거예요. 시도도 못 했을걸요.”
‘이런 짓’이라니 연애를 이상하게 표현한다.
“내가 아니었어도 넌 해냈을 거야.”
이델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예, 전하.” 하고 말했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다. 상관없었다. 나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나야 좋았다.
그녀에겐 기대하는 바가 많았다.
에드워드와 연인이 돼서, 사랑에 빠져서, 행복해져서.
조프리를 살려 줄 사람은 그녀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에드워드 생일이네.”
“그렇군요. 몰랐어요.”
“선물 줄 때 내 것도 같이 전해 줄래?”
이델라는 왜 직접 주지 않나 의아한 듯했으나 조프리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예, 전하.”
* * *
306호로 돌아가자 그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방의 불을 꺼 놔서, 난 처음에 또 에드워드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요즘 왜 이렇게 늦게 다니세요?”
그레이가 물었다. 뭐라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었다.
“네가 할 말이야?”
옷을 벗다 말고 램프에 불을 붙이자 그레이는 침대 깊숙이 파고들었다.
“저야 건전한 장소만 다니니까요. 전하를 모시는 사람들은 뭘 하는 건가요? 저잣거리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 통제도 못 하고. 요즘 자주 어울리는 그 상인 아들, 평판이 아주 나쁘다는 건 알고 계세요?”
“내가 걱정돼?”
“무슨 말씀이세요?”
“난 또 걱정하는 줄 알았지. 사실 욕했던 거지?”
괜히 사람 놀라게 한다. 삐딱하게 묻자 그레이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제가 전하 욕을 왜 하겠어요?”
“그럼 뭔데?”
“왕족의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왕자 전하를 모시는 자들이 전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하라도 스스로를 챙기셔야죠.”
“너 소문을 믿어? 알잖아,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몇 년 전까지 에드워드가 백치라는 소문은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구체적인 예시까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왕비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레이가 게임에서부터 밉상이었던 이유는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 내 사람들도 챙기지 않는 일을 왜 네가 챙기려 하는 거야? 넌 네 일을 해.”
그레이는 얼어붙은 듯했다. 다시 보니 그의 표정은 멀쩡해서, 빛의 착각인가 했다.
“에드워드를 챙기라는 뜻이야. 에드워드 생일은 어떻게 할 거야?”
그레이는 꾸물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안경을 찾아 썼다.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늘 하던 대로 하실 건가요?”
난 매년 에드워드의 생일에 마구를 보냈다. 그레이 편에 들려서.
말갈기용 빗이나 편자 관리용 기름 같은 잡다한 물건이었다. 그레이의 형식적이고 값비싼 선물에 섞으면 티도 나지 않았다.
열두 살의 생일엔 보내 놓고 에드워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가 선물을 받고 펄쩍 뛰었다거나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소문은 없었다.
난 다음 해에 케이크를 구워 그레이 손에 들려 보냈다. 그는 질색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면서 드려요? 과하잖아요.’
‘크래커 저택에서부터 가져왔다고 해.’
‘말이 되는 소릴 하세요. 통하겠어요?’
그레이는 투덜대면서도 전달하고 돌아왔다.
‘믿으시네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그레이는 오랜 공범이었지만 지금은 에드워드 편에 붙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비밀을 털어놓길 바라다니 욕심이 과했다.
“못 하지.”
“아예 안 하신다고요?”
그레이는 당황한 듯했다.
이미 이델라에게 부탁해 뒀지만, 그레이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선물하면 전해는 주게?”
“이번에는 생일 축하연을 열 거니까…….”
“거기에 다른 귀족들이랑 같이 조공하라고?”
그레이는 “죄송합니다.”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에드워드가 선물을 받게 할 수는 있겠네.
그레이가 자기 침대로 돌아가서 이불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대화는 끊어졌다. 그는 잠든 듯했다. 아니면 잠든 척하고 있거나.
“그레이, 생일 축하연 초대장은 네가 보내?”
대답이 없었다.
게임에서 에드워드 생일은 선물 이벤트로 끝났는데.
