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51화 (151/293)
  • 151.

    이델라가 예의 남작 아들을 만나기로 한 장소는 거리 분수대 앞이었다. 역사가 유구한 데이트 장소다.

    그곳에서 새 옷을 입은 이델라를 보고 있으려니 벌써 마음이 안 좋았다.

    여주인공을 기다리게 하다니. 신분이 왕자도 아니면서.

    남작 아들, 이름이 뭐였더라, 레온 브륄레가 이델라에게 다가갔다.

    그가 골목에서부터 머리를 매만지고 유리창에 자기 얼굴을 비춰 봐서, 나와 알렉스는 저놈이 그놈 아닐까 진작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나가자.”

    알렉스는 음료를 비우고 나를 따라 나왔다. 가게 문이 딸랑 열리자 뒤에서 종업원이 “전하, 안녕히 가세요!” 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난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종업원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입에 검지를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델라 양.”

    브륄레는 이델라를 대뜸 이름으로 불렀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델라는 웃으며 받아 줬다. 분수대의 물줄기가 햇빛에 부서져서, 둘의 만남은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브륄레 자리에 에드워드가 있었다면 완벽했을 것이다.

    레온 브륄레는 미남은 아니었다. 키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이델라와 비슷한 정도였다. 이델라가 구두를 신기는 했지만. 에드워드가 브륄레보다 머리 두 개는 클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이델라에게 먹히는 포인트는 귀여움이었다. 장신의 남자가 귀엽기는 쉽지 않다. 이델라가 육 년 전의 에드워드를 봤다면 좋았을 텐데. 이보다 귀여운 어린애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무도회장에서 이델라 양을 보고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지금 말씀하셨네요.”

    이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양산을 펼쳤다. 나들이복을 입은 아가씨와 모자 쓴 신사의 데이트다. 어느 저택에서 이런 그림을 본 적 있는 것 같다.

    분위기가 정말 괜찮았다. 저 둘이 이어지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지금으로선 에드워드보다 브륄레가 승산 있어 보였다.

    이델라가 브륄레랑 축제에 가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대의 숨결은 참 향기롭네요.”

    “향수를 뿌려서요.”

    “햇살마저 우리를 축복하는 것 같군요.”

    “봄 햇살이 원래 따듯하죠.”

    불안감은 십 분 만에 사라졌다.

    브뤨레는 혀에 버터를 바른 것처럼 숨 쉬듯이 찬사를 던졌고 이델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의 대결 같았다.

    “…….”

    “…….”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요?”

    이델라는 펄쩍 뛰며 부정했지만, 브륄레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라도 안 믿겠다.

    둘은 가게 구경을 하며 걷다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갈 필요 있을까?

    “알렉. 이만 돌아갈까?”

    “예, 전하.”

    “저 둘 잘될 것 같아?”

    “아니요.”

    이델라…… 연애 못하는구나.

    이델라의 철벽은 공략 캐릭터가 아니면 깰 수 없었다.

    애초에 파벨 무리였던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일 리 없으니까, 만나면 만날수록 싫어지겠지.

    아무리 봐도 연애하고 싶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지만 이델라가 저런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저런 이델라를 어떻게 에드워드에게 붙이지?

    내 고민은 쓸모없었다.

    나와 관계없이 게임은 돌아가고 있었고, 에드워드는 이델라에게 뭔가를 느낀 게 틀림없었다.

    이델라는 에드워드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 * *

    이델라는 새 옷을 입었다. 새 옷이라고 해 봐야 평상복이나 교복이 아닌 다른 옷일 뿐이었지만, 조프리 왕자가 보내 준 옷이다. 이델라는 몇 주 전 아카데미 정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차 몇 대가 정문 앞에 줄줄이 서고 그 안에서 보물 상자 같은 게 척척 내려왔다. 짐꾼들이 ‘이 옷들의 주인인 아가씨’를 찾아서, 이델라는 틀림없이 착오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이 그녀일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맞았다. 옷 가게 직원이 확답해 준 순간 이델라는 보낸 사람이 왕자임을 확신했다.

    선물한 분이 신원을 숨기고 싶어 하신다고 직원은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왕자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이델라에게 선물 같은 걸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이델라는 기뻤지만, 왕자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런 좋은 옷 입고 갈 곳도 없는데. 속으로 생각했지만 며칠은 옷장만 봐도 괜히 기뻤다.

    그 옷을 입고 다른 왕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델라는 만남의 광장에 도착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제시간에 맞춰 나왔다. 백 미터 밖에서부터 사람들이 반응해서, 이델라는 그의 존재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금발 벽안의 왕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델라는 저 외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화에 나올 것처럼 빛나는 금발과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

    그녀가 저런 금발 벽안의 미인이었다면, 결혼 작전은 더 수월하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카데미로 도망 오기도 전에 팔려 가듯 결혼했을지도 모르지만…….

