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3화 (153/293)
  • 153.

    그레이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얼굴을 가린 가면을 손끝으로 만졌다. 끼고 있다는 걸 알아도 다시 확인하고 싶어진다.

    이런 곳에 그가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는 충격받아 쓰러지실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실망하실 것이다.

    가면무도회는 이름만 무도회일 뿐, 인식이 좋은 파티가 아니었다. 얼굴을 가린 귀족이 하고 싶을 만한 일이란 한정되어 있다.

    속이 다 보이는 옷을 입은 남녀가 테라스로 향했다. 벽에 붙어 서로의 입술을 잡아먹으려 드는 이들이 보인다. 어떤 남자가 그레이의 뒤에 바짝 붙어서 귓가에 속삭였다.

    “혼자야?”

    어깨에 뭐가 닿았다. 그레이가 얼굴을 후려치자, 남자는 헛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이런 미친, 내가 누군 줄 알고…….”

    “저자가 누군지 알아봐. 알려 주고 싶다는군.”

    그레이가 지시하자 거리를 두고 따라온 호위가 남자를 붙잡았다.

    주먹으로 배를 맞은 남자는 조용히 끌려갔다. 기절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향이 강해져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깔끔 떠는 이상한 귀족을 가면 쓴 사람들은 곁눈으로 보며 지나쳤다.

    무도회장 안쪽에는 커튼으로 가려진 방이 있었다. 그레이는 커튼 안쪽 소파에서 로웰 몽블랑을 발견했다. 그가 키득거리며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어서, 그레이는 반사적으로 그 상대를 확인했다.

    검은 머리카락.

    숨이 멎는 듯했으나, 조프리 왕자는 아니었다.

    로웰 몽블랑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부서질 듯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그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착각했지 않은가. 이곳에 왕자는 없다. 도대체 왕자는 이런 곳에서 로웰 몽블랑 같은 자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로웰 몽블랑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레이는 무도회장을 벗어나자마자 여관에 방을 빌려 한차례 씻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저자는 일국의 왕자에게 뭘 보여 주고 있는 건가.

    왕자를 모시는 다른 사람들은, 알렉스 바움쿠헨 같은 자는 왕자를 바른 길로 안내하지 않고 뭘 하는 건가.

    그레이가 왕자 곁에 있었다면…….

    그는 생각을 멈췄다.

    왕성에는 셔벗의 대문장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왕을 알현하고 왕비를 만났다. 왕비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았는가가 의문점이었다.

    북방을 지키던 군대는 조금씩 셔벗 국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병사를 나눠 소식이 퍼지지 않게 움직였다. 극비리에 벌이는 일이다. 왕비의 귀에 닿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렇더라도.

    어째서 그 인물이지?

    그레이는 머리도 말리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 * *

    파벨레 상송은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가면을 쓰고 안으로 들어가자 고향에 온 듯 편안해졌다.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독한 술을 마시자 꽉 막혀 있던 속이 뚫리는 듯했다.

    그는 고난에 처해 있었다. 조프리 왕자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 에드워드라는 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는 조프리 왕자가 그를 외면했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누구를 위해 그가 이델라를 심판하려 했는가? 그는 왕자의 ‘친구’가 아니던가?

    이런 모욕을 주다니.

    파벨은 중얼거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로웰의 충고가 있던 탓에 아카데미에 온 초반은 조심하려 했지만,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로웰 놈은 조프리 왕자에게 붙어서 파벨을 알은체도 않고 있었다.

    자기 좋을 때만 친구를 찾는 놈 같은 건 그도 알 바 아니었다. 로웰 놈. 그 박쥐 같은 자식.

    중얼거리던 파벨의 눈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남자가 들어왔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 은근한 말투.

    얼굴에 딱 맞는 흰 가면 아래로 웃는 인상의 입술이 보였다. 가면을 벗겨 보면 생글생글 웃고 있을 것이다.

    로웰 놈이잖아?

    파벨은 기둥 뒤에 숨어서 그를 훔쳐봤다. 과거를 청산했다느니 헛소리를 하더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뻔한 장소에 있었다.

    로웰이 만지고 있는 남자는 검은 머리카락에 말랐는데, 가면을 벗겨 내도 봐줄 만할 것 같은 생김새는 아니었다. 피부가 깨끗하다는 점이 좀 괜찮은가.

    안 놀던 사이에 눈이 발바닥에 가 붙었나.

    “뭐 해?”

    어떤 여자가 파벨에게 다가왔다. 그는 꺼지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다.

    “아, 뭐야. 웬 비싼 척이야. 오늘 이상한 애들 많네.”

    “누굴 보고 하는 소리야?”

    파벨이 발끈하자, 여자는 짜증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너잖아? 어디서 자꾸 이런 애들이 기어들어 오는 거야. 여기도 소문이 났나. 하기야 왕자가 드나드니까…….”

    “왕자?”

    “너 몰라? 요새 좀 유명한데. 뭐 남자들이랑만 노시긴 하지만.”

    “왕자!”

    “너 진짜 뭐니?”

    여자는 파벨에게 흥미를 잃고 가 버렸다.

    파벨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왕자가 남자들이랑 논다고!

    조프리 왕자의 독특한 행동이 떠올랐다. 파벨을 위아래로 유혹적으로 훑어보는 거나 입술을 축이는 행동 같은 것.

