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2화 (152/293)
  • 152.

    이델라는 숨이 막혔다. 언제까지 이러고 가야 하지? 그녀는 설명이 필요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말했다.

    “조프리가 따라오고 있어.”

    “……네?”

    “빨리 가는 게 낫겠지?”

    “네. 뛸까요?”

    “티 나게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걸어.”

    이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재게 움직였다.

    식당에 들어서자 에드워드 왕자는 이델라의 어깨에 올려놓은 팔을 내렸다. 직원이 그들을 자리에 안내했다. 에드워드는 창가를 피해 안쪽을 선택했다.

    “조프리의 정부가 아니라며.”

    에드워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단어 사용이 엉망이라 이델라의 기분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 단어 말씀 안 하시면 안 돼요?”

    “애인으로 정정할까?”

    “둘 다 아니에요.”

    “그런데 왜 널 쫓고 있는 거지?”

    “제가 걱정돼서 그럴 거예요. 조금 일이 있었거든요.”

    이델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과는 무슨.

    에드워드는 사과하러 나온 게 아니다. 그에겐 다른 목적이 있다.

    이델라는 일하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상대해 봤다. 그녀가 연회장에서 귀족을 접할 일은 없었으나, 가게에서 만난 귀족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특별히 성격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일하는 계급은 귀족들에겐 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인간이 아닌데 인간처럼 기분을 챙겨 줄 필요는 없다. 에드워드는 왕자였다. 이델라에게 원하는 바가 있다 해도, 그녀의 기분을 신경 쓰진 않는다. 물어볼 뿐이다. 그녀는 마땅히 대답해야 한다.

    식당 직원이 다가왔다.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물어 메뉴를 고르고 과실주를 주문했다. 시종일관 다정한 태도였는데도 그녀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신경 쓴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신경 쓴다는 건, 상대가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한다는 뜻이다. 조프리 왕자처럼.

    직원을 보낸 에드워드가 물었다.

    “어떤 일인데? 불쌍한 일이야?”

    “예?”

    “조프리가 널 동정할 만한 일이냐고.”

    “…….”

    이델라는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사실이었지만, 사정이 있다는 사람에게 보통 저렇게 묻던가?

    이 사람 이상한 사람이다.

    이델라는 직감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조프리가 이렇게나 신경 쓰는 사람은 드무니까. 이유가 궁금했어. 형제의 일이잖아.”

    “두 분의 우애가 좋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요. 조프리 전하께는 폐 끼치지 않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무도회에 동행하자고 요청한 사람은 에드워드였다.

    그녀는 무도회 초대장이 필요했으나, 에드워드의 요청은 당황스러웠다. 왜 그녀를 파트너로 삼는단 말인가?

    에드워드와 그녀의 접점이라곤 파벨 사건뿐이었는데, 그 기억은 결코 좋은 종류가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호감을 느껴서 함께하자고 말했을 리는 없었다.

    물론이었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파트너로 무도회에 참석해. 한 번이면 충분해. 조프리와 엮인 소문을 정리하고 싶지 않아? 우린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이델라는 물론 그러길 원했다. 조프리 왕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뜬소문을 덮는 데는, 다른 확실한 증거를 들이미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델라가 조프리의 애인이라면 다른 남자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참석할 리 있겠는가?

    그래서 이델라는 무도회 파트너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그 말은 에드워드도 조프리 왕자의 뜬소문을 잠식시키길 원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델라는 강의실에서 두 왕자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우애 좋은 왕자님들이라고 다른 학생들이 말했다.

    그걸 들으며 혼자 기분 좋게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조프리 왕자에게 좋은 형제가 있다는 건 당연하고 온당한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왕자님은 좋은 분이다. 그런 분께 좋은 가족이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이델라의 옷에 와인을 쏟았다.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가 곤란에 처하도록 방관한 정도가 아니다.

    우연이었을까? 실수?

    아니라면…….

    그녀는 의심하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그녀 개인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아무 접점도 없었다. 조프리 왕자가 엮인 사건을 제외하면.

    무도회에서 에드워드는 누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가?

    그녀가 경계하는 기색이자 에드워드는 한발 물러났다. 코스 요리가 나오는 동안 그는 평범하게 행동했다.

    입 다물고 식사하고 가끔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에드워드는 훌륭한 왕자처럼 보였다.

    전통 요리점의 음식은 훌륭해서, 식사가 끝나 갈 즈음 이델라의 어깨에서도 긴장이 풀렸다. 에드워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일어날까?”

    이델라도 바라는 바였다.

    의문은 전혀 풀리지 않았지만, 하나는 알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겉보기처럼 그럴듯한 왕자가 아니다.

    그들이 한적한 거리를 걸어 아카데미로 돌아갈 때였다. 날이 저무는 거리에 긴 그림자가 졌다.