[오늘은 에드워드 전하의 생일이다. 선물은 뭘 할까?]
여주인공의 짧은 고민과 함께 선물 창이 등장해서, 아이템을 골랐던 기억이 있다.
선물은 학생회실에서 건네줬다. ‘기사의 투구’였나를 선물해서 에드워드의 호감도가 소폭 오르는 걸 확인했다.
파티를 한다고?
“그레이.”
“…….”
자는 것 같다.
정작 나는 그레이 때문에 잠에서 깼다.
파티가 열릴 리 없다. 에드워드의 생일에 파티가 열린다면, 다른 공략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로 생일 파티를 열어 줘야 형평성이 맞지 않는가?
이 게임은 공평하게 모두의 생일을 선물 전달로 퉁 쳤다.
난 이델라에게 에드워드 선물로는 무구가 좋을 거라고 말해 뒀다.
이델라는 웃으며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생일 선물로 호감도를 올리고 축제 이벤트를 성공시키면, 에드워드의 호감도 하트는 못해도 세 개를 채울 것이다.
조프리 공략 때도 축제 이벤트로 하트 하나를 채웠던 것 같으니까.
여주인공의 공략은 잘 되어 가고 있다.
베개에 이마를 문대며 에드워드가 행복해하는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여주인공과 나란히 걸으며 웃는 모습을.
하지만 에드워드 루트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도,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미워하겠지.
내 어리석은 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서, 정말로 잠을 잘 수 없었다.
* * *
에드워드 생일 당일 파티는 없었으나, 남자 기숙사 1층 홀은 에드워드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려는 사람들로 넘쳐서 파티장과 다를 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기숙사장은 외부인에게도 홀을 개방했다. 들어와서 선물을 두고 가는 대신 빨리 나가라는 거였다.
여기서 외부인이란 여학생들과 기숙사 교직원, 아카데미 하인들을 포함했다.
에드워드의 선물이 작은 산처럼 쌓여서 그날 기숙사 통행은 교통마비 상태였다. 한번 나간 사람은 들어가는 걸 포기했고 방에 있던 사람은 나가는 걸 포기했다.
나와 알렉스는 나가서 못 들어간 쪽이었다. 수업을 하나 듣고 왔더니 1층이 마비돼서 아예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간 김에 몽블랑 상단에 들러 여주인공 약혼자의 동향을 파악했다. 약혼자는 대여 마차를 타고 마을과 마을을 천천히 지나 올라오고 있었다. 아카데미 도시에 금방 도착할 예정이라는 듯했다.
시기가 맞아들었다. 약혼자는 축제 구경을 하는 이델라와 에드워드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거리는 축제 준비로 어수선했다. 온갖 냄새가 생동감 있게 들끓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예의 거리 화가들 때문인지, 조프리를 알아보는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조프리에게 인사했다. 가판을 지나칠 때마다 온갖 과일이며 뭐를 받아서, 열다섯 살엔가 시장에 나갔다 정체를 들켰을 때가 생각났다. 다 들고 다니면 짐일 것이다.
대충 거절하며 천막이 쳐진 거리를 걷다가, 조용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조프리 루트에서 하트 세 개가 되었을 때, 조프리는 여주인공을 볼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달콤한 말을 했다.
여주인공과 예비 연인 관계가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공략 캐릭터별로 호감도 반응 편차가 큰 게 아니라면, 하트 세 개는 루트 확정 신호다.
에드워드도 얼굴을 붉힐까? 알기 쉬운 반응을 보여 줄까?
그럼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날은 완전히 어두웠고, 기숙사를 찾은 손님은 전부 돌아간 듯 조용했다. 열린 문으로 홀의 빛이 빠져나왔다.
“전하!”
문턱을 지나려는데 몸이 뒤로 휘청했다.
누군가 매달리듯 나를 끌어안았다. 습격인가? 그러나 알렉스가 반응하지 않았다.
돌아보자, 리본을 묶은 말총 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델라였다.
그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전하, 저 청혼받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