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알렉스 앞으로 디저트를 이것저것 끌어다 주자 그는 포크를 들고 방황했다.
마침 종업원이 새 디저트를 가져왔다. 크림이 잔뜩 올라간 카스텔라였다. 난 그것도 알렉스에게 줬다.
“위에 체리 먹어도 돼.”
“네, 바움쿠헨 경. 맛있게 드세요.”
이델라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알렉스를 쳐다봤다. 저런 눈으로 쳐다보면 누구든 입을 열고 싶어질 거다.
알렉스는 난처한 듯 말했다.
“고아원에 잠깐 있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저보다 연상이었고……. 어느 날 갑자기 입을 맞추더니 자기랑 사귀자고 말했습니다. 사탕 같은 걸 주면서 만지기도 했고요. 곧 고아원에서 사라져서 헤어졌습니다.”
“…….”
이델라가 나를 쳐다봤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저, 전하. 그거 혹시…….”
“얼마나 연상이었는데?”
그녀를 가로막고 알렉스에게 물었다.
“열 살?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범죄잖아!
그 고아원은 어떤 범죄의 온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 명단에 있어?”
고아원 사람이라면 수색 명단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예.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름 알려 줘.”
“예, 전하.”
“그리고 알렉. 사귀는 사람이 네 몸을 만져도,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돼. 넌 건장한 기사니까 감히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알렉스의 눈이 내 손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알렉스의 가슴을 도닥이고 있었다.
“상사가 이런 짓을 해도 싫으면 팔을 꺾고……. 너 잘하는 거 있잖아.”
얼른 팔을 치우자 알렉스는 “예, 전하.” 하고 대답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애한테 성교육도 안 시킨 모양이다!
이델라가 잼과 소스가 올라간, 겉이 딱딱하게 구워진 파이를 알렉스 앞에 끌어다 줬다. 휘핑크림이 올라간 코코아와 달지 않은 스콘이 나왔다. 우리는 그것도 알렉스 앞에 놓았다.
“많이 먹어.”
“맛있게 드세요.”
“이것도 맛있어.”
“이것도요.”
“…….”
이야기가 원래 궤도로 돌아온 건 한참 뒤였다.
“사실 데이트 신청을 받긴 했어요.”
이델라가 고백했다.
“에드워드한테?”
“네? 무슨 말씀을.”
그녀가 질색해서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에요. 전하께서도 아는 사람일지 모르겠어요.”
“누군데?”
“레온 브륄레라고, 브륄레 남작의 장남이래요. 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읽어 보실래요?”
바라던 바였다. 그녀가 작은 가방을 똑딱 열더니 편지를 꺼냈다.
편지는 연애편지의 양식에 맞게 쓰였다는 느낌이었다.
-친애하는 에클레어 양에게.
꽃피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 봄을 영애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무도회에서 영애를 뵈었을 때, 미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마치 개나리처럼 작고 가련하여 제 마음에 박히었습니다…….
웃으라고 쓴 건가?
“별론데.”
“예?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가요? 데이트 신청이 맞나 저도 의문이었는데, 친구는 틀림없다고 확신해서요.”
이델라는 초조한 듯했다. 누가 봐도 데이트 신청은 틀림없지만.
“사람이 별로야.”
“편지만 읽고요?”
이델라가 웃었다. 물론 레온 브륄레의 사람 됨됨이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기기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난 편지를 알렉스한테 건넸다.
“잠깐 보여 줘도 돼?”
“네.”
이델라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알렉스가 편지를 읽었다.
“별로지?”
“예.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하.”
내가 뭔가 더 말해 보라는 눈빛을 보내자 알렉스는 덧붙였다.
“봐 봐. 다수결에 의해서 이 사람은 별로야. 다음 사람은?”
“네?”
이델라는 구슬이 굴러가듯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저 무도회 한 번 나갔을 뿐이라고요. 에드워드 전하 말고 다른 분이랑은 손도 못 잡아 본걸요?”
“그럼 에드워드는 어때?”
“뭐가요?”
“애인으로서 참 괜찮다거나, 얼굴이 빛난다거나, 티 내면서 챙겨 주는 면이 귀엽다거나…….”
“네? 저랑 같은 분 말씀하시는 거 맞죠?”
이델라는 포크를 쥐고 웃다가 잔을 깰 뻔했다. 알렉스가 붙잡아서 사고는 면했다.
“전하 너무 팔불출이신 거 아니에요?”
나도 에드워드가 연애 상대로 어마어마하게 괜찮은 애라고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공략 캐릭터가 됐다는 건, 그 나이 때에 가장 괜찮은 다섯 명의 남자 중 하나라는 게 아닐까?
어쨌든 에드워드는 신분이 왕자였다. 그만한 신분을 가지고 남작 아들보다 덜 유혹적이기도 힘들 텐데.
그 어려운 일을 에드워드가 해내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솔직하지 않아. 걔가 아무렇지 않게 군다고 진짜 그런 건 아니야.”
사실 널 보기만 해도 좋은 상태일걸.
난 이델라를 다시 설득해 봤다.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그러다 솔깃하면 어쩌시려고요.”