    한량처럼 보이는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더니 에드워드에게 일부러 부딪혔다.

    “어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남자가 시비를 걸었다. 이델라는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뻔한 자해 공갈이다. 에드워드는 귀티 나는 생김새였다. 누가 봐도 귀족이었는데 호위도 달고 있지 않았다.

    불량배들의 표적이 될 만했다. 이델라 자신이 혼자 다니는 데 익숙해서 잊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세요?”

    이델라는 놀란 척하며 일부러 신분을 노출했다. 불량배라면 상대가 왕자라는 걸 알자마자 꽁무니를 빼고 도망칠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델라의 말 같은 건 못 들은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사람을 쳤으면 배상을 해야지. 어? 그게 사람 사는 도리고 이치지 않겠어?”

    “무슨 일이야. 시비 걸렸어?”

    “이것참 곤란하군. 우리가 험한 일은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야.”

    골목 너머에서 여러 개의 그림자가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다.

    잘못 걸렸다고 그녀가 생각했던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십수 개의 그림자가 골목에 들어찼다. 사람 그림자로 그늘이 졌다. 앞뒤로 막혀서 이델라는 숨이 막혔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붙잡고 에드워드의 표정을 봤다. 달아날 방법이 있을까?

    그는 웃고 있었다.

    “숨어 있어.”

    어디로?

    불량배들이 달려들었다. 이델라는 벽에 착 달라붙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비명이 들렸다.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델라는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만 들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가 아팠다. 강하게 악물고 있었다.

    “끝났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이델라는 실눈을 떴다. 차마 앞을 보지 못하고 조심히 땅을 쳐다봤다. 뭔가 거뭇한 게 흐르고 있었다.

    이델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도 그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피다.

    바닥을 적실 정도로 피가 흘렀다. 이델라는 벽에 기댄 채 폐 속에 있는 숨을 모두 뱉어 냈다.

    “전하를 노린 습격인가요?”

    에드워드는 검을 들고 시신의 가슴을 다시 찌르고 있었다. 날이 시체를 파고들었다 빠져나올 때마다 죽은 몸이 들썩였다. 이델라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 내가 살아 있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거든.”

    “…….”

    “왕비가 보냈어.”

    에드워드가 이델라를 쳐다봤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에드워드가 사적인 질문을 했을 때 이델라는 대답하지 않고 넘겼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그녀가 알 필요 없는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습격자가 왕비라면, 조프리 왕자의 어머니다. 권력 암투, 정치적인 음모,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이델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이델라와는 관계없다. 그런데도 에드워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델라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말해도 될까?

    “제가 조프리 전하를 싫어하길 바라세요?”

    “조프리를 믿어? 연관되지 않았다고.”

    에드워드의 푸른 눈은 아름다웠고, 목소리는 낮아서 신뢰가 갔다.

    “방금 너도 위험했어. 눈 감고 있느라 아무것도 못 봤나?”

    이델라는 어깨를 움츠렸다.

    “전 조프리 전하를 두 달 뵈었어요.”

    에드워드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도……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알아요. 그분이 자객을 보내셨다면, 그분은 왕자가 아니라 배우가 되셨어야 했을걸요.”

    에드워드는 시신을 한 번씩 찔러 보던 걸 멈추고 납검했다.

    “너 기분 나쁘네.”

    “오늘 저한테 사과하려고 부르신 거 아니죠?”

    이델라는 확인했다.

    “조프리를 좋아해?”

    “아니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조프리는 널 좋아할 것 같아? 좋아한다면 얼마나?”

    “…….”

    이델라는 벽에 붙은 채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궁금하지 않아?”

    에드워드가 물었다.

    골목 모퉁이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군화다. 또 다른 습격자일까? 이델라는 긴장했다.

    나타난 건 일단의 경비병이었다. 그들은 한가하게 걸어오다가 에드워드와 그 아래 참상을 발견하고 안색이 변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무장 강도는 대체 어디……. 시체가!”

    “잠깐, 에드워드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고했다고? 누가?”

    에드워드가 물었다.

    “시민분이 소란을 듣고…….”

    “경비대가 시민의 신고를 듣고, 한 시간 만에 출발했어? 놀랍네.”

    “그, 그것보단 늦었지만 저희는 최대한 서둘러서…….”

    “그래?”

    에드워드는 웃었다.

    젊은 경비병이 이델라를 챙겼다. 귀족 아가씨가 놀라고 다쳐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고 스스로 일어났다.

    에드워드가 그녀를 쳐다봤다.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얼굴이었다.

    “우리가 습격당한 시간보다 먼저 소란을 들은 시민이 있나 본데.”

    그녀는 만남 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에드워드 왕자는 무슨 속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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