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9화 (149/293)
  • 149.

    무슨 뜻이었을까?

    이델라를 붙잡고 다시 물을 걸 그랬다. 돌아가는 길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바닥을 보며 걷는데 알렉스의 그림자가 따라오지 않았다.

    “알렉?”

    “전하, 이델라 에클레어 양은 전하께 특별한 분입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언제 걸음을 멈췄는지 모르겠다. 한참 뒤에 떨어져 있었다.

    “아니. 넌 알잖아. 우리 몇 번 만난 적도 없는데.”

    “몇 번을 만나야 특별해지는 겁니까?”

    여주인공이 학생회에 들어갔을 때, 학생회실에 있던 공략 캐릭터들은 단번에 그녀에게 호감을 보인다.

    “그러게. 횟수가 중요하진 않지. 특별해 보여?”

    불안해져서 묻자,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래?”

    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팔을 잡자 그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이 앞으로 끌려갔다.

    그가 내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열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무도회장이 아니고, 우리를 지켜볼 사람은 없었다. 로웰의 입술은 장갑 위에 닿았지만 지금 나는 맨손이었다.

    문란한 행위, 라고 하던 기숙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배 속이 조여들었다. 이건 조금 문란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손바닥이 간지러워져서, 알렉스가 그제야 숨을 내뱉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느낌이었군요.”

    “……뭐가?”

    “에드워드 전하가 절 싫어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난 모르겠는데.

    나보다 알렉스가 에드워드를 더 잘 안다고?

    “전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알렉스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말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라고.

    난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뿐이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그러나 열기는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는 동안 식어 버렸다. 파트너를 잃은 에드워드는 무도회장을 떠났고,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 * *

    무도회는 과연 여러 소문을 생산해 냈다.

    ‘에드워드 전하의 그녀는 누구?’에서부터 ‘무도회장에서 일어난 사고’라거나 ‘왕자를 바람맞힌 그녀’, ‘전하의 첫 춤을 가져갈 사람은 누구?’ 등등.

    에드워드와 이델라 얘기밖에 없는 듯했다.

    이델라는 대번에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그녀 앞으로 초대장이 쏟아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이델라는 에드워드를 오해하게 된 듯했다. 하트를 적립하기는커녕 삭감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옆에서 오해를 풀어 주려고 노력했지만, 잘됐는지는 다음 이벤트를 봐야 알 것이다.

    성적 확인 이벤트.

    즐거운 무도회의 밤이 휩쓸고 간 자리에 중간고사 결과 발표라는 폭탄이 떨어졌다.

    이 세계는 학생 인권에 관심이 없어서, 학생들의 성적과 순위를 학생회관 게시판에 벽보로 붙여 놨다.

    난 이델라와 에드워드가 그 앞에서 마주치는 모습을 봤다.

    게임에서 공략 캐릭터와의 만남은 무조건 이득이다. 대화 선택지를 잘 고르면 호감도가 오른다. 선택지도 쉬운 편이었다.

    에드워드와 이델라는 서로를 발견했다. 둘의 키 차이가 적당해서, 이델라는 살짝 올려다보고 에드워드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구도였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의 인사도 없이 서로를 무시하더니, 게시판 앞에 나란히 서서 순위를 확인하고 각자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

    인사도 안 한다고?

    난 학생회관 앞에서 나오는 이델라를 붙잡았다. 그녀는 수심 깊은 표정이었다가 나를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 성적 확인하러 오셨어요? 지금 안에 사람이 없어서 확인하기 편하실 거예요.”

    내가 공략 캐릭터였다면 가슴 찡해질 만큼 애처로운 태도 변화였다.

    여기 있는 게 진짜 조프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둘이 아직 화해 안 했어?”

    “네? 둘이요?”

    “에드워드. 둘이 같이 있던 거 아니야? 옆에 있어도 인사 안 하던데.”

    “그분이 계셨어요? 몰랐어요.”

    이델라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그 얼굴을 못 알아봤다고?

    “그보다 전하, 차석 축하드려요! 정말 멋져요. 해내셨네요. 전하를 이기겠다고 한 귀족들도 코가 납작해졌을 거예요.”

    “…….”

    난 시험지를 거의 백지로 제출했다.

    뒤에서 수석을 차지하지 않으면 이상한 시험지였다.

    그러나 며칠 전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조프리의 시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입학 차석인 조프리 왕자는 이번에 몇 등일까 궁금해했던 교직원이 아니었다면 순위 발표가 있고서야 발견되었을 거라고 했다.

    난 관대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없는 시험지에 점수를 줄 수는 없으니까. 영점 처리하는 수밖에.’

    교수는 울면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의 관리 미숙입니다. 관리 감독관은 마차에 매달아 아카데미 도시를 한 바퀴 돌릴 예정입니다. 부디 마음을 푸시고 재시험을 치러 주십시오.’