솔깃하라고 하는 건데.
이델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저 같은 애가 에드워드 전하랑 잘돼도 괜찮으세요?”
“너랑 잘되면 에드워드가 감사할 일이지.”
이델라에겐 문학 수업이 절실하다.
“전하께선 정말 좋은 분이세요.”
이델라는 배시시 웃고는 입을 닫았다. 이마에서 입까지 이어지는 선이 반듯했다. 먼 곳을 보는 눈이 단단해서, 설득은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
이델라는 그 남작 아들을 만날 것이다.
아니, 공략 캐릭터 말고 다른 캐릭터랑 데이트하는 연애 게임 주인공이 어디 있어…….
처음부터 연애 게임 여주인공라기엔 심상치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델라가 ‘두근두근, 이분이 혹시 나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진 않다.
관심 없는 애를 도대체 어떻게 유혹해야 연애를 시킬 수 있지?
* * *
“제게 관심 없는 사람을 유혹해 본 적 있냐고요?”
로웰은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괴고 나를 쳐다봤다.
“있죠. 안 통했지만.”
“너도 실패할 때가 있어?”
“전하께서는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가 손을 접었다.
“싫어하는 사람한테 억지로 들이대는 짓은 안 한다고요. 제가 싫다는 사람을 괴롭혀 봐야 뭐 하겠어요?”
“싫은 건 아니고, 아예 관심이 없을 때.”
“곁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조금씩 설레게 만들면서 거리를 좁혀 나가는 방법이 정석 아닐까요?”
“자주 마주쳐야 한다는 거지?”
“예. 안 통하는 사람도 있지만요.”
로웰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연애 게임의 철칙이다. 자주 만나야 호감도가 오른다.
에드워드와 이델라는 같은 강의를 들어야 한다. 거리 데이트도 해야 하고.
그리고 축제.
축제도 참여해야 한다.
잊을 뻔했다. 내가 플레이할 때 축제는 조프리랑 보냈으니까.
이번엔 에드워드랑 보내야 한다. 이델라가 선택지 실수를 하지 않게, 확실히 코칭해서.
축제에서 에드워드 루트 선택지는 모르지만, 그가 어떤 성격을 좋아하는지는 대강 알고 있다.
직설적이고 엉뚱한 성격.
평범한 예상을 벗어나는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에드워드는 조금씩 이상한 선택지들을 좋아했다.
어차피 말은 이델라가 하는 거기 때문에, 그녀는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엉뚱한 소리를 하면 된다.
“고마워. 도움이 됐어.”
301호를 나가려고 하자, 로웰이 붙잡았다.
“전하. 오늘 밤에 외출하실 건가요?”
“아니. 오늘은 일정이 있어.”
“내일은요?”
“내일도 바쁠 것 같은데.”
이델라 약혼자의 상경 때문에 마음이 바빴다.
“밤 나들이는 이제 그만두신 건가요?”
“아니. 할 만한 건 다 해 봐야지.”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약속이 있어서, 며칠간 전하를 못 모실지도 모르겠어요.”
로웰은 직접 문을 열어 줬다. 내 방에 거의 도착했는데도 그가 문을 닫지 않아서, 열쇠를 꺼내다 눈이 마주쳤다.
“로웰?”
“예.”
“바쁜 일 끝나면 알려 줘.”
“예, 전하.”
로웰은 웃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난 도트를 불렀다.
도트가 가져온 조사서에 따르면, 브륄레는 파벨 무리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듯했다.
“복도 사건에서부터 조짐이 있었지만, 둘이 결별한 건 무도회 이후인 듯해요. 두 사람이 무도회장 안에서 말씨름한 걸 많은 사람이 목격했어요. 하인들 말에 따르면, 브륄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성을 모욕하다니. 너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지만, 그녀가 소란을 원하지 않는 듯하니 참겠다.’고 말했고 파벨은 ‘웃음이 나와 웃었을 뿐이다. 파트너이신 전하도 이해하시는데 왜 네가 나대냐.’고 응수했다고 해요.”
그렇게 훌륭한 이유로 파벨과 싸웠다고? 곤란한데.
“브륄레의 이성 관계는?”
“깨끗해요. 지금은 에클레어 양 한 명만 만나고 있어요, 왕자님.”
“그 전엔 얼마나 만났다는 거야?”
“다양한 분을 만났던 것 같아요. 하지만 데이트만 하는 정도의 가벼운 만남이었대요.”
“이성에게 가볍게 접근하는 사람이네.”
“아닌 것 같아요. 친구들에게 ‘사랑에 빠졌어. 그녀의 용맹하고도 가련한 모습에 넋을 잃었어.’라고 말하는 걸 어떤 하인이 들었대요.”
용맹하고 가련한 건 뭔데?
“그게 증거야?”
도트는 그보다 더한 증거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입만 산 인간 같은데.
과묵하게 짝사랑하고 있었다고 해도 마음에 안 찼겠지만. 대체 이런 쓸데없는 방해꾼은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엔 나 때문이 아니다. 재빨리 치워 버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