    왕자의 소문은 완벽했다. 그러나 어떻게 완벽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나? 사람은 다들 문제가 있기 마련이었다.

    파벨의 아버지인 모리스 상송만 해도 밖에서는 훌륭한 문장가이자 학자로 칭송받으나 집에서는 끔찍한 인간이 아닌가?

    셔벗의 현왕은 좋은 통치자였으나 자식이 없어 불온한 자들에게 빌미를 줬다.

    그런 의미에서 조프리 왕자는 수상쩍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해서 재물을 푸는 왕자?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사랑받는 다정한 왕자?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뭔가 구린 구석이 있을 것이다. 이상한 성벽이 있을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했던 농담이 생각나면서, 파벨은 번개에 감전된 듯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왕자의 약점을 잡았다!

    파벨의 친구들도 재미로 남색을 즐기긴 했다. 그러나 왕자가 남자를 만난다면, 그건 그들이 하는 것처럼 놀이 정도일 리가 없었다. 왕자니까!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피가 빠르게 도는 기분이었다.

    파벨을 외면하고 가던 왕자가, 그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왕자가 까만 눈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빌면, 파벨은…….

    파벨은 헉 숨을 들이켰다. 목을 움켜쥐던 손이 떠올랐다.

    ‘입 다물어.’

    알렉스 바움쿠헨 놈은 어쩌지?

    “보잖아. 다른 데로 가자. 들키면 어떡해. 앗…….”

    파벨이 숨어 있는 기둥 옆에서 남녀 한 쌍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서로에게 취해 히죽거리면서도 파벨이 신경 쓰이긴 하는 듯했다.

    파벨은 그들을 벌레 보듯 하다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들킨다고?

    그때 바움쿠헨은 왜 파벨을 협박했는가?

    무엇을 말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놈은 그때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왕자의 방이었다! 주인과 한 침대를 쓰고 나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겁박했다니. 파벨은 분해서 주먹이 떨렸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 옆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파벨을 올려다볼 바움쿠헨을 떠올리자 손에서 힘이 빠지고 얼굴이 풀렸다.

    파벨은 히죽거리며 기숙사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잘 요리해 볼 생각이었다.

    돈을 주고 부리는 아카데미 하인이 그에게 소식을 가져왔다.

    “부친께서 비스코티에 도착했다고 하시는데요. 폐하께 인사드리고 바로 아카데미로 오신다고 합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파벨이 벌떡 일어났다.

    * * *

    모리스 상송은 왕비의 사실에 들어갔다. 그를 안내한 하녀가 차를 내왔다. 그는 왕비가 그를 사실로 들일 줄 몰랐기 때문에, 소파에 앉아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옷을 단정히 정리하고 단추를 풀었다 다시 잠그는 동안 차는 식어 갔다. 그는 식은 차를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찻잔이 비어도 왕비는 오지 않았다.

    하녀가 다시 들어와서 약속이 미뤄졌다고 고하는 일도 없었다.

    모리스는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삐져나오지 않게 다시 정리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뒷목이 뻣뻣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오히려 왕비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다.

    피아노와 화분이 놓인 방이었다. 왕비가 공주이던 시절에 그녀는 화려하고 값비싼 장식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 취향이 바뀌었는지도 몰랐다. 그 시절 모리스는 왕비의 취향이 조잡하다고 생각했다.

    피아노와 화분은 가까이 둬서 좋은 조합이 아니다. 관심 가는 것에만 몰두하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성품은 여전한 듯했다. 그러나 그런 왕비를 위해 모리스는 몇십 편의 시를 지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시절의 일이다.

    벽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조잡한 원고 같은 것과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을 뿐이었다.

    모리스는 초상화를 살펴봤다.

    검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 왕비를 닮은 소년이었다.

    이 사람이 조프리 왕자.

    장성해서 이미 성년을 앞두고 있을 텐데, 걸려 있는 그림은 어린 시절의 것이었다. 어린아이가 성인이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면 초상화를 다시 그리는 게 보통일 텐데.

    섬세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이 그림으로도 느껴졌다. 왕비와 닮았다는 건 모리스에게 그런 뜻이었다.

    그러나 왕자 자신은 온화한 성품이라는 소문이었는데.

    조프리 왕자는 유명인이라 셔벗에도 소문이 퍼져 있었다.

    모리스는 그 그림을 찬찬히 뜯어봤다. 눈앞에 왕자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그림 속 왕자는 체구가 작았다. 그의 아들과 비교해 생각해 보면 열 살 이전일 듯했다.

    궁인이 들어와 왕비님이 편찮으셔서, 이번 방문은 무리일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그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모리스는 알면서도 물었다.

    “조프리 전하시죠. 왕국의 자랑이세요.”

    “그렇군요. 어떤 분이십니까?”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요?”

    궁인은 진심으로 놀랐다.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아 소문에 어둡습니다.”

    “그러시군요. 외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전하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이랍니다.”

    “그렇습니까?”

    “예. 저희에게도 항상 잘 대해 주시죠. 무엇보다도…….”

    궁인은 신나서 말했다. 모리스는 주의 깊게 들었다. 궁인은 자신의 작은 주인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궁인의 그 태도였다.

    모리스는 궁인에게 보답으로 금화를 주고 사실을 떠났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