    난 관리 감독관을 용서하는 대가로 재시험을 치러야 했다.

    뒤에서 죽다 살아난 감독관이 시험지를 구경하면서 ‘앗, 전하. 그 칸 채우는 걸 까먹으셨군요.’, ‘이런, 그 다음 칸도요! 전하께서 피곤하시군요. 저만 아니었다면 이미 수석을 하시고도 남았을 텐데……. 흐흑.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전하.’ 하고 참견했다. 호의에 가득 찬 행동이었는데 내게는 누를 끼쳤다.

    그렇게 제출한 시험지가 차석이었다.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었다. 조프리가 차석이라는 건 바꿀 수 없는 설정이다.

    “이델라. 괜찮은 결혼 상대는 찾았어?”

    “아직이요, 전하. 연애는 정말 어렵네요…….”

    이델라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무도회 날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이델라는 어떻게 아셨느냐는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도와주겠다고.”

    “……무엇을요?”

    “뭐든지.”

    난 진작 알았어야 했다.

    플레이어가 바꿀 수 있는 건 공략 루트밖에 없었다.

    * * *

    첫 무도회는 큰 이벤트지만, 그 무도회가 전부는 아니었다. 여주인공은 다른 무도회도 참석할 수 있었다. 공략 캐릭터를 대동하고.

    도트가 보낸 사람이 여주인공의 약혼자에게 붙어 있었다. 그는 상경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여주인공을 만나러 오기까지 대충 이 주가 걸린다고 생각하면, 그 안에 에드워드 이벤트를 몇 개나 진행시켜야 할지 감이 잡힌다.

    ‘에드워드의 실수를 대신 사과하기 위해.’, ‘내가 차석 한 거 축하해 주겠다고 했잖아.’ 등의 억지를 부려서 여주인공을 옷 가게로 데리고 나갔다.

    옷 가게 주인은 갈색 머리 미인의 실체를 보고 ‘어머나, 두 분 정말로 잘 어울리시네요.’ 하고 매번 하던 칭찬을 했다가 우리의 눈총을 받았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될까요?”

    “당연하지. 첫 무도회에서 춤도 추지 못했잖아. 많이 기대했을 텐데.”

    기대했던 건 사실인지 이델라는 얼굴을 붉히며 선물을 받았다.

    나와 알렉스가 봉투를 두 개씩 나눠 들어서, 이델라는 몹시 황공해했다.

    그녀에게 마음의 빚을 지운 다음에는 카페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슬쩍 물어보니, 기숙사장과 그 패거리는 다시 안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생크림과 딸기가 잔뜩 들어간 케이크와 쌉싸름한 커피를 시키고, 마카롱과 다른 스위츠는 포장해서 카운터에 맡겨 뒀다. 부담스러운 제안은 상대를 기분을 좋게 만들고 나서 해야 할 것이다.

    여주인공은 단것으로 배를 채우자 금방 행복해진 듯했다. 그녀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려서 난 눈치를 보다 말을 꺼냈다.

    “계획은 어떻게 돼 가?”

    “사실 무도회에서 다른 분들과 춤을 추면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었거든요. 저에게 호감을 보이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친구가 연애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해서요.”

    “친구?”

    “룸메이트예요. 연애 상담을 잘 해 줘요.”

    여주인공의 룸메이트라면, 튜토리얼을 진행하는 그 캐릭터였다.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여주인공은 게임 커맨드를 잘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게임 속에서 여주인공은 교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이벤트를 그 친구에게 전해 듣고 알았다. 본인은 일하느라 바빠서 1학년 아카데미 생활을 통째로 날려 버렸으니까.

    “연애는 그렇게 시작하는 거구나?”

    “전하께서는 연애해 보셨나요?”

    “한 번도.”

    “무도회 자주 참가하지 않으세요?”

    무도회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기회가 많다고 누구나 연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풀어 줄 필요는 없겠지.

    “앗, 그렇군요. 걱정이네요.”

    이델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난 이델라를 격려했다. 그녀는 왕자 둘을 골라잡을 수 있는 캐릭터였다. 이델라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알렉스를 끌어들였다.

    “바움쿠헨 경은 어떠세요? 연애 경험이 있으신가요?”

    알렉스는 케이크를 우물우물 먹다가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없을 줄 알았는데 침묵이 길었다.

    “있어?”

    “아주 어릴 적에…….”

    넌 지금도 어리잖아?

    “대단하세요! 어떻게 하셨어요?”

    알렉스는 당황하더니 나를 보며 변명했다.

    “정말 어릴 적입니다. 예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도 않고…….”

    “어떻게 시작하셨는데요?”

    “맞아. 맞아.”

    알렉스는 이 테이블에 모인 세 사람 중 가장 연애 경험이 많았다. 다른 두 명의 경험치가 0이니까,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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