    분수대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인사도 없이 말했다.

    “갈까?”

    “예, 전하.”

    에드워드는 이델라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내 탓에 무도회를 즐기지 못했지. 계약 이행이 미흡했어. 사과하고 싶은데. 시간을 내주었으면 해. 언제 가능하지?’

    이델라는 어떤 말을 해도 용서받을 얼굴로 저렇게 정떨어지는 소리를 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몹시 기뻐했다.

    ‘에드워드랑 외출해? 잘됐다. 그날 일을 사과하고 싶대? 말했잖아. 걔가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라고.’

    이델라는 따라 웃는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저렇게 즐거워하시는데. 에드워드 왕자의 사과를 듣는 일이 뭐 대수라고 거절하겠는가?

    무엇보다 이델라는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성격이 좀 꼬였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상하게 구는 편이지. 어쩌면 못되게 보일 수도…….’

    ‘근데 다 애정 표현이야.’

    ‘맞다. 에드워드는 직설적인 사람을 좋아해. 대놓고 말해도 화내지 않을 거니까, 성격대로 행동해야 돼. 넌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조프리 왕자는 열심히 조언했다. 이델라와 에드워드가 선이라도 보는 듯했다.

    에드워드가 이미 이델라에게 빠져 있다는 듯 말해서, 그녀는 들으면서 어리둥절해졌다.

    애초에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를 서술하는 말은 형용 모순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면 그냥 개자식 아닌가?

    이델라는 조프리 왕자를 좋아했지만 동시에 그가 팔불출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허물은 콩깍지라도 씐 듯 못 보는 사람이 세상엔 존재하는 법이다.

    왕자가 그런 사람이라도 이델라는 싫지 않았다. 사실 왕자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게 보는 듯했으니까.

    아니라면 이델라가 너무도 매력적인 사람이어서, 그녀가 선택만 하면 모든 남자들이 결혼해 달라고 매달릴 거라는 믿음은 갖지 않을 게 아닌가?

    왕자의 믿음은 저버리겠지만, 이델라도 에드워드를 만나고 싶었다.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를 있는 힘껏 포장해 줬다. 고르는 단어마다 에드워드에 대한 애정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그녀에게 저런 가족이 있었다면 행복했을 텐데. 그녀는 에드워드가 부러웠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도 조프리 왕자를 소중히 여기는가?

    에드워드는 어딘가를 보더니 갑자기 이델라를 끌어안았다.

    “따라붙은 사람이 있어.”

    “예?”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이델라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앞으로 당겼다.

    “서둘러.”

    그가 빨리 걷기 시작해서 이델라는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밀착한 몸으로 에드워드의 미지근한 체온이 느껴졌다. 급박한 말에 비해 에드워드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에드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이델라는 흠칫 놀랐다.

    유리구슬 같은 눈이다. 예쁘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델라는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적의를 느꼈다.

    그건 그녀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조프리 왕자에 대한?

    * * *

    에드워드와 이델라는 다정해 보였다. 나와 알렉스는 예전의 카페에 앉아 둘을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이델라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이델라는 밀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진도를 뺀다고?

    에드워드가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은 아닐 텐데, 이델라도 무례한 행동을 가만둘 사람은 아닌데.

    둘은 연인처럼 거리를 걸어갔다.

    카페 종업원이 커피를 리필해 가져다줬다. 나와 알렉스는 입술에 검지를 댄 채 종업원에게 눈인사를 했다.

    ‘힘내세요, 전하.’ 종업원은 작게 말하더니, 우리가 카페를 나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뭘 힘내라는 거지?

    “전하. 인파 속에 숨어야 합니다. 에드워드 전하는 실력이 뛰어난 기사라, 그렇게 쳐다보시면 시선을 느낄 겁니다.”

    “응.”

    알렉스랑 벽에 찰싹 붙어서 두 사람을 따라갔다.

    에드워드 루트에 제대로 진입했는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는데.

    뭔가…… 이건 아니지 않나?

    나 어디까지 따라가고 있는 거지?

    에드워드가 속도를 높였다. 이델라와 경보라도 하는 것처럼 걷고 있었다. 미행하는 입장에서, 따라가기 위해서는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둘이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에드워드 루트의 데이트에는 왕비님의 습격이 따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방향을 바꿔 경비대에 들르려다, 아까 갔던 카페로 돌아갔다.

    종업원에게 팁을 주고 심부름을 부탁하자 그는 경비대에 대신 말을 전해 주었다.

    고난은 연인의 사이를 더 끈끈하게 만든다. 드라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고난이 조프리가 된다는 점